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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 통치하도록 강제되는 자 본문

논문과 원전

철인왕, 통치하도록 강제되는 자

동경 TOKYO 2016. 4. 15. 22:57

플라톤이 『국가Republic』에서 내세운 철인왕의 통치는 몇 가지 질문들을 낳는다. ① 철학자들이 나서서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계속해서 철학자들이 통치를 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대체 왜? ② 『국가』의 목표 중 하나는 정의justice가 그 자체로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가 통치를 하는 일은 국가의 정의에 이바지하는 일이므로 정의롭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철학자에게는 자신의 본성에 잘 맞는 철학을 하는 일이 가장 좋다. 국가 통치는 철학에 전념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면 정의가 그 자체로 좋다는 『국가』의 주요 논제는 무너지는 게 아닌가? ③ 플라톤은 정의로운 행위가 이롭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실제로 정의롭게 행동할 동기를 정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플라톤은 정의로운 영혼이 어떻게 이로운 것인지만을 논한다. 만약 플라톤이 정의로운 행위를 할 이유가 있음을 보이려면 정의로운 영혼과 정의로운 행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보여야 할 것이다. 어떤 관계?

크리스토퍼 버켈스Christopher Buckels는 이들 세 문제 모두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I 기존의 해석들

버켈스는 먼저 기존의 해석들이 위 세 문제 중 적어도 하나 이상에 대해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해석은 크게

(1) 철학자가 왜 통치하도록 강제되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할 수 없는 것

(2) 철학자가 왜 통치하도록 강제되어야 하는지 설명하는/할 수 있는 것

으로 나뉘며 각각은 다시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뉜다.

(1)은 철학자가 자발적으로 통치를 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통치하도록 강제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럼 철학자는 왜 통치를 하고자 하는가? 그게 좋으니까. 이 좋음의 성격에 따라 (1)은 다시 (1A)와 (1B)로 갈라진다.

(1A)에 따르면 좋음은 비인격적 좋음impersonal good이다. 비인격적 좋음은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에게for 좋은 것이 아니라 그저simpliciter 좋은 것이다. 줄리아 아나스Julia Annas가 이런 해석을 채택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정의가 정의로운 행위자에게 이롭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반영하지 못한다.[각주:1]

(1B)은 그래서 좋음을 인격적 좋음personal good으로 이해한다. 좋은 것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좋을 수밖에 없다는 것. 통치를 하는 것은 곧 철학자에게 좋다고 보는 입장이 여기에 속한다. 가령 리브C. D. C. Reeve는 철학자가 국가가 주는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수도 있고, 통치 기간 중에 짬을 내어서 철학도 할 수 있으며, 형편없는 통치자가 다스리는 국가에 사는 것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1B)를 지지하는 또 다른 학자 니콜라스 화이트Nicholas White는 "통치하도록 강제된다"는 말을 약하게 해석한다. 사실 이것은 정말로 강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미 통치를 할 의향이 있는 철학자들이 그저 다시 한 번 더 통치를 할 때가 되었다는 알림reminder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리처드 크라우트Richard Kraut도 비슷한 생각이다. 철학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형상의 질서를 따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 형상에는 정의 그 자체도 있다. 그러니까 철학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통치를 할 것이다. 하지만 화이트와 크라우트의 해석은 플라톤이 왜 최고의 통치자들은 "통치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장 작다"(520d2)고 말하는지, 왜 그들은 스스로 형상에 다가가도록 만들 필요는 없어도 다른 사람의 덕을 함양시키고자 할 대에는 그렇게 하도록 강제되어야 하다고 말하는지(500d4-8) 설명하지 못한다.

(2)는 그래도 좀 낫다. 철학자가 통치하도록 강제된다는 점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2)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보기에 철학자들은 통치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2A)는 하나를 얻고 다른 하나를 잃는다. 통치가 철학자에게 해롭다고 말해버리기 때문. 철학을 하는 삶보다 정치를 하는 삶이 더 못하다. 물론 정치를 하면서도 짬을 내서 철학을 할 수는 있겠지만 철학에만 전념하는 것보다는 훨씬 못하다. 그런데 정의는 철학자에게 통치를 하라고 명령한다. 때문에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정의는 모든 이에게 그 자체로 좋은 것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더 못한 삶을 살라고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가장 정의로운 영혼을 가진 철학자에게?

(2B)는 정의가 더 좋은 삶을 살지 말라고 강제하면서도 스스로를 좋은 것이라고 내세운다는 결론을 회피하고자 한다. (2B)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통치를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법law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법은 정의로운 법이지만, 그 자체로 정의는 아니다. 정의는 이 같은 법을 허용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 같은 법이 세워져야 한다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정의는 여전히 철학자에게 좋은 것으로 남을 수 있다. 에릭 브라운Eric Brown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문제는 브라운이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a) 철학자는 왜 그런 법을 허용하는 정의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가? 정의가 아니라 법이 강제했다고 말함으로써 문제가 정말로 해결되는지는 의문이다. (b)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의는 정확히 어떻게 철학자에게 좋은 것일 수 있는가? 정의가 직접 철학자에게 더 못한 삶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곧 정의가 철학자에게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버켈스는 기본적으로 (2B)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브라운이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채워나가고자 한다.


II 교육은 정의의 가치를 누리는 데에 필요하고 또 충분한가?

버켈스는 먼저 문제 ③을 해결하고 이어서 문제 ②와 ①을 차례로 해결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문제 ③에 대한 답이 나머지 문제를 풀기 위한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에 논문의 대부분은 문제 ③을 푸는 데에 할애된다.

질문 (a)는 대강 이런 것이었다. "철학자는 왜 통치하라는 강제에 응해야 하는가?" 철학자는 곧 정의로운 영혼을 갖춘 자이고, 통치하라는 강제에 응하는 것은 정의로운 행위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다. "정의로운 영혼을 갖춘 자는 왜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가?" 결국 이 질문은 문제 ③과 연결된다. 정의로운 영혼과 정의로운 행위 - 영혼적 정의psychic justice와 실천적 정의practical justice - 사이의 이 연결 고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브라운은 교육이 양자를 연결한다고 본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자는 실천적으로 정의롭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자는 결코 영혼적으로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교육은 실천적 정의의 충분조건이고, 영혼적 정의의 필요조건이다.

교육 → 실천적 정의

~교육 → ~영혼적 정의

∴ 영혼적 정의 → 실천적 정의 

그러나 버켈스는 교육이 정의로운 영혼을 갖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정의로운 행위를 담보하지도 않는다고 지적한다.

일단 교육을 받지 않고도 영혼적으로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다. 반례가 있다는 것. 당장 소크라테스가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국가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영혼은 정의롭다. 그런가 하면 교육을 받아도 실천적으로 정의롭지 못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과의 대화 중 계속해서 교육을 받은 자들이 나중에 덕에 대한 신념을 잃어 버릴 가능성에 대해 우려한다. "그러므로 서른이 된 이 제자들이 그런 안타까운 상황으로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가르칠 때에 각별히 신경써야 할 것일세(539a8-9)." 교육을 받은 자들도 덕에 따라 행위할 동기를 잃을 수 있다. 교육은 실천적 행위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교육은 정의라는 가치를 누리는 데에 필요하지도 충분하지도 않다.


III 영혼적 정의와 실천적 정의의 관계

그러면 영혼적 정의와 실천적 정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리브의 대답은 플라톤이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 사실은 실천적 정의가 아니라 영혼적 정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은 사실 영혼적 정의뿐이라는 것. 실천적 정의는 영혼적 정의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의로운 영혼을 만든다는 목적을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될 때만 정의롭게 행동하면 된다는 것. 그가 옳다면 정의로운 행위는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영혼을 도모할 수 있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 하지만 『국가』에 등장하는 많은 언급들은 이런 귀결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국가』는 실천적 정의 - 곧 정의로운 행위 - 가 도구적으로는 물론 그 자체로도 좋은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cf. 358a1-2, 361b5-d3). 아닌 게 아니라 만약 플라톤이 실천적 정의의 내재적 가치를 옹호하지 않았더라면 투명 인간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절대 반지 기게스의 반지를 가진 사람도 정의롭게 행동할 이유를 갖느냐는 글라우콘의 질문 공세(『국가』 2권)를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버켈스는 입장을 달리한다. 그가 보기에 실천적 정의는 영혼적 정의의 수단이 아니라 원인이다. 정의로운 행위가 곧 정의로운 영혼을 만든다는 것이다. 또, 정의로운 행위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정의의 형상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를 행함으로써 정의의 형상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마찬가지로 정의의 형상에 참여하는 정의로운 영혼을 산출하게 된다. 마치 "몸에 좋은 것들이 건강을 낳고, 몸에 해로운 것들이 병을 낳"듯, "정의로운 행위가 정의를 낳고, 부정의한 행위가 부정의를 낳는다"는 것(cf. 444c1-d12). 게다가 실천적 정의는 영혼적 정의는 원인일 뿐만 아니라, 필요조건이다. 몸에 좋은 식단과 규칙적 운동 없이는 건강을 도모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정의를 실천하지 않고서 영혼이 정의롭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의로운 자는

이러한 상태 [영혼적 정의]를 유지하고 또 산출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그러한 행위야말로 정의롭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며, 바로 그러한 행위를 정의롭고 고귀하다고 칭한다 (…) 또 그는 이것 [영혼적 정의]을 항상 무너뜨리는 행위를 부정의하다고 생각하며, 바로 그러한 행위를 부정의하다고 칭한다(443e4-444a1).


IV 문제 해결

문제 ③이 해결된다. 영혼의 정의는 그 영혼의 소유자에게 좋다. 그런데 영혼의 정의를 얻고자 한다면 정의롭게 행위해야 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정의롭게 행위를 이유를 갖는다.

이것은 문제 ②를 풀기 위한 실마리가 된다. 문제 ②의 핵심은 정의가 철학자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강제하는 한 동시에 그에게 더 못한 삶을 강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 ③에 대한 대답에서 드러나듯 철학자는 정의롭게 행위를 이유를 갖는다. 왜냐? 그러면 영혼적 정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적 정의, 곧 질서잡힌 영혼을 갖는 것은 곧 그 영혼을 소유자에게 좋은 것이 아닌가? 따라서 통치를 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이것이 문제 ②에 대한 버켈스의 첫번째 대답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아무리 철학자가 정의롭게 행위를 이유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철학을 하는 삶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질문 (b)와도 통한다. 정의로운 행위를 통해 정의로운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의롭게 행위할 이유가 있다는 점은 쉬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에 철학자에게 좋은 일인가? 철학은 이성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철학을 하는 자도 영혼의 질서, 곧 영혼적 정의를 충분히 도모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정의가 철학자에게 더 못한 삶을 강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버켈스는 에릭 브라운의 아이디어를 빌려와 두번째 대답을 제시한다. 철학자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법이라는 것이다. 법은 그 법을 설립한 자들에 의해서 "우연적으로 정당화된contingently justified"(p. 79) 것이지, 정의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는 철학자에게 그 어떤 강제도 가하지 않는다. 강제의 주체는 법이다. 정의는 철학자에게서 좋음을 앗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정의는 철학자에게 더 못한 삶을 "간접적으로" 강제한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에 버켈스는 세번째 대답에서 법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철학자에게 통치를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 철학자에게 더 못한 삶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더 못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그런데 버켈스가 보기에 철학자에게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은 오히려 통치의 명령에 응하는 일이다. 철학에만 전념하면서 사는 삶은 애초에 선택지가 아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려진 명령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 하는 것 뿐이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 그가 통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 영혼이 타락한다. 정의롭게 행위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의롭게 행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르 신화myth of Er에서 전해지듯 후생을 선택할 때 우리는 "영혼을 더 부정의한 방향으로 이끈 삶을 더 나쁜 삶이라고, 영혼을 더 정의로운 방향으로 이끈 삶을 더 좋은 삶이라고" 부를 것이다(618e1-2). 정의로운 행위를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하지 않는 것은 영혼의 정의로움을 앗아간다. 이래서는 철학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반대로 그가 통치의 명령을 따르면 질서잡힌 영혼을 비롯한 여러 이익을 볼 수 있다. 통치를 하면서도 철학을 조금씩 할 수 있고 말이다.

철학자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통치를 하느냐 마느냐, 그러니까 정의롭게 행위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 뿐이라면 통치를 거부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왜 선택지가 이 둘 뿐이어야 하는가? 그냥 그런 강제가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면? 왜 철학에만 전념하면서 사는 삶은 애초에 그가 선택할 수 없는 삶이어야 하는가? 기실 이 질문들은 문제 ①과 다르지 않다. 왜 강제인가?

"만약 자네가 미래의 통치자들을 위해 국가를 통치하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을 발견한다면, 자네가 잘 다스린 국가는 실현될 수 있을 것일세(520e4-421a2)." 한마디로 통치하는 것보다 철학하는 삶이 더 좋다는 걸 알아차리면, 더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버켈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이상 국가가 통치하기를 원하는 통치자들을 길러낸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재앙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통치자들은 권력이나 명예나 그런 것들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p. 80; cf. 347a3-6). 그러나 통치자는 지혜를 추구해야 할 자들이다. 철학적 삶을 추구하되 정치적 권력 보기를 돌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통치를 해야지,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치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강제로 떠맡은 통치자의 자리를 족쇄처럼 여기며, 통치자의 자리를 얼른 다른 이에게 물려주고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바라는 통치자야 말로 최고의 통치자다. "대통령직을 사퇴하겠습니다.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정말 최고의 통치자 맞냐? 기실 철학자를 통치자로 만들어 버린 것은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생길지도 모를 문제를 막기 위한 해결책인 것이다. 플라톤은 이렇게 강제하지 않으면 통치를 하지 않을, 그러나 동시에 좋음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는, 그런 철학자들을 길러낼 수 있는 국가를 꿈꾼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로 하여금 철학에만 전념하는 삶 - 그의 본성상 그에게 가장 좋은 삶 - 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법이라는 말은 좀체 받아들이기 어렵다. 통치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법이라면, 그 법을 요청하는 것은 정의가 아닌가? 버켈스는 정의가 반드시 이러한 법을 요청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우연일 뿐, 필연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게 필연이 아니라면 통치에는 정작 큰 뜻을 품지 않은 통치자를 양성하는 것이 플라톤의 구상이라는 버켈스의 주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플라톤의 구상이 실현될 수 있으려면 법은 반드시 철학자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만약 철학자가 이러한 강제를 받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정의로울 수 있다면, 그러니까 강제 없이도 국가의 정의를 위해 통치자의 자리에 자발적으로 나서면서도 동시에 부정의하지 않을 수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가 정치적 권력 보기를 돌 같이 하는 철학자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버켈스가 말한대로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 법이 아닌 다른 법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는 곧 정의는 "재앙"을 낳는 법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게 어떻게 정의인가?


리뷰 텍스트

Christopher Buckels, "Compulsion to Rule in Plato's Republic," Apeiron 46(1) (2013): 63-83

  1. 버켈스는 이어서 1A를 채택하는 학자들 중 일부는 정의가 철인왕을 제외한 모두에게 이롭다는 주장을 한다고 말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버켈스는 1A에 대한 일관된 서술을 하지 않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1A의 관점에서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에게 좋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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