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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정치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

형이상학적 찐따 2016.04.01 14:52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Politics』은 『국가Republic』 4권에서 플라톤이 지지했던 처자 공유제communism of wives and children를 강하게 비판한다. 『정치학』의 2-4권은 각각 (1) 국가는 가능한 한 하나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과 (2) 처자 공유제가 시행되면 모두가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3) 처자공유제를 통해서 플라톤이 이루고자 했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을 공격한다.


I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하나되는 것이 가장 좋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비판한다.

그런데 국가가 발전하면서 그 하나됨이 더욱 깊어지면 그것은 국가가 아닐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네. 국가란 그 본성상by nature 특정한 다중체multitude이기 때문이지. 국가가 더욱 하나되면 그것은 당장 국가라기보다는 하나의 가정과 같이 될 것이고, 이어서는 하나의 가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인간과 같이 될 것일세. 실제로 우리는 국가보다 가정이, 가정보다 개인이 더욱 하나되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누군가 이 일[국가가 하나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는 안 될 걸세. 그것은 곧 국가를 없애버리는 일이니 말이네(1261b16-22; 강조 추가).

많은 주석가들은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오해했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염두에 둔 것은 국가를 이루는 시민들의 생각과 감정의 단합인데, 아리스토렐레스는 수적 통합성numerical unity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은 수적 통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이런 식으로 오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문제의 통합이 "시민들의 생각과 감정"에 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국가보다 가정이, 가정보다 개인이 더욱 하나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정확히 어디를 향하는가? 그것은 그저 국가의 하나됨 그 자체인가? 그렇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문제 삼는 것은 국가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하나되는 것이다. 국가가 국가로서 건재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하나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플라톤은 하나됨을 어느 선에서 제한할 것인지 전혀 얘기하지 않는다.

플라톤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국가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하나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할 때 플라톤이 의도한 것은 국가가 더 이상 국가가 아니게 될 때까지 하나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여전히 국가일 수 있는 한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하나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 대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벗어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국가가 국가일 수 있는 한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하나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가의 하나됨이 더욱 깊어지면 어느 순간 하나의 가정,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인간과 같이 될 것이다. 가정이나 인간의 하나됨과 국가의 하나됨은 무엇이 다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국가란 그저 많은 인간들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다른 인간들로 구성된다. 물론 플라톤도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점에 주목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국가는 단순한 연맹alliance이나 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합쳐서 만든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차이의 원칙principle of difference으로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그런 동시에 국가에는 - 개인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 상호 평등의 원칙principle of reciprocal equality도 필요하다. 국가의 하나됨을 도모하는 일은 그래서 국가를 하나의 인간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는 것이 가깝다. 국가는 다수의 개인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그 개인들은 언제나 구체적으로 다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인간보다 (그러나 그런 한에서는 가장) 하나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되어야 할 것이다.


II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 그러니까 공동체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하나됨이 최선이라고 하더라도, "모두가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곧 최선이라는 논증이 곧 증명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하는 플라톤]은 이것이 국가가 완전히 하나됨을 나타내는 징표sign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1261b16-20).

국가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하나되는 것이 좋다고 치더라도, 처자공유제가 시행되어 모두가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곧 국가가 최선의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전자의 징표가 아니니까 말이다. 독감에 걸리면 열이 난다. 그래서 고열은 독감에 대한 징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의 하나됨이 무르익는다고 모두가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그래서 후자는 전자에 대한 징표가 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들은 또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여기서 플라톤을 오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플라톤이 마치 시민들이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국가의 하나됨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을 한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자가 후자의 수단이라는 식의 주장을 플라톤에게 귀속시키지 않는다. 전자가 후자의 징표라는 주장이라면 몰라도.

그러면 플라톤은 왜 시민들이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는 사실이 곧 그 국가가 하나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보았나?

(1) 모두가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국가는 가장 통합된 국가다.

(2) 공유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모두가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 공유제를 채택한 국가는 가장 통합된 국가다.

간단하게 형식화하면

A는 B다

C는 A다

∴ C는 B다

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타당한 논증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형식화가 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보기에 위 논증의 올바른 형식화는

A1은 B다

C는 A2다

∴ C는 B다

다. 이렇게 본다면 이 논증은 부당하다. 매개 명사middle term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모두가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A1로도 A2로도 형식화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라는 표현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표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261b20-32). 그것은 "각각의 개인이 별개로 모두"라는 분산적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고, "모두 한꺼번에"라는 집합적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All과 Every의 차이] 아리스토렐레스는 전제 (1)과 (2)가 각각 이 분산적 의미와 집합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논변은

(1) 각각의 개인이 별개로 모두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국가는 가장 통합된 국가다 (∵ 시민들의 생각과 감정이 통하기 때문)

(2) 공유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모두 한꺼번에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 여인들이 각각의 시민들과 모두 혼인을 한 것도, 아이들이 각각의 시민들 모두에게서 낳아진 것도 아니기 때문)

∴ ?

이렇게 읽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제 (1)이 참이라고 생각한다. 분산적 의미에서 "모두가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통합성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제 (2)는? 일단 이것 역시 참인 것처럼 보인다. 공유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집합적인 의미에서 "모두가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여인들이 자신과 혼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속한 공유 공동체의 일원과 혼인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집합적인 의미의 소유 관계는 시민들의 생각과 감정의 하나됨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이런 집합적인 의미의 공동 소유는 오히려 더 해악이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들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아들을 분산적으로가 아니라 집합적으로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아들이 되느니 분산적인 의미에서 사촌이 되는 게 훨씬 낫다는 것.

더군다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자공유제는 실효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들은 그 외모가 닮아서 금새 누가 (분산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아들이고 아버지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면 전제 (2) 역시 거짓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진짜" 자기 혈족을 찾을 것이고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III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자공유제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합성과 공통 감각을 산출하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처자공유제가 시행되면 서로가 자신의 혈족인 줄 모르고 지나치게 서로를 함부로 대하거나 근데 혈족이 아니면 함부로 대해도 되냐? 혈족이 맺어서는 안 되는 막장 드라마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자기 부모도 못 알아보고 까불거나 형제자매과 성관계를 맺는 등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내치려는 사람들은 우리스토텔레스가 수호자들guardians을 너무 얕보고 있다고 불평한다. 수호자들은 보통의 평범한 시민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그러실 분들이 아니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다르다. 위 반론은 아마도 수호자들이 특별한 교육은 받는다는 점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수호자들은 어릴 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전인 교육을 받지 않는가? 하지만 이것이 곧 그들이 위와 같은 도덕적 문제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만약 수호자들에 대한 교육이 그들의 도덕적 타락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려면 공유제가 교육의 결과여야 할 것이다. "잘 가르쳐놨더니 알아서 공유제를 받아들이고 살더라"와 같은 식이라면 공유제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들은 이미 훌륭하게 자라 나라를 수호할 수 있는 재목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플라톤이 지지하는 공유제는 교육의 결과가 아니라 교육의 부분이다. 공유제 사회에서 살게 하면서 또한 배워가도록 한다는 게 플라톤의 생각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공유제가 시민들을 훌륭한 수호자로 키워내기 위한 수단이라면 - 공유제가 이미 훌륭한 수호자로 자라난 시민들에 의해 자연히 채택되는 것이 아니라면 - 공유제 사회를 겪어보지 않은, 그러니까 아직 교육을 모두 이수하지 않은 시민들은 여전히 평범한 시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각주:1]


뷰 텍스트

Peter Simpson, "Aristotle's Criticism of Socrates' Communism of Wives and Children," Apeiron 24(2) (1991): 99-113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T. H. Irwin, "Aristotle's Defense of Private Property" in Davie Keyt & Fred D. Miller Jr. eds., A Companion to Artistotle's Politics (Cambridge, MA: Basil Blackwell, 1991): 200-225  

  1. 물론 이는 소정의 교육을 모두 이수한 수호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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