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플라톤의 이상 국가 vs. 근대 국가 본문

논문과 원전

플라톤의 이상 국가 vs. 근대 국가

형이상학적 찐따 2014.12.02 16:14

I

플라톤은 이상 국가를 이상적인 인간, 그리고 심지어는 좋음The Good과 아름다움The Beauty을 구현하고 있는 이상적 우주와도 구조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영혼이 (1)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좇는 욕망과 (2) 불의에 용감하게 대항하는 기개, (3)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 것인지를 잘 파악하여 욕망과 기개가 도를 넘지 않도록 규제하여 덕virtue을 갖춘 삶을 이끌어 나가는 이성을 발휘하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듯이 국가도 세 가지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국가는 (1) 일차적 생산활동을 담당함으로써 의식주와 같은 욕구의 충족에 기여하는 생산자와 (2) 나라의 안과 밖에서 자신의 배를 채우고자 남을 해하려는 적들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는 전사[각주:1], (3) 진정으로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시민들의 삶을 조화롭게 함으로써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통치자로 이루어진다. (이 통치자가 바로 '철인왕Philosopher-King'이다.) 물론 플라톤이 말하는 전사는 고위 공무원들이 순시를 나올 때마다 외관 꾸미기에만 치중하고 병사들의 안위나 국방력 증강 따위는 나 몰라라 하는 일부 간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통치자도 마찬가지로 독재자나 폭군 같은 놈들과는 거리가 멀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 건립 마스터 플랜에 따르면 전사와 통치자는 사유재산은 물론 처자식도 없다. 그들은 그저 다음 세대의 국가를 이끌어 갈 자손을 만들기 위해 제한적으로 성관계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난 그냥 지배계급 안 하려고…"

인간이 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욕망과 기개, 이성 각각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서로간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야식 좀 그만 먹으라고 이성이 말리는 데 욕망이 말 안 듣고 깝치면 안 된다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국가 역시 그 구성원들이 자신이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하되 다른 구성원들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지 않아 시민들의 활동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제대로 된 통치자가 없거나 통치자의 덕을 갖추지도 않고 함부로 국가를 이끌려고 한다면 그 나라는 인간의 기초적인 욕구만을 채우는 데 급급한 "돼지들의 나라"가 되고 만다. 물론, 플라톤이 생산자나 전사의 역할을 경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에게 식욕이 없으면 죽는다. 불의에 맞설 용기가 없으면 찐따 겁쟁이가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생산자와 전사가 없는 국가는 유지될 수 없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불필요한 일을 하는 시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각자의 덕에 알맞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 그럼으로써 국가 전체의 조화를 도모하는 것, 이것이 정의로운 국가의 모습이다. (플라톤은 시민들의 수직적 계층 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근데 올라가면 처자식도 없다는 데 올라가고 싶냐? 배우지 못한 대장장이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통치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그는 언제든지 통치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여기까지는 여느 개론서에도 나오는 얘기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근대 국가와 어떻게 다른가?


II

플라톤이 보기에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유한하며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근대의 홉스Thomas Hobbes나 루소Jean-Jacques Rousseau 그리고 현대의 존 롤즈John Rawls가 생각한 것과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명세를 탄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과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dair MacIntyre 역시 이 점에서는 플라톤과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겠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현실태actuality가 아닌 가능태potentiality로서의 자유만을 가진다. (오해의 여지가 있다. '현실태'와 '가능태'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보다 앞서 대동소이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만은 분명하다.) 인간이 짐승보다 우월한 것은 일면 사실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라면서 자신에게 알맞는 능력 - 여기에는 당연히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인 이성도 포함된다 - 을 갈고 닦음으로써 본능에만 휘둘리는 짐승의 상태가 아닌 진정한 자유의 상태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들이 덕을 갖추어 나가는 과정은 당연히 동료 시민들 없이는 불가능하다. 철학자도 밥과 고기와 술은 먹어야 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훌륭한 정치 없이 생산자들은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 플라톤이 "국가는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자유롭다기 보다는 자유를 향해 있는 인간들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물론 생물학적인 인간은 국가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겠지만, 진정 자유로운 인간은 국가에 후행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플라톤的 국가의 과제는 근대 국가의 그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근대의 국가는 국가 성립 이전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 상정된 개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띤다. 가령 홉스는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경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계약을 통해 국가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생각이 좀 다르다. 그가 보기에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란 서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는 시민 사회의 타락을 경계하기 위해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니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국가도 사실 최종적으로는 개인들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보니 근대적 개인들과 국가 사이에는 항상 모종의 긴장감이 흐른다. 가만 있으면 힘센 사람들한테 삥 뜯길 것 같으니 경찰과 군대를 갖춘 국가를 수립하긴 해야겠는데 세금은 내기 싫은 게 이런 이유다. 세금이란 건 안 낼수록 좋은 건데 세금 안 내면 무법천지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니 어쩔 수 없이 수립하게 되는 게 국가라는 말이다. 그러니 근대적 국가가 '필요악'이라 불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반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은 별로 중요한 일이 못 된다. 국가의 역할은 시민들이 범죄 등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시민들을 교육하고 양육한다. 시민들이 갖춘 능력과 덕을 계발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자유의 실현을 돕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근대 국가가 "하지 마"라고 말하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외적으로 방지하고자 한다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자유를 오남용하지 않는 된 사람을 양성함으로써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가능성을 내적으로 차단한다. 건전한 시민의식을 갖춘 인간들을 길러내는 국가가 이 시민들과 갈등 관계를 형성할 일은 물론 없다.

그렇다보니 플라톤의 관점에서 국가의 번영과 인간의 행복은 함께 간다. 글의 머리에서 암시했듯이 국가의 번영은 시민들 각자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에 이루어질 수 있다. 이때 시민들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덕을 함양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플라톤이 보기에 이것은 곧 행복이다. 국가와 개인의 이 같은 공생관계는 물론 근대에서는 성립하기 어렵다. 국가의 덩치가 거치면 개인들의 공간은 줄어들게 마련이니 말이다. 근대적 개인은 자신에게 생득적으로 주어진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 단,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래서인지 근대적 개인들은 소심해진다. 주먹을 마음껏 휘두르고는 싶은데 실수로 다른 사람을 치기라도 하면 고소미 먹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이다. 심지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데에도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귀찮아 하면 어떡하지?" 같은 층에 사는 사람과 하필이면 같은 시간에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탔을 때, 1층까지 가는 시간은 얼마나 어색한가. 그리고는 앞집 사람만큼이나 어색한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은 방식으로 얘기하고 싶어서 페이스북으로 가겠지.


III

그 실현가능성을 제쳐두고서라도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2000년도 더 전에 살았던 사람의 국가론을 가지고 시대착오적이라고 욕하는 건 좀 치사한 짓이다. 치사한 짓이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짓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국가 철학은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플라톤의 사상을 단초로 삼아 더 치열한 고민을 해볼 수 있겠다. 사회와 관습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개인들을 상정하고서 도출한 윤리학은 바람직한가? 우리와 항상 근원적인 대립관계에 서 있는 국가는 지속가능한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안정적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리뷰 논문

이상인 「플라톤의 국가철학: 『국가』에 나타난 개인-국가 관계를 중심으로」『철학연구』 제45집 (1999):165-191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Andrea Veltman, "The Justice of the Ordinary Citizen in Plato's Republic," Polis 22(1) (2005): 45-59

주광순 「플라톤의 철인왕 개념: 실천 철학적 관점에서」『철학연구』 제66집 (1998): 41-61

  1. 전사는 때로 '수호자guardian'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많은 경우 철인 통치자와 전사를 함께 이르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오해를 막기 위해 나는 '전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1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