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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현상

청소년 언어순화? 꼴값을 떨고 있네

동경 TOKYO 2015. 6. 7. 15:43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청소년의 "언어문화 순화"를 목적으로 가요를 제작한다고 한다. [관련 기사] 청소년들에게 은어와 비속어를 쓰지 말라고 권장하는 내용의 노래를 만들어서 학교 등에 보급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개꼴값이 아닐 수 없다.

일단 노래가 찌질할 것이다. "욕은 하지 말아요♪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해요♬" 그런 걸 청소년들이 따라 부르면서 내면화할 것 같나? 솔직히 나는 이런 노래 부르는 친구랑은 안 논다. 노래는 흥이 나야 사랑받는다. 은어와 비속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씹선비 말씀 교훈을 담고 있는 노래가 흥겨울 리가 없다. 당장 실효성부터 없을 것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언어의 용법이 변화하는 양상에 대해 쥐뿔도 모르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언어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도정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과 표현들은 명시적인 합의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던가? "우리 이제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을 묘사할 때 '삽질하고 있네'라는 말을 쓰기로 하자" 청소년들이 은어와 비속어를 쓰는 것은 은어와 비속어 사용을 권하는 세계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그들만의 언어공동체를 형성했다면 그 배후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란 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만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무슨 "언어순화"를 하겠다는 말인지 당췌 이해할 수 없다. 정말 언어의 용법을 어쭙잖은 노래 몇 곡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사실 "순화"라는 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이 좋아서 "순화"지 실은 그따위로 말할거면 입 닥치라는 얘기다. 여러 다른 언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담아낸다. (번역이 어려운 이유가 뭐겠나?) 다만 한국어와 영어처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발화되는 언어들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같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도 기실 여러 다른 언어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의 논문이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평소에 그 학자와 - 직접적으로든 논문을 통해서든 - 대화한 적이 없으니 그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시[詩]도 마찬가지다. 시를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 그러니까 시적 언어를 익히지도 않았으면서 - 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대는 건 영어 알파벳 겨우 쓰면서 영국 사람 말 못 알아듣겠다고 불평하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이런 점에서 하상욱이 쓴 글을 보고 "시라는 건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 것이어야지" 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이는 인간들 중에 시를 읽어 본 인간이 거의 없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한 언어는 다른 그 어떤 언어로도 전할 수 없는 것들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경우, 혹은 모든 경우, 언어를 빼앗는 행위는 그 언어를 가지고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빼앗는 행위가 된다.

물론 때로는 말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매력적인 언어는 곧 삶의 일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어릴 때 듣고 자란 각종 옛날 이야기들은 그저 한순간 사람들의 혀끝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 곧 우리의 삶을 - 바꾸어 놓는다. 위대한 문호와 철학자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혹여 청소년들의 은어와 비속어가 아니꼽다면 그들이 다른 언어를 배우도록 하면 될 일이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만한 매력적인 언어를 말이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언어가 충분히 매력적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 언어를 익히려 할 것이다. 우리가 언제 엄마가 시켜서 옛날 이야기를 외고 다녔나? 시인과 철학자는 학교 선생님이 시켜서 글 썼나? 그렇지 않다. 반면에 사람을 매혹할 수 없는 언어는 결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언어순화 가요? 찌질한 언어는 반드시 사장되게 마련이다.

언어가 매력적인 것은 오로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옛날 이야기는 우리에게 옛날 사람들처럼 경외에 가득찬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볼 기회를 주지 않던가? 철학자의 글은 그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문제들을 우리에게도 던져주지 않는가? 시가 아름다운 것은 문장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고뇌와 문장들 너머에서 드러나는 세계 덕분이 아닌가? "건전한 언어문화" 운운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어른들은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청소년들의 언어에 비해 어른들의 언어는 - 그리고 어른들의 삶은 - 또 얼마나 더 매력적인지 혹은 찌질하지는 않은지 말이다. 당신 같으면 그 언어를 배우고 싶겠나? 본 받고 싶은 삶따라하고 싶은 언어도 없으면서 다른 누군가의 언어 사용을 - 그리고 그들의 삶을 - 제한하겠다는 생각은 폭력적인 동시에 무용하다. 문화체육관광부, 꼴값 그만 떨고 생산성있는 고민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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