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권리,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본문

논문과 원전

권리,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동경 TOKYO 2015. 2. 1. 17:37

나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 자주성sovereignty 혹은 불가침성inviolability은, 그 결과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권의 도덕률에 의해 표현되는 가장 두드러진 가치다.

p. 107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은 그가 겪은 한 일화를 들려주며개인적 권리와 공적 공간Personal Rights and Public Space」라는 논문을 시작한다. 권리rights를 주제로 한 어느 세계 학술 대회에 온 몇몇 나라의 철학자들이 토론을 좀 하더니 투덜거리더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온 나라에는 투표나 종교의 자유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재판도 없이 처벌을 받거나 경찰한테 고문을 받는 일도 비일비재한데, 포르노를 볼 권리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당장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한가롭게 포르노를 볼 권리에 대해 얘기해도 되는 걸까? 네이글도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문을 받지 않을 자유와 포르노 비디오를 빌릴 자유가 모두 인권과 관련된 사안이며 양자를 아우르는 어떤 특징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네이글은 특히 소극적negative 권리에 집중하며 권리가 갖는 독특한 특징을 밝히고자 한다.


I 권리의 특징

권리가 침해된다는 것은 (1) 누군가가 결코 받아서는 안 될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되 (2) 이때 비용costs와 이득benefits이 각각 얼마나 발생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그 누구도 생명의 위협이라는 끔찍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살인 행위가 누군가에게 득이 된다고 하더라도 - 가령 살인자에게 엄청난 쾌락을 가져다주거나 유족들이 피해자를 부양하지 않게 되어서 커다란 경제적인 부담을 덜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생명권을 덜 존중해도 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각주:1] 권리가 이런 불가침성inviolability을 지닌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다.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권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데 단순히 이득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든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면 애초에 권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윤리학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권리는 도덕적 권리moral rights로 도덕적 공동체moral community의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연적인 사실contingent facts 혹은 사회적 관행social practices나 제도institutions 등에 의존하지 않는다. 아무리 상황이 특별하더라도 권리를 일시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경제 성장이 급하니까 일단 노동자의 권리는 개무시" 이딴 건 없다는 거다. 또 이 땅에서 권리를 갖는 사람이 저 땅에 간다고 권리를 잃을 수는 없다. 이 땅과 저 땅의 정치 체제나 문화가 아무리 달라도 말이다. 아무래도 법에 의해서만 생성되고 또 정당화되는 법적 권리legal rights에 비하면 훨씬 더 큰 보편성universality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은 도덕적 권리가 지켜지도록 나름의 구속력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도덕적 권리의 근거는 아니다. 

그런가하면 권리는 어떤 공격 따위를 막기 위한 방패같은 것이 아니라 지위status다. 때문에 더하고 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가령 테러리스트가 무고한 사람 1명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2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경우 아마도 -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 1명을 죽이는 것이 더 옳은 것 같다.[각주:2] 하지만 그 이유가 단순히 '2명의 생명권이 침해되는 것보다는 1명의 생명권이 침해되는 것이 낫다'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권리는 비집합적nonaggregative이기 때문에 찰흙 덩어리 여러 개를 합쳐서 하나의 큰 덩어리를 만들 듯 합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2명의 권리를 합했더니 1명의 권리보다 더 커서 1명을 살리는 것보다는 2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애초에 권리를 합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각주:3]

하지만 권리가 위 특징들을 갖지 않는다는 주장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도덕적 권리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법적 권리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또 네이글이 언급하지 않은 특징들도 여럿 존재한다. 일단 여기서는 그 중 하나만 언급하기로 한다. 권리의 양도불가능성inalienability[각주:4]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권리를 사람으로부터 결코 떼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령 북한 뚱땡이 정권이 아무리 인권을 개무시하더라도 북한 사람에게 인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권리는 빼앗을 수도 없지만 남에게 줄 수도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도 마찬가지다. "100억만 주시면 인권 포기하고 당신의 노예가 될게요" 이런 건 없다. 100억 받고 인권 포기하면 100억에 대한 권리는 없다… 물론 이 양도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가령 권리 몰수 이론rights forfeiture theory에 의하면 특정한 조건이 만족되는 경우 권리를 잃을 수도 있다. 범죄를 저지르면 감옥에 갇히지 않을 권리를 빼앗기는 식으로 말이다.


II 권리의 가치

권리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크게 두 부류 - 본래적intrinsic 설명과 도구적instrumental 설명 -로 나눌 수 있다. 스캔런T. M. Scanlon 등이 제시하는 도구적 설명에 따르면 권리는 다른 근본적 가치fundamental values로 부터 파생된 것이다. 다시 말해 권리는 이들 근본적 가치를 증진하는 도구로서 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권리를 보호하는 게 근본적 가치의 증진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1명을 죽임으로써 2명을 살릴 수 있는 경우라도 결코 그 1명을 죽여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개인들을 대우할 수 있는 방식에 엄격한 제한inhibitions을 설정하는 것이 이런 가치를 증진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인권이 인정받지 않는 사회는 그야말로 카오스가 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권리는 바로 이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다. 도구적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권리가 왜 가치있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권리는 왜 좋은거야? "행복, 자아실현, 지식, 자유"와 같이 누가 봐도 가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니까!

반면 본래적 설명을 옹호하는 네이글은 권리가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다른 근본적인 가치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권리가 곧 또 하나의 근본적인 가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입장을 옹호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1명을 죽이면 2명을 살릴 수 있는 경우에도 1명을 죽이지 않아 2명이 죽어가는 꼴을 지켜만 봐야한다는 말인가? 나쁜 결과가 일어날 것이 불 보듯 뻔한데도 그냥 내버려둔다고?

도구적 설명은 이렇게 권리가 좋은 결과를 야기하기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고는 본래적 설명이 나쁜 결과를 야기하는 행위까지도 옹호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네이글에 보기에 이러한 생각은 권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오해? 네이글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행위자 중립적agent-neutral 원칙과 행위자 관계적agent-relative[각주:5] 원칙 사이의 구분을 도입한다. 행위자 중립적 가치는 어떤 사태states of affairs의 가치이므로 모든 이들이 그것을 증진할 이유를 갖는다. 예를 들어 살인이 행위자 중립적인 의미에서 나쁜bad 것이라면 누구에게나 살인의 수를 줄이려고 노력할 이유가 있다. 여기서 누가 살인을 저지르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살인이 많이 일어나는 사태와 적게 일어나는 사태 중 어느 것을 선호할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반면에 살인이 행위자 관계적인 의미에서 그른wrong 것일 때에는 각각의 행위자가 는 살인을 저지르지 말라는 - 살인이라는 행위를 취하지 말라는 - 도덕적 요구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저지르는 살인을 예방하라는 - 살인이 적은 사태를 야기하라는 - 요구는 없다.

본래적 설명을 비판하는 이들은 권리가 갖는 가치가 행위자 관계적 가치라는 점을 간과했다. 그리고는 괜히 권리가 행위자 중립적 가치를 증진시키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한 것이다. 말하자면 권리는 애초에 "다른 논리적 성격"을 갖는다. 즉 네이글이 하고자 하는 말은 좋은 사태를 야기하는 것은 애당초 권리가 할 일이 아닌데, 거기다 대고 권리가 좋은 사태를 야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권리가 막으려는 건 그른 행위이지 나쁜 결과가 아니다.


III 포르노를 볼 권리도 고문 받지 않을 권리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

권리에 대한 이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네이글은 어째서 고문을 받지 않을 권리와 포르노를 마음껏 볼 권리가 - 고문이 가져다주는 해악과 포르노를 못 봄으로써 발생하는 해악의 차이가 엄청난데도 불구하고 - 여전히 똑같은 권리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논구한다.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행복하거나 자유로운 것처럼 어떤 상태condition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권리가 불가침성을 지닌다는 말은 결코 그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을 것will not be violated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되는 것may not be violated이라는 말이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생명권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존중받지만 살해 당할 가능성이 높은 사회 A와 살해 당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지만 생명권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B를 비교했을 때 A에서는 모두가 불가침의 지위를 갖지만 B에서는 아무도 그런 도덕적 지위를 갖지 않는다. 말하자면 B에 사는 사람들은 요행히 생명의 위협은 덜 받고 살아가지만 짐승과 같은 지위를 갖는다는 말이다. 물론 A에 사는 사람들은 더 불행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 도덕적 주체로서의 - 지위를 인정받고 살아간다.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많은 공리utility를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해주는 것이다. 권리를 실제로 침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코 침해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하는 게 더 핵심적이라는 말이다.

네이글은 구체적인 예를 든다. 만약 경찰이 시민를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언제든지 수색과 물품 압수를 할 수 있고, 저항하는 경우에는 영장없이 총으로 쏠 수도 있다면 어떨까? 분명 범죄는 줄어들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과 긍정적인 영향을 계산했을 때 총합이 0보다 높다고 가정하더라도 왠지 이런 사회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도덕적 주체는 자신에게 실제로 가해지는 피해뿐만 아니라 가해지는 것이 허용되는 피해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경찰을 마주치지 않아서 실제로는 저런 기분 나쁜 일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저런 식으로 대우해도 괜찮은 존재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된다. "인격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해를 입는 것만이 악evil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해를 입히는 것이 허용된다permissible는 것이 또 하나의 독립적인 악이다"(p. 91). 

이런 점에서 고문 당하지 않을 권리와 포르노를 볼 권리를 존중받는 것은 똑같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존중받는 것이 된다. 그래서 둘 다 중요하다. 야동을 못 보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라고! 뭐… 야동을 못 봐도 사는 데 전혀 지장없다. 문제는 내가 포르노를 못 본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성적 취향 따위는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으로 취급받는다는 데에 있다. 가령 한국의 경찰은 포르노를 제공하는 웹사이트를 모두 차단한다. 그런데 차단하려면 경찰은 그걸 봐야되는 거 아닌가? 그래야 차단할지 말지 결정을 할 것 아닌가 말이다. 이렇다 할 만한 기준도 없는 것 같지만… 근데 왜 우리는 못 보는데? 우리는 그냥 못 보게 막아도 되는 존재인거야? 응? 물론 우리는 프록시 서버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얼마든지 야동을 볼 수 있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러나 저러나 야동은 볼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야동을 못 보게 막아도 되는 인간으로 취급받는다. 성적 취향 따위는 무시해버려도 좋은 인간으로 말이다. 뭔가 문제가 있다.


IV 권리의 정당화

(…) 만약 권리가 없다면 우리 모두의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다 (…) 그러므로 권리는 있다.

p. 92

머리 위에 물음표가 둥둥 뜨게 만드는 논증이 아닐 수 없다. "X가 있으면 좋을 거다. 따라서 X는 있다."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물론 네이글도 이게 이상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그 결론이 사실적factual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moral인 것일 때에는 이런 논증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적어도 윤리 이론ethical theory에서는 설 자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의 도덕률이 다른 도덕률보다 참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한 일일 수 있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 도구적으로가 아니라 본래적으로 -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찝찝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포르노를 볼 권리가 존중받지 않는 한국에서도 포르노를 보면서 성적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포르노 볼 권리를 존중해준다고 해서 좋아질 게 뭐란 말인가? 물론 검색이 좀 빨라지긴 하겠지… 근데 일단 그런 건 빼고… 한마디로 네이글은 권리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는데 그걸 어떻게 정당화할 것이냐는 말이다. 네이글은 이게 큰 걱정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권리가 갖는 근본적인 가치를 정당화하는 작업은 그것이 다른 독립적인 가치로부터 파생된다는 점을 보임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다른 각도로 바라봄으로써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고로 "(…) 권리 안에 구현된embodied 행위자 관계적 제약들constraints의 체계는 사람에게 실제로 발생하는 것의 가치로는 환원될 수 없지만 여전히 사람에게 가치있는 [도덕적] 지위의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는 권리를 갖기 때문에 권리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궁색한 말이 아니다."

흘륭한 대응이다. 그러나 윤리학 이론이 우리에게 더 좋은 상황을 마련해준다는 이유만으로 더 참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도덕률이 형이상학적 실재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일 수 없다면 이런 의문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윤리학 이론의 참된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 이론이 추구하는 세계가 갖는 본래적 가치의 정도뿐인가? 고민해볼 만한 문제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네이글이 권리를 설명하는 방식은 사실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도구적 혹은 결과론적consequential이지 않냐는 의문이다. 야동을 어떤 식으로든 볼 수 있지만 경찰이 우리를 대우하는 방식 때문에 우리는 왠지 기분이 나쁘다. 그렇지 않은가? 바로 이 불쾌의 감정이 곧 권리를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네이글은 이 점을 부정한다. 권리가 정당화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래적 가치를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즉 경찰이 우리로 하여금 야동을 못 보도록 막는다는 사실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다. 물론 네이글도 이때 우리의 기분이 나빠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 때문에 권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권리를 지닌 사람으로서의 도덕적 지위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권리를 정당화하는 데에 근거로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의 불쾌감은 우리가 권리를 지닌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나타나는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다. 따라서 네이글의 본래적 설명은 규칙 공리주의rule-utilitarianism에서 권리를 정당화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런 네이글의 설명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포르노를 볼 권리가 침해되면 야동을 못 봐서나 경찰이 야동을 못 보게 막아서 불쾌한 것과는 별도로 어떤 가치가 손상된다는 말인데 그런 게 정말로 있다는 말인가? 사람에게는 긍정적 영향을 주지 않지만 여전히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물론 그런 게 없다고 단정짓기도 어렵지만 그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당장 그런 비인격적impersonal 가치가 무엇인지도 파악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말이다.


V 응용: 혐오 발언과 성적 취향

네이글은 이런 점에서 국가가 나서서 혐오 발언hate speech[각주:6]을 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말한다. 어차피 혐오 발언을 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혹시라도 혐오 발언을 한다면 얼마든지 국가 권력이 나서서 입막음을 시도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온전성에 대한 침해violation of integrity다. 물론 혐오 발언은 나쁜 것이다. 당장 모욕당한 사람의 불쾌감도 문제지만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강조되듯이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다. 이런 나쁜 사태를 막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혐오 발언을 한 사람에게만 모욕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모욕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혐오 발언을 하려 들지도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그 점에 관해서는 자유를 존중해주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취급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혐오 발언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물론 나쁜 일이다. 옳지 못한 일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혐오 발언을 했을 때에 가해자를 비난하고,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실제로 우리의 입을 틀어막아서 문제라는 게 아니다. 우리를 언제든지 강제로 입을 닫아버려도 되는 존재로 전락시키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는 자율성autonomy은 우리가 어떻게 대우 받느냐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대우 받아도 되느냐에 의해서도 정의된다"(p. 99).

자신의 성적 취향에 추구할 권리도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성적 취향을 따름으로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쾌락을 얻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성적 취향쯤은 무시해도 되는 존재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네이글의 말대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성적 취향을 상상하고 거기에 공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다형 도착증이 심각한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의 성적 취향을 이해하려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의 성적 취향이 갖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성적 취향을 표현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마조히스트가 아닌 사람이 마조히스트가 느끼는 쾌락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함부로 남의 성적 취향을 정상이네 비정상이네 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 동성애자가 이상하게 느껴지는가? 그들에겐 이성애자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잔인한 장면을 보고 모종의 쾌락을 얻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네이글의 이 말은 여러 번 곱씹어도 지나치지 않다.

나는 고문이나 사지 절단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런 영화를 보고서 성적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 영화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 말이다. 똑같은 것이 그들에게는 기쁨을, 나에게는 혐오감을 주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무언가다. (…)

p. 105


리뷰 논문

Thomas Nagel "Personal Rights and Public Space," Philosophy & Public Affairs 24(2) (1995): 83-107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James Dreier, "Structures of Normative Theories," Monist 76 (1993): 22-40

Judith J. Thomson, "A Defense of Abortion," Philosophy & Public Affairs 1(1) (1971): 47-66

Judith J. Thomson, "Self-Defense," Philosophy & Public Affairs 20(4) (1991): 283-310

T. M. Scanlon, "Adjusting Rights and Balancing Values," Fordham Law Review 72(5) (2004): 1477-1486


  1. 네이글은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이 충분히 높은 한계점sufficiently high threshold을 넘어서는 경우 권리의 침해가 정당화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가령 테러리스트 1명을 죽임으로써 무고한 사람 10만명을 살릴 수 있다면? 이 경우라면 테러리스트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정당화될 여지도 없지 않다. 물론 그 어떤 경우에도 권리의 침해는 허용될 수 없다는 주장도 여전히 가능하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2. 논란의 여지는 물론 있다. 가령 이런 경우에는 동전 던지기 등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장 공정한 - 따라서 가장 옳은 - 행위라는 주장도 있다. 이 같은 주장은 John M. Taurek, "Should the Numbers Count?," 『Philosophy & Public Affairs』 6(4) (1977): 293-316 등에서 제기된 바 있다. [본문으로]
  3. 권리의 불가침성과는 조금 다르다. 권리가 불가침성을 지니기 때문에 좋음good의 증진할 이유가 권리를 보호할 이유를 넘어설 수 없다. 즉 권리의 불가침성은 권리와 권리가 아닌 것 사이의 충돌과 관련된다. 반면에 권리가 비집합적이라는 것은 많은 수의 권리와 적은 수의 권리가 충돌할 때에 전자가 후자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4. 한국어 번역이 적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Inalienability'가 의미하는 바는 권리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양도가 불가능하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권리와 권리의 담지자는 논리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권리가 지위status라는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 [본문으로]
  5. '행위자 중심적agent-centered'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 [본문으로]
  6. '증오 발언' 등 다양한 번역어가 사용되고 있다. 음역해서 '헤이트 스피치'라고 칭하는 경우도 많다. [본문으로]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