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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과 원전

헤라클레이토스 vs. 파르메니데스

동경 TOKYO 2014. 12. 10. 13:00

철학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이미 논쟁의 연속이지만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만큼이나 자주 라이벌 구도 속에서 논의되는 철학자들은 많지 않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운동과 변화를 강조했던 헤라클레이토스와 불변성과 단일성에 무게를 두었던 파르메니데스 사이의 대결은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는 존재론적 물음들의 뿌리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들 이후에 곧 등장한 다원론자들과 원자론자들은 물론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장님들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이 존재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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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

"모든 것은 변한다." 이 한마디에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을 모두 우겨넣을 수는 없다. 이른바 만물유전설flux theory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주장을 함축하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같은 강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다른 물이 흘러"(단편 12)오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단편 91)는 말은 이제 너무나 익숙하다. 그렇다면 어제 봤던 한강은 이제 없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강이 생겨났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강에게 '한강'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줘야 하나? 그렇지는 않다. 한강은 여전히 한강이다. 하지만 그 한강은 오직 변화함으로써만 한강일 수 있다. 만약 한강이 그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는다면 어떨까? 강은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 사는 물고기들도 움직일 수 없다. 물고기가 움직이면 강물도 움직일 것이니까. 그런 강에서는 무엇도 살 수 없다. 생명을 허락하지 않는 강을 강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한강이 계속해서 한강일 수 있는 것은 얼마간의 변화를 계속적으로 겪고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는 정체성의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며 모든 것의 왕이다 (단편53)

전쟁은 보편적이고 정의는 투쟁이며, 모든 것은 투쟁과 필연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단편 80)

전쟁은 정적인 평화를 깨고 변화를 가져온다. (강의 예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아버지"로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고 "왕"으로서 모든 것을 지배한다. "보편적"일뿐만 아니라 "필연"적인 이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날 길은 물론 없다. 더욱이 전쟁은 "정의"로운 것이요 바람직한 것이 된다. 그래서인지 헤라클레이토스는 '신과 사람들 사이에 투쟁이 없어졌으면'하고 바랐던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를 비판한다. 변화가 없으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라는 것이 중구난방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가령 자고 일어났더니 김광규가 머리카락을 갖게 되어 원빈이 된다든 "차가운 것들은 뜨거워지고, 뜨거운 것은 차가워진다. 젖은 것은 마르고, 마른 것은 젖게 된다"(단편 126)라든가 "삶과 죽음, 깨어남과 잠, 젊음과 늙음. (…) 이것들이 변화하면 저것들이고, 저것들이 다시 변화하면 이것들이" 된다는 발언은 변화에도 모종의 규칙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낮밤이나 계절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름이 가고나서 갑자기 봄이 오는 경우는 없다. 반드시 가을이 온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여름은 다시 찾아온다. 세계가 변화 속에 있다는 것이 곧 세계가 카오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규칙성이 바로 로고스logos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이 로고스에 따라서 생겨난다"(단편 1)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세계의 변화를 불의 움직임에 빗댄다. (이 불이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이 논했던 아르케arche와 같은 종류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불은 땔감과 산소를 태우며 - 변화를 일으키며 - 자신을 계속해서 유지한다. 타오르는 불꽃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서 성냥불이 갑자기 화산불이 되는 일은 없다. 변화의 척도가 되는 로고스를 염두에 두고 그는 "만물은 하나다"(단편 50)라고까지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바라보는 세계는 변화와 운동으로 가득하지만 그것들은 척도를 따른다. 바로 이 척도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유일한 로고스다.


파르메니데스

존재론적 논의의 불씨를 당겼다고 평가받는 파르메니데스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자료도 부족하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자료가 산문이 아니라 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비문이 많다. 오죽하면 철학 박사 학위까지 딴 사람들이 파르메니데스의 글을 번역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병신같은 구절을 똑같이 병신스럽게 옮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겠나. 그러니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보다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들 중 하나인 「자연에 관하여」의 줄거리는 이렇다. 철학적 호기심으로 가득찬 한 청년은 태양의 처녀들이 이끄는 마차를 타게 된다. 두 필의 말이 힘차게 달려 당도한 곳은 밤의 길과 낮의 길로 갈라지는 갈림길인데 이 곳에는 커다란 문이 놓여있다. 태양의 처녀들이 정의의 여신 디케를 설득해 문을 통과하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자 여신은 청년에게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주겠다고 말한다. 또 그녀는 진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억견doxa에 대해서도 배워야 한다며 청년에게 진리와 억견에 대해 모두 배울 것을 제안한다. "내가 아니고 여신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니까 똑바로 새겨들어라." 여기까지가 서시의 내용이다. 이어지는 여신의 가르침이 이 시의 몸통을 구성한다. (제1부와 제2부에서는 각각 진리와 억견을 다룬다.)

물론 이 진리란 존재에 관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존재란 생멸하지 않고 움직이거나 변화할 수도 없는 불가분한 것 - 일자the One - 이다.

존재는 있고, 비존재는 있지 않다 (단편 2)

먼저 여기서 말하는 "있다"라는 말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실 우리는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페이퍼 타월이 여기 있네?" 그런데 정말로 페이퍼 타월이 있는 것일까? 사실은 다른 것인데 우리의 두뇌에 문제가 생겨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데 신이 우리로 하여금 페이퍼 타월이 있다고 믿게 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별다른 의심없이 "있다"라는 표현을 써왔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지만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페이퍼 타월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관련된 어휘의 새로운 용법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그런데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갖든 파르메니데스의 이 같은 언급은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닌가? 있는 게 있는 거고, 없는 게 없다는 말은 A=A라는 말 만큼이나 무의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 말을 형식논리학적으로 환원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가령 학생의 헤어스타일을 트집을 잡으며 꼰대질 훈계하는 교사가 "넌 학생이잖아"라고 말할 때는 어떤가? 이건 그냥 '너=학생'이라는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는 것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A는 B이다"라는 말은 A가 B라는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A는 B여야만 한다는 당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꼰대 교사는 '너는 학생다워야만 해'라고 위협 주장 하는 것이다. 근데 학생다운 게 뭐지? 남학생의 경우 김정은처럼 머리 깎는 거?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위 언급을 통해 존재는 반드시 동일하게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는 당위를 내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운동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그리 놀랍지 않다. 그가 보기에 어떤 것이 움직이거나 변화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존재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움직이지도 변화하지도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사고와 존재는 같다 (단편 3)

물론 우리는 용이나 도깨비 같은 것들에 대해 상상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그저 억견에만 그칠 뿐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말하자면 이런 비존재에 대한 사고는 다만 가시적인 세계 - 억견의 영역 - 에서만 가능한 한낱 믿음으로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사고는 오로지 그 대상이 참된 실재일 때에만 가능하다. (이 억견의 영역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변화무쌍한 현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려우니 이원론을 채택하는 것이 어쩌면 파르메니데스로서는 불가피한 전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파르메니데스는 진리를 다룬 제1부보다 억견을 다룬 제2부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존재는 필연적으로 말해지고 사고되어져야 한다 (단편 6)

그리고 이 참된 사고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사유되지 않은 채 외따로 떨어진 존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참된 사고는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표현되지 않는 것도 참된 사고가 될 수 없다. (물론 이 언어로의 표현이란 것이 성대를 울리거나 펜대를 굴리는 식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여하간 사유되며 표현되는 것이 곧 존재라는 진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같은 암시는 언젠가 "현상은 본질에 본질적"이라고 말했던 헤겔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에게 표현할 수 없는 진리란 형용모순이다.) 사실 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게 사유와 표현이란 것이 별개의 것이었지도 의심스럽다. 로고스, 그것은 이성과 언어 모두를 뜻하지 않는가?

참된 사고는 불변하는 실재에 관한 것이므로 얼마든지 '~이다'라는 술어를 사용해 기술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이 변화와 운동 속에 있다면 - 비존재라면 - 그것을 더러 '~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 언급은 그러니까 우리가 발화하는 문장들이 대개가 참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우리가 흔히 내뱉는 말들은 참된 실재가 아닌 것들에 대한 참되지 않은 사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맨날 형이상학적인 명제만 말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고로 참된 언어는 오로지 존재에 대한 치열한 사유만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함부로 지껄인다고 다 말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논의될 때 양자의 차이점만이 지나치게 강조된 경향이 있다. 아마 헤라클레이토스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주장했다는 잘못된 통념 역시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러나 첨예하게 대립한 이들에게도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성, 즉 로고스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갖추지 못한 대중들을 지독히 경멸했다. "멍청한 애들 극혐" 그리고 오로지 로고스를 갖춘 자만이 세계의 변화와 운동에 척도가 되는 원리로서의 로고스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억견과 참된 지식을 엄격하게 구분한 파르메니데스에게 로고스가 중요한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또 이들은 밀레토스 학파의 존재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탈레스Thales와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각각 물과 아페이론apeiron, 공기 등 단일한 요소가 만물의 형이상학적 근원이 된다고 주장했는데, 헤라클레이토스가 보기에 "이 세계는 (…) 어떤 신이나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항상 있었고, 있고, 있을"(단편 30) 그 무엇이다. 생멸은 커녕 일말의 변화와 운동조차 인정하지 않는 파르메니데스가 하나의 아르케로부터 세계가 생겨났다는 주장을 수용할리는 더욱 만무하다. 알렉산더 네하마스Alexander Negamas는 더 나아가 불에 비유된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가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각주:1] 그저 다른 방식으로 사상을 전개한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경청할 만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의 거리를 좁히는 일은 상당히 버거운 일인 것이 분명하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동일성이란 오직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불변하는 로고스의 정체는 그것이 규제하는 만물의 운동을 통해서만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도 참된 존재는 있다. 그러나 참된 존재는 오로지 움직임으로써만 스스로를 존속시킬 수 있다. 반면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에서 운동이 설 자리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제자 제논Zeno은 운동이 없다는 걸 증명하려고 온갖 패러독스들을 고안한다. 스승님 도와주느라 네가 고생이 많다… 저 유명한 아킬레우스Achilles와 거북이의 역설도 그 중 하나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참된 존재란 정지함으로써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리뷰 논문

손병석 "변화와 정지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견해," 김성진, 정인재 편,『논쟁과 철학』,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 19-41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김인곤 외 7인 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pp. 218-326 (헤라클레이토스/파르메니데스/제논 단편) 그리고 pp. 721-757 (헤라클레이토스/파르메니데스/제논 단편 해제)

이기상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상반되는 쌍동이」『철학윤리교육연구』 제2권 제5호 (1986): 8-16


  1. "Parmenides Being/Heraclitean Fire," in V. Caston and D. W. Graham, ed., 『Presocratic Philosophy: Essays in Honour of Alexander Mourelatos』 (Aldershot: Ashgate, 2002): 45-6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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