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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윤리: 네이글의 절대주의 본문

논문과 원전

전쟁과 윤리: 네이글의 절대주의

동경 TOKYO 2015. 5. 22. 23:58

전쟁 속에서도 우리는 윤리를 말할 수 있을까? 도덕적 고려사항 - 가령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에 관한 문제들 - 은 아예 전쟁에 적용될 수 없다는 식의 허무주의nihilism[각주:1]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면 전쟁 중의 윤리에 대해 말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윤리?

나는 전쟁은 (거의) 모든 경우에 정당화될 수 없으며 도덕적으로 그른 것이라는 반전 평화주의antiwar pacifism에 매우 우호적인 편이지만 전쟁은 그냥 빡친다는 이유만으로 시작할 수 있는 그따위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이 용인될 수 있을만한 상황 - 가령 먼저 군사적인 선제 공격을 받았다든가 - 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때 우리에게 적용될 도덕은 어떤 모습일까?

가령 원자폭탄을 떨어뜨려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을 죽이면 전쟁을 빨리 종식시킬 수 있는 경우에 우리는 어떡해야 할까? 폭탄을 떨어뜨려야 하나? 공리주의자들은 아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사태가 일어나는지happen 이니까. 하지만 네이글이 논문에서 "절대주의absolutism"이라고 부르는 입장[각주:2]에 따르면 폭탄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 절대주의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될 것인지와는 별개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do에 주목하기 때문에 민간인을 폭격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절대주의는 도대체 어떤 행위를 금지하고 어떤 행위를 용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 논문의 목표다.


I

만약 절대주의가 비무장 포로나 민간인을 죽이는 것이 그른 행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때에 일어나게 될 사태 때문이 아니다. 그들을 죽이는 행위가 그르기 때문이다. 이런 절대주의의 특성 때문에 자칫 절대주의가 행위의 결과를 무시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절대주의는 공리주의적 사고 방식을 제한limit하는 것이지 대체substitute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주의 역시 좋음을 최대화하고 나쁨을 최소화하는 행위를 용인할 수 있다. 그 행위가 그른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절대주의가 제시하는 특정한 행위에 대한 금지와 결과의 좋음에 대한 추구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면 전자가 우선시된다.

물론 절대주의적 입장만을 고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길 만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가령 1명을 죽여서 50억명을 살릴 수 있다면? 윤리학 공부한다는 놈들이 이렇게 끔찍한 상상을 더 잘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1명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네이글은 지적한다. 아무리 극단적인 경우라도 이런 식의 살인이 "옳은" 행위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II

그런데 절대주의가 어떤 특정한 행위들을 금지한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원칙이 절대주의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는가?[각주:3] 그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도덕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에게 정당화하는 것justifying to the victim"(p. 137)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쟁 중 적용되는 절대주의적 제한에는 "[1] 도발이나 폭력이 가해져도 되는 사람들의 집단에 대한 제한과 [2] 공격 방식에 대한 제한"(p. 133)이라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한마디로 때려도 되는 인간이 누군지와 그 인간을 어떻게 때려야 하는지에 대한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나 때리면 안 되고 아무렇게나 때려서는 안 된다. (네이글은 이것은 "직접성과 유관성의 조건the conditions of directness and relevance"(p. 138)이라고 부른다.) (1) 전쟁에서 적군에게 총을 쏴도 되는 건 적군이 나에게 위협을 가하기 때문이다.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민간인은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적국의 민간인과 우리의 사이의 관계는 그들을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또 (2) 싸우더라도 "깨끗하게" 싸워야지 "더럽게" 싸우면 안 된다. 가령 경쟁 후보를 누르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사람의 정치적 행보나 정책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 그 사람이 동성애자라느니 흑인이라느니 이런 걸로 비판하면 안 된다는 거다. 아무리 그 경쟁자가 나쁜 놈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경쟁자가 동성애자거나 흑인이라는 사실은 나와 경쟁자 사이의 관계와 무관irrelevant하기 때문이다.[각주:4]

절대주의를 따르는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상대방에게 정당화하려고 한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이 세계를 대상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한다. 이런 맥락에서 네이글은 절대주의가 도덕적 주체를 서로 상호작용하는 작은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상호개인적interpersonal" 성격을 띠는 반면에 공리주의는 도덕적 주체를 어떻게 하면 전체 이득이 최대화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이타적 관료benevolent bureaucrat"로 본다는 점에서 "행정적administrative"이라고 말한다.


III

네이글은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군사 윤리에 적용시켜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 사이의 구분"을 내세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전투요원은 공격해도 비전투요원 - 군대에서 요리하는 사람이나 군의관 같은 사람들 - 은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비전투요원이 정말로 무고innocent하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각주:5] 네이글이 이 맥락에서 말하는 무고함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무고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거나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무해하다"는 의미다. 적군에 속한 의무관이 나쁜 짓을 저질렀던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 나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군대과 장병들에 의해 가해지는 위협은 단순히 그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장을 하고 있으며 무기를 특정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무기와 수송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위협에 대한 기여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들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기여는 이 위협에 대한 기여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농부나 식료품 수송을 하는 사람들처럼 단순히 전투요원이 인간으로서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그르다. 그들이 인간으로서 생존하는 것이 병사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데에 필요조건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p. 140). 마찬가지로 "의료 역시 인간의 일반적인 필요를 위한 것이지, 유독 전투병의 필요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p. 141).[각주:6] 또 적국을 공격할 때도 적절한 공격 대상이 있다. 군사 시설을 폭격하면 될 것을 굳이 그 나라에 있는 대학교나 문화재를 박살내버리는 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공격 방식 역시 중요하다. 실제로도 단순히 적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적병이 갖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는 가급적 지양하도록 권고되고 있다. 가령 대량 살상을 할 수 있는 생화학 무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군이 사용하는 화학 무기는 모두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게 하는 비살상 무기이지 사람을 죽여버리는 살상용 무기가 아니다. 총알도 어떤 것은 못 쓰도록 되어 있다. 가령 할로우 포인트hollow point라는 총알은 헤이그 협약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었다. (할로우 포인트는 덤덤탄dum-dum bullet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네이글은 이 표현을 사용한다.) 네이글은 아주 큰 고통을 일으키는 화염방사기나 네이팜도 너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라고 지적한다.


IV

물론 네이글이 구체화시킨 절대주의가 전쟁 중 행위에 대한 도덕적 규범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1명을 죽여서 50억명을 살릴 수 있는 경우에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1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네이글 역시 공리주의가 상당한 직관적 호소력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한다. 정말로 그렇다. 적국의 군의관 한 명을 죽여서 나의 동료 여러 명을 살릴 수 있다면? 적국의 군의관을 지키는 것을 정당화하기가 정말로 불가능한가? 이 경우에 우리는 정말로 어떡해야 하는가?

물론 "그러한 딜레마를 해결하도록 해주는 원칙들이 비록 아직 명문화되지는 않았더라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런 원칙들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 역시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이들 두 가지 형태의 도덕적 직관[절대주의와 공리주의]가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로 통합될 수 없다는 비관적인 결론을 마주해야 한다. 이 세계는 우리가 명예롭거나 도덕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결코 죄책감이나 악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을 제시하게 될 수도 있다"(p. 143). 한마디로 도덕적인 의미의 "막다른 골목blind alley"에 들어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어쩌면 수많은 막다른 골목이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막다른 골목이 없다고 믿는 것이 더 무모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네이글 역시 같은 생각이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은 그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 막다른 골목 - 이 충분히 도래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고려할 때, 이 세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모든 도덕적 문제들에 대하여 어떤 해결책이 있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우리는 이 세계가 나쁜 장소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이 세계는 또한 악한 장소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p. 144).

나 역시 동의하는 편이다. 이 세계가 도덕적인 막다른 골목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무모한 형이상학 전제를 동반하는 것 같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애초에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지 않도록 조심을 기울이는 일일 것이다. 내가 반전 평화주의에 반대하는 이유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이기는 편과 지는 편이 있는 게임도 아니다. 그저 훈련소에서 몇 주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얼핏 느낄 수 있다… 호전적으로 구는 게 쿨한 거라고 착각하지 말자… 군대 갔다 온 자랑은 그런 걸로 하는 게 아니다… 막다른 골목에서의 지침을 마련하느라 역설적으로 전쟁을 허용하고 있는 각종 국제법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회의적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을 막는 일이다. 물론 길을 잃었을 때 대처 방법을 미리 생각해보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훌륭한 탐험가는 길을 잃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이 세계가 길을 잃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다면 더더욱.


리뷰 텍스트

Thomas Nagel, "War and Massacre," Philosophy & Public Affairs 1(2) (1972): 123-144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Richard A. Wasserstrom, "On the Morality of War: A Preliminary Inquiry," Stanford Law Review 21(6) (1969): 1636-1656

Brian Orend, "War,"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08 Edition), ed., Edward N. Zalta, URL = <http://plato.stanford.edu/entries/war/>

Robert Nozick, Anachy, State, and Utopia (New York: Basic Books, 1974), pp. 28-35 ("Moral Constraints and Moral Goals," "Why Side Constraints?," & "Libertarian Constraints")


  1. 허무주의를 전쟁에의 돌입을 정당화하거나 지지하는 입장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전쟁 중에 도덕률이 적용될 수 없다는 허무주의의 테제는 전쟁에의 돌입에 대한 입장과는 독립적이다. 전쟁에의 돌입이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은 정의로운 전쟁론just war theory 등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본문으로]
  2. 정식화된 도덕 이론이 아니다. "절대absolute"라는 표현에도 오해의 소지다 있다. 절대주의가 자칫 특정한 행위 등이 "절대" 용인될 수 없다는 식의 입장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네이글은 절대주의에도 강하거나 약한 형태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자신이 옹호하고자 하는 절대주의가 "어떤 선이 얻어질 것인지 혹은 그럼으로써 어떤 악이 회피될 것인지와는 별개로 그 어떤 여건에서라도 다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시각"(p. 126) - 네이글은 이것을 "평화주의pacifism"라고 명명한다 - 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한다. 물론 이 맥락에서 절대주의는 상대주의의 반대가 아니다. [본문으로]
  3. 네이글은 이 지점에서 이중 효과의 원리the doctrine of double effect를 잠시 검토하면서 이 원리가 "궤변으로 치부되기 쉬운 듯 보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p. 131). 특히 이중 효과의 원리에 의해 금지되던 행위도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기술될 수 있다는 점은 이중 효과 원리가 갖는 매우 중요한 난점인 듯 보인다. 가령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마을의 민간인을 모두 죽인다고 말하면 민간인 사살이 게릴라 소탕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게릴라가 숨어 있다고 여겨지는 민간인 "마을"을 폭격한다고 말하면 어쩐지 민간인 사살은 단순히 예견된 결과일 뿐 도구나 목적으로서 의도된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네이글은 "이러한 궤변론적casuistical 문제"때문에 이중 효과의 원리를 절대주의의 내용으로 선뜻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논문보다 14년 정도 후에 출판된 『The View From Nowhe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pp. 179-180에서는 이중 효과의 원리에 대한 보다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친다. [본문으로]
  4. 왜 우리는 우리를 모욕하는 사람의 발을 밟거나 팔을 꼬집는 것 보다 입을 때리는 게 더 적절한 대응이라고 생각할까? 입을 때리는 것이 모욕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대응이 갖는 적절성은 단순히 입을 때렸을 때 발생하는 고통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모욕하는 사람의 입을 때리는 것은 그가 우리를 모욕함으로써 발생한 둘 사이의 "관계"에 유관한relevant 대응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논문의 각주 7을 참고하면 된다. [본문으로]
  5. 오늘날 전쟁에서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 사이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 역시 문제다. 네이글은 이 점을 언급하면서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제시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6. 어떤 전투병 X를 "인간으로서의" X와 "전투병으로서의" X로 나누는 것이 -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나 - 적절하느냐는 물음은 유효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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