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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질문 논증

형이상학적 찐따 2016.08.23 13:33

I 무어의 입장

무어G. E. Moore는 흔히 메타윤리학에서 강한 비자연주의적 인지론non-natrualistic strong cognitivism을 내세운 것으로 분류된다.

도덕적 판단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인지주의

비인지주의

믿음beliefs

감정motions이나 욕망desires 등

도덕적 판단은 참 혹은 거짓이 될 수 있음

도덕적 판단은 참 혹은 거짓이 될 수 없음 


무어는 도덕적 판단moral judgments이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인지주의를 채택했다. 그런데 이 인지주의는 다시 강한 입장과 약한 입장으로 나뉜다.

도덕적 판단의 진리 조건으로서의 사실은 인간의 주관과 독립적인가?

강한 인지주의

약한 인지주의

그렇다

아니다

참된 도덕적 판단은 그것의 진리 조건인 사실에 대한 인지적 접근의 결과다


무어는 강한 인지주의를 택한다. 도덕적 사실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덕적 사실의 성격이 무어냐에 따라 다시 강한 인지주의는 자연주의와 비자연주의 진영으로 갈라 선다.

도덕적 사실들은 자연적 사실인가?

자연주의

비자연주의

그렇다

아니다

도덕적 사실은 자연적 사실과 동일하거나 자연적 사실로 환원될 수 있다

도덕적 사실은 자연적 사실과 동일하지도 않고 자연적 사실로 환원될 수도 없다

이 지점에서 무어는 비자연주의의 진영에 선다. 강한 비자연주의적 인지주의는 말하자면 도덕적 진술statements의 진리 조건이 비자연적 속성의 예화instantiations에 대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가 보기에 좋음의 속성은 비자연적일 뿐만 아니라 단순simple하며 분석 불가능한 것이다.

무어는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윤리적ethical) 자연주의naturalism에 반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내세운다. 도덕적 사실을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모두 "자연주의적 오류the naturalistic fallacy"를 범한다는 것이다.


II 자연적?

먼저 "자연적"이라는 게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자연nature"이란 말로 내가 의미하는 바 그리고 의미해왔던 바는 자연 과학들의, 그리고 또한 심리학의 주제다. 이는 시간 속에서 존재해왔던 것, 존재하는 것, 그리고 존재할 것들을 포함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1]

골 때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자연 과학은 뭔데? 자연을 다루는 과학? 마법사는 마법을 부리는 사람이고 마법은 마법사가 부리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골 때리는 점은 자연 과학과 심리학을 따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은 자연 과학이 아니라는 말? 그럼 심리학은 왜 자연을 다루는 학문이지? 무어는 분명 흔히 자연 과학으로 분류되는 학문들과 심리학이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알렉산더 밀러Alexander Miller는 몇몇 연구자들의 의견을 참고해 일단 자연적인 것을 "인과적이거나 감각에 의해 탐지될 수 있는"(11) 것으로 보고 논의를 계속한다.


III 자연주의적 오류

무어는 "좋은/좋음good"과 같은 도덕적 용어가 쾌락pleasure이나 욕망desire, 혹은 욕망에 대한 욕망 등 자연적 속성으로 정의할 수 없다고 봤다. 때문에 그의 적수는 도덕적 속성들은 정의나 개념 상 자연적 속성과 동일하거나 자연적 속성으로 환원가능하다는 이른바 정의적 자연주의definitional naturalism (혹은 분석적analytic 자연주의)가 된다. 이런 입장을 내세운 사람 중에 토마스 홉스가 있다.

누구에게든 자신의 욕구나 욕망의 대상이 된다면 무엇이든 그것이 바로 그가 자신에게 좋은good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혐오와 기피의 대상은 물론 나쁜evil 것이다.[각주:2]

무어는 실제로 우리가 "좋은/좋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좋은/좋음"이라는 개념을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다. 그는 이런 시도가 모두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사실 이 오류가 꼭 "자연주의적"이라는 이름표를 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무어는 "좋은/좋음"이 자연주의적 속성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예 정의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자연주의적 속성, 가령 "신에 의해 승인 됨"과 같은 형이상학적 속성에 의해서도 "좋은/좋음"은 어차피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자연주의적 오류는 설사 도덕적 속성이 실제로 자연적 속성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오류다. 무어의 비판 대상은 도덕적 속성을 자연적 속성이라는 주장(=형이상학적 자연주의metaphysical naturalism)이 아니라 도덕적 속성을 정의할 수 있다는 주장(=정의적definitional 자연주의)이기 때문이다.


IV "고전적" 열린 질문 논증

『프린키피아 에티카』의 12-13절에서 등장하는 그의 (고전적Classical) 열린 질문 논증Open-Question Argument를 알아보자. (무어의 논증이 "고전적"인 이유는 그것의 현대적 변형태들과 대비시키기 위해서이다.)

(1) "좋은/좋음"이라는 술어가 자연주의적 술어 "N"과 동의적synonymous이거나 혹은 분석적으로 동치analytically equivalent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2) "x는 좋은 것이다"라는 말은 이미 "x는 N이다"라는 주장이 담고 있는 의미의 부분이 된다.

이렇게 보면,

(3) "N인 x는 좋은 것이기도 한가?"라고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개념적 혼동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4) 자연적 속성 N이 무엇이든 N인 x가 좋은 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은 열린 질문open question이다. 말하자면 N인 임의의 x에 대하여 "N인 x는 좋은 것이기도 한가?"하는 질문은 언제나 유의미한significant 질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N인 x는 좋은 것이기도 한가?"라는 질문은 개념적 혼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쾌락을 주는 행위는 좋은가?" 또는 "우리가 욕망하기를 또한 욕망하는 것은 좋은가?"라는 질문은 의미를 갖는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개념적 혼동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그라미는 동그란가?" 혹은 "총각은 남자인가?"라는 또라이 같은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5) "좋은/좋음"은 "N"과 동의적이거나 분석적으로 동치라는 것은 참이 아니다.

따라서

(6) 좋음being good이라는 속성은 N임being N이라는 속성과 개념적인 필연성에 의해 동일한 것일 수 없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논증은 꼭 자연적 속성 N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형이상학적 속성 M과 같은 비자연적 속성에도 적용가능한 것. 그래서 위 논증은 이렇게도 써볼 수 있다.

(1) "좋은/좋음"이라는 술어가 형이상학적 술어 "M"과 동의적이거나 혹은 분석적으로 동치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2) "x는 좋은 것이다"라는 말은 이미 "x는 M이다"라는 주장이 담고 있는 의미의 부분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3) "M인 x는 좋은 것이기도 한가?"라고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개념적 혼동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4) 형이상학적 속성 M이 무엇이든 M인 x가 좋은 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은 열린 질문이다. 말하자면 M인 임의의 x에 대하여 "M인 x는 좋은 것이기도 한가?"하는 질문은 언제나 유의미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M인 x는 좋은 것이기도 한가?"라는 질문은 개념적 혼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신이 승인한 행위는 좋은가?"라는 질문은 의미를 갖는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개념적 혼동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5) "좋은/좋음"은 "M"과 동의적이거나 분석적으로 동치라는 것은 참이 아니다.

따라서

(6) 좋음이라는 속성은 M임이라는 속성과 개념적인 필연성에 의해 동일한 것일 수 없다.


V 반론들

① 프랑케나William Frankena의 반론: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한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논의의 결론으로서이지, 결론을 내세우기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다."[각주:3] 한마디로 무어가 논점 선취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N인 x는 좋은가?"라는 질문이 열린 질문이라는 직관에 의존해서 이 논증은 전개하려면 이 직관이 이미 옳은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N인 x가 좋은 것이냐는 질문이 실제로는 개념적 혼동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면?

② 흥미로운 분석이란 없다는 가정에 대한 반론The "No Interesting Analyses" Objection: 일단 P를 P*로 분석해낼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분석이 정보를 주는informative 것이고 따라서 흥미로운interesting 것이라면, P*인 것은 또한 P이기도 하느냐는 질문은 유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무어의 논증에 따르면 P를 P*로 분석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P*인 것은 또한 P이기도 하느냐는 질문이 무의미할 때뿐이다(=질문이 유의미하다면 분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보 제공력 → 질문의 유의미성

질문의 유의미성 → ~분석 가능

∴ 정보 제공력 → ~분석 가능

∴ 분석 가능 → ~정보 제공력

P를 P*로 분석 가능하다면, P가 P*로 정의될 수 있다는 분석은 그 어떤 정보도 제공해줄 수 없으며 따라서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무어는 참된 분석이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은 반드시 정보 제공력을 결여하는가? 수학과 논리는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선험적이고 분석적 참을 다룬다. 그러나 수학적 혹은 논리적 명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가? 혹은 지식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으로 분석해내는 작업은 우리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이 아닌가?

혹시 이런 재반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념 C를 우리가 이해한다고 해보자. 개념 C를 이해한다는 건 곧 C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C가 C*로 분석될 수 있는 것이라면 C*는 C의 의미의 일부분일 것이므로 우리는 이미 C*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따라서 C의 분석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보를 전혀 제공해줄 수 없다.

하지만 이 재반론은 방법적 지식knowledge how와 명제적 지식knowledge that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방법적 지식에 해당한다. 반면 이 개념의 분석에 대한 지식은 명제적 지식에 속한다. 가령 우리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이해한다. 그렇다고 "사랑"을 정확히 분석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분석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보를 줄 수 있다. 이 분석은 충분히 흥미로운 것일 수 있다.

뜻과 지시체의 구분에 근거한 반론: 우리는 어떤 표현의 뜻sense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 지시체reference는 모를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서기 2000년 오전 1:00시에 지구에서 가장 키가 컸던 사람"이라는 표현의 뜻은 이해하지만 그 지시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때문에 천문학이 발전하기 이전의 사람들은 "샛별"과 "개밥바라기"라는 표현을 이해했지만 그것들이 같은 대상(=금성)을 가리키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좋은/좋음"과 "N"이라는 표현의 뜻을 각각 이해하지만 - 그리고 그것들이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 그것이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줄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 반론에는 문제가 좀 있다. 무어가 문제 삼은 정의적 자연주의는 "좋은/좋음"과 "N"의 지시체가 같다는 주장이 아니라 뜻이 같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분석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은 뜻이 같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위 반론은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는 셈. (하지만 "좋은/좋음"과 "N"의 지시체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종류의 자연주의 - 아마도 "형이상학적" 혹은 "종합적synthetic" 자연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 - 는 이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VI 열린 질문 논증 구하기

그렇다고 열린 질문 논증을 그냥 쓰레기통에 갖다 넣어야 되는 건 아니다. 주워 먹을 것이 남아 있다. 위 ① 반론과 ② 반론을 염두에 두고서 열린 질문 논증을 살리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열린 질문 논증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서 자연주의를 반박하려 하기보다는 자연주의를 일단 받아들이지 않을 만한 근거presumption against naturalism을 마련하는 시도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 토마스 발드윈Thomas Baldwin의 열린 질문 논증

만약 개념적 분석이 옳다면, 우리가 그 분석을 일단 접하게 되는 순간 이후부터는 그것을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대한 지침으로 삼는 것이 전적으로 적절한 것처럼 보여야 할 것이다. 설사 처음에는 그러한 분석이 분명해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내재적 가치의 분석에 대한 무어의 반론은 바로 우리가 [이 분석을 접하고 난 후에도] 이 분석을 향한 반성적 동화reflective assimilation를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각주:4]

의미 분석이란 무릇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도록 개념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주어서 우리가 그것을 판단의 지침으로 삼아야겠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라는 말은 합당하다. 무어의 질문들이 가진 의의가 아직도 윤리적 환원주의자들에게 문제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의미 분석에 대한] 바로 이러한 요구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환원적 분석이 그야말로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옳지 않다는 증거가 된다. (...) 이것은 환원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만한 일단의 근거가 되지만,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각주:5]

표준 형식의 논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만약 "좋은/좋음"과 "N"이 분석적으로 동치라면, 다른 조건이 같다는 가정 하에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competent speakers은 누구나 - 개념적 반성을 거친 후에 - 그 분석을 평가적 판단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2) 개념적 반성 이후에도 "N인 x는 또한 좋은가?"라는 질문이 열린 질문이라는 확신이 여전히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으며, 그래서 개념적 반성 이후에도 사람들은 "N"을 통한 "좋은/좋음" 분석을 평가적 판단의 지침으로 삼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3) 우리는 "좋은/좋음"과 "N"이 분석적으로 동치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적어도 다른 조건이 같다는 가정이 성립하는 한(=언어 능력을 갖춘 사람이 이 분석을 평가적 지침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별도의 다른 설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 논증이 자연주의를 반박하지는 못하고 다만 자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일단의 근거만을 마련하는 것은 자연주의자들이 대응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좋음에 대한 그 어떤 분석을 접하더라도 그것을 지침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좋음에 대한 분석이 올바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만 있다면 자연주의자들은 여전히 발드윈의 논증을 견뎌낼 수 있다. 가령 자연주의자들은 "너희가 이 분석을 판단의 지침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못하는 건 너희가 윤리적 개념은 분석될 수 없는 독특한 것이라는 통념에 사로 잡혀 있어서 그런 것이다"라고 - "고유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망상적 이해에 대한 집착"[각주:6]때문이라고 - 말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매력적인 설명인 것 같지는 않다. 발드윈은 이 논증을 잠재울 만한 그럴듯한 설명이 없는 한 일단은 자연주의에 한 방 정도는 먹일 수 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발드윈의 열린 질문 논증이 위 반론 ①과 ②를 피해간다는 점이다. 일단 이 논증은 "N인 x는 또한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이 열린 질문 혹은 유의미한 질문이라는 확신이 옳다고 가정해버리지 않는다. 그저 그런 확신이 - 개념적 반성 후에도 - 계속 남아 있다고 말할 뿐. 발드윈의 논증은 또한 (무어의 논증과 달리) 올다른 분석은 결코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는 가정도 버린다. 아닌 게 아니라 전제 (1)이 말하듯 우리가 어떤 분석을 실천적 지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그 분석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주의자들은 또 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분석이 옳은데 너희가 관련된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언어 능력이 뛰어나지 못해서 이 분석을 지침으로 삼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게 아니냐?" 하지만 이 반론은 그저 임시방편적ad hoc이다. 비자연주의자들의 언어 능력을 의심하는 근거가 그저 해당 분석을 실천적 지침으로 삼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놈들은 X를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너희들은 제대로 된 놈들이 아니야. 왜냐고? X를 못 하잖아. 비자연주의자들의 개념적 반성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이려면 그렇게 믿을만한 독립적인independent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 스티븐 달왈Stephen Darwall과 앨런 기바드Alan Gibbard, 피터 레일턴Peter Railton의 열린 질문 논증

첫째, [열린 질문이 존재한다는] 강한 확신을 그저 내뱉기만 해서는 안 되고, [어떤 자연적 속성] P가 좋은 것인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어떤 것일지를 상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반성적 영어 화자competent and reflective speakers of English에게 열린 질문 논증이 설득력을 갖는다compelling는 점을 그저 확인하는 데에서 그쳐야 한다. 둘째, 그것이 왜 그러한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가지 설명은 이렇다. 좋음의 귀속attributions of goodness은 행위에 대한 지침 제공guidance of action과 개념적 연관conceptual link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연관은 우리가 "P는 정말로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른 조건이 같다는 가정 하에 우리가 정말로 P를 발생시키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한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옮겨쓸 때마다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열린 질문의 열려 있음이 그 어떤 오류error나 간과oversight에도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임의의 자연주의적 속성 R에 대하여 R이 성립한다는 (혹은 머지 않아 성립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는 행위를 취할 적절한 이유나 동기를 발견해낼 수 없는 사리가 분명한clear headed 존재자들을 상상할 수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의 가능성으로 미루어 볼 때, P가 행위 지침을 제공한다action-guiding는 것은 논리적으로 확보되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R에 심리적으로 이끌린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행위에 대한 논리적 혹은 개념적 연관이 부재한다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R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를 유의미하게intelligibly 물어볼 여지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정확히 보여준다.[각주:7]

밀러는 이 논증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1)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과 다른 조건이 같은 한 그 판단이 명령하는 바대로 행위하도록 동기부여 받는 것 사이에는 개념적conceptual 혹은 내재적internal 연관이 있다. (이를 내재주의internalism라 한다.) 의지의 박약이나 그 외의 심리적 문제가 없다면, 어떤 유형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좋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 유형의 행위들을 수행하도록 동기부여 받는 것을 함축한다. 심리적 문제 등이 없음에도 어떤 유형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좋다고 판단하(는 듯 보이)면서도 일관되게 그 유형의 행위들을 수행할 이유를 깨닫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도덕적 좋음의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2)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반성적 영어 화자들은 사리가 분명한 (그리고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어떤 자연주의적 속성) R이 성립한다고 판단하면서도 여전히 그러한 판단에 따라 행위할 적절한 이유나 동기를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3) R이 성립한다고 판단하는 것과 그에 따라 행위하도록 동기부여 받는 것 사이에 개념적 연관이 없다면, 우리는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반성적 영어 화자들이 (2)에서 언급된 확신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4) (2)에서 언급된 확신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이 없는 한, 우리는 R이 성립한다고 판단하는 것과 그에 따라 행위하도록 동기부여 받는 것 사이에 개념적 연관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이에 따라,

(5) (2)에서 언급된 확신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이 없는 한, 우리는 R이 성립한다는 판단이 도덕적moral 판단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판단과 판단에 부합하는 동기부여 사이에는 내재적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 (2)에서 언급된 확신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이 없는 한, 우리는 도덕적으로 좋음이라는 속성이 개념적 필연에 의해 R임이라는 속성과 동일하지도 않으며 그것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이 논증은 반론 ①을 벗어난다. (2)에서 언급된 확신이 옳다는 가정을 받아들임으로써 논점 선취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이 논증은 이 확신을 사람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 그 확신이 옳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논증은 자연주의에 대한 결정적인knock-down 반박이 되지 못한다. 만약 (2)에서 언급된 확신을 자연주의의 거짓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설명해낼 수 있다면, 자연주의는 여전히 이 논증에 맞서 살아남을 수 있다. 너희가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 자연주의가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블라블라

무어가 발견한 것은 오류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은연중에 "좋은/좋음"의 - 그리고 다른 규범적 어휘들의 - 몇몇 특성들[행위 지침 제공 등]에 주목하게끔 함으로써 이미 알려진 자연주의적 혹은 형이상학적 정의들을 (…)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옳은 것이라 여기고 받아들이는 행태에 제동을 거는 논증적 장치argumentative device다.[각주:8]


발드윈의 논증과 달왈-기바드-레일턴의 논증은 매우 유사해보이는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단 눈에 띄는 점은 달왈-기바드-레일턴이 (1)에서 도덕적 판단과 동기부여에 관한 내재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내재주의를 전제하지 않는 발드윈의 논증이 좀 더 강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밀러는 발드윈의 논증도 역시 "암묵적으로" 내재주의적인 것이라고 본다.

발드윈의 논증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자.

(1) 만약 "좋은/좋음"과 "N"이 분석적으로 동치라면, 다른 조건이 같다는 가정 하에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competent speakers은 누구나 - 개념적 반성을 거친 후에 - 그 분석을 평가적 판단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2) 개념적 반성 이후에도 "N인 x는 또한 좋은가?"라는 질문이 열린 질문이라는 확신이 여전히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으며, 그래서 개념적 반성 이후에도 사람들은 "N"을 통한 "좋은/좋음" 분석을 평가적 판단의 지침으로 삼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3) 우리는 "좋은/좋음"과 "N"이 분석적으로 동치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적어도 다른 조건이 같다는 가정이 성립하는 한(=언어 능력을 갖춘 사람이 이 분석을 평가적 지침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별도의 다른 설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대체 왜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 "N"을 통한 "좋은/좋음"의 분석을 평가적 판단의 지침으로 삼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지를 자연주의자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한 적어도 자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일단의 근거는 마련된다는 것이 발드윈의 생각이다.

그런데 설명의 의무를 다 하지 않은 것은 사실 자연주의자 뿐만이 아니다. 발드윈도 설명의 의무를 다 하지 않았다. 대체 왜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 "N"을 통한 "좋은/좋음"의 분석을 실천적 지침으로 삼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저 "좋은/좋음"과 "N" 분석적으로 동치가 아니라는 말은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발드윈이 최종적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결론이니까.

결국 발드윈이 제시할 수 있는 대답은 좋음에 대한 판단은 내재적으로 동기부여 능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좋은/좋음"이 "N"으로 올바르게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 이 분석에 맞추어서 판단하도록 동기부여 받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래야만 우리가 실제로 위와 같은 분석을 지침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좋은/좋음"은 "N"으로 분석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결국 "반드윈의 논증과 달왈-기바드-레일턴 논증 사이에는 실질적 차이가 없다"(23).

그렇다면 이 논증은 얼마나 강력한가? 그것은 열린 질문이 유의미하다는 우리의 확신에 대해 비자연주의자들이 제시할 수 있는 설명과 자연주의자들이 제시할 수 있는 설명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설명인지에 따라 달려 있을 것이다. 발드윈과 달왈-기바드-레일턴은 좋음에 대한 판단은 내재적으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을 제시했다. (한편 자연주의자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비자연주의자들이 윤리적 개념은 분석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올바른 분석을 접하더라도 거기에 끌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올바른 분석을 접했을 때에도 여전히 그 분석에 전혀 끌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자연주의자들은 열린 질문 논증에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까? 하나는 내재주의적 전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도덕적 판단과 그에 따라 행위하도록 동기부여 받는 것 사이에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 관계는 다만 우연적contingent이고 외재적external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좋음"이 "N"으로 올바르게 분석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성 N이 성립한다는 판단에 의해 동기부여 받지 않는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사실 도덕적 판단과 동기부여에 관한 외재주의와 내재주의의 논쟁은 오늘날 메타윤리학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다. 여기서는 더 다루지 않겠다.)

또 다른 하나의 전략은 정의적 (혹은 분석적) 자연주의를 버리고 형이상학적 (혹은 종합적) 자연주의를 택하는 것이다. "좋은/좋음"과 "N"이 개념적 필연에 의해 분석적 동치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동일한 - 후험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 외연을 같는다고 말하는 것. 말하자면 "N"을 통한 "좋은/좋음"의 분석이 규범적 힘을 결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형이상학적으로 "N"와 "좋은/좋음"은 결국 같은 지시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리뷰 텍스트

Alexander Miller, Contemporary Metaethics: An Introduction, 2nd ed. (Cambridge: Polity Press, 2013), ch. 2.

  1. G. E. Moore [1903], 『Principia Ethica』, rev.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p. 92. [본문으로]
  2. Thomas Hobbes [1651], C. B. Macpherson, ed. 『Leviathan』 (Harmondsworth: Penguin, 1981), pt. 1, ch. 6. [본문으로]
  3. William Frankena, "The Naturalistic Fallacy," 『Mind』 48 (1938): 464-77, p. 465. [본문으로]
  4. Thomas Baldwin, "Editor's Introduction" in G. E. Moore [1903], 『Principia Ethica』 rev.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p. xix. [본문으로]
  5. Thomas Baldwin, 『G. E. Moore』 (London: Routledge, 1990), p. 89. [본문으로]
  6. Ibid., p. 89. [본문으로]
  7. Stephen Darwall, Alan Gibbard, and Peter Railton, "Toward Fin de Siècle Ethics: Some Trends," 『Philosophical Review』 101 (1992): 115-89, p. 117. "Fin de Siècle"은 "한 세기의 끝"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로 논문 제목에서는 이탤릭체로 표기되어 있다. [본문으로]
  8. Ibid., p. 11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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