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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어 문제 해결을 위한 한 가지 시도: 골드만의 인과적 지식 이론 본문

논문과 원전

게티어 문제 해결을 위한 한 가지 시도: 골드만의 인과적 지식 이론

형이상학적 찐따 2015.06.22 15:35

게티어Edmund Gettier 이후로 지식의 성립 조건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쏟아져 나온다. 아직도 끝이 안 났다. (심지어 해결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각주:1] 그냥 게티어 문제 풀기 싫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여기서는 앨빈 골드만Alvin I. Goldman이 제시한 이른바 인과적 지식 이론causal theory of knowledge을 소개한다.

게티어가 제시한 두 사례를 기억하는가? [게티어의 두 사례] 분명 '취직을 하게 될 사람이 동전 10개를 갖고 있다' 혹은 '민수가 그랜저를 갖고 있거나 영희는 파푸아뉴기니에 있다'는 믿음은 지식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두 믿음은 모두 참이면서 정당화되지 않았는가? 골드만은 두 명제에 대한 믿음이 사실은 정당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닌 게 아니라 두 명제를 참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사실fact과 인식 주체가 두 명제를 믿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적 관계도 없다. 골드만은 어떤 명제에 대한 믿음의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 혹은 증거는 반드시 그 명제를 참이게 하는 사실과 인과적 연관성causal connection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식주체 S가 P를 알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P라는 사실과 P에 대한 S의 믿음 사이에 적절한appropriate 인과적 연관성이 성립하는 것이다(p. 369).

"적절한 인과적 연관성"은 지각perception이나 기억memory, 타당한 추론valid inference 등을 통해 성립할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I 과거 시점의 사실에 대한 지식

S는 어느 산 밑에서 용암의 흔적을 발견한다. S는 용암과 관련한 배경믿음에 근거한 추론을 통해 그 산이 화산이며 수 세기 전에 폭발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실제로 이 산은 화산이며 수 세기 전에 폭발한 적이 있다. S의 믿음은 이러한 사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지식knowledge이라고 볼 수 있다.

p와 q은 각각 이 화산이 수 세기 전에 폭발했다는 사실과 그 화산의 주변에 용암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는 사실 f에 대한 인식 주체 x의 믿음을 나타낸다. 실선과 점선 화살표는 각각 인과적 연결과 추론을 의미한다. 이처럼 p에 대한 S의 믿음 은 사실 p와 적절하게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지식이 된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 어느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의 흔적을 남겼는데 누군가가 이 흔적을 없애버린다. 얼마 뒤 다른 누군가가 이 산으로 놀러와서 마치 이 화산이 수 세기 전에 폭발한 적이 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용암의 흔적을 만들어 놓는다. 세월이 지나서 S는 이 가짜 흔적을 보고 이 화산이 수 세기 전에 폭발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골드만에 따르면 S의 이러한 믿음은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도식에서 s는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용암 흔적을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을 지칭한다. 여기서 드러나듯 p에 대한 S의 믿음 는 사실 p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는 그저 믿음일 뿐 지식은 아니다.


II 미래 시점의 사실에 대한 지식

그러나 어떤 명제를 참이게 하는 사실이 꼭 그 명제에 대한 믿음의 직·간접적 원인이 될 필요는 없다. 양자가 공통 원인common cause를 갖는 경우에도 적절한 인과적 연관성을 갖는다고 여겨진다. 골드만을 이를 바탕으로 미래 시점의 사실에 대한 지식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설명한다.

T는 월요일에 명동에 가려고 한다. 일요일 밤, T는 S에게 "내일 명동에 갈 생각이야"라고 말한다. S는 T의 말을 듣고서 T가 정말로 월요일에 명동에 갈 의도를 갖고 있다고 추론한다. 또 더 나아가서 T가 월요일에 명동에 갈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월요일 낮, T는 실제로 자신의 의도에 따라 명동으로 간다. 이 경우 S는 T가 월요일에 명동으로 갈 것을 (일요일 밤에) 알았다고 말할 수 있다.

T가 실제로 월요일에 명동에 갔다는 사실이 T가 월요일에 명동에 갈 것이라는 S의 믿음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T가 실제로 월요일에 명동으로 갔다는 사실과 T가 월요일에 명동으로 갈 것이라는 S의 믿음은 공통적으로 T가 월요일에 명동으로 가겠다는 의도를 (일요일 밤에) 가졌다는 사실을 원인으로 갖는다.

q와 r, p는 각각 T가 월요일에 명동으로 가겠다는 의도를 일요일 밤에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T가 일요일 밤에 친구인 S에게 월요일에 명동으로 갈 의도가 있음을 밝혔다는 사실 그리고 T가 월요일에 실제로 명동으로 간 사실을 가리킨다. 이처럼 사실 p와 p에 대한 S의 믿음은 모두 사실 q를 공통 원인으로 갖는다. 따라서 p에 대한 S의 믿음 는 지식이다.

지식이 성립되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것일까? T는 월요일에 명동으로 갈 것이라는 의도를 일요일 밤에 갖고 있었으며 S에게 이러한 의도를 (일요일 밤에) 밝힌다. 막상 월요일 아침이 되자 세상만사가 귀찮아진 T는 명동 나들이 계획을 취소한다. 그런데 갑자기 무장괴한이 T의 집으로 들이닥쳐서 T에게 지금 당장 명동으로 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한다. T는 이에 못 이겨 강제로 명동에 가게 된다. 이때에도 T가 월요일에 명동으로 갈 것이라는 S의 믿음 은 지식이라고 볼 수 있는가? 골드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와 사실 p가 공통 원인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양자 사이에 적절한 인과적 연관성이 성립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T가 월요일에 명동으로 갔다는 사실 p는 다름 아닌 무장괴한이 T에게 명동으로 가라고 협박했다는 사실 s를 원인으로 삼고 있다.


III 반론

피터 클라인Peter D. Klein은 인과적 지식 이론이 제시한 지식의 성립 조건을 충족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지식이 성립했다고 보기 힘든 경우들이 있다고 주장한다.[각주:2] 클라인이 제시한 반례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도서관에 간 S는 학교 선배인 놀부가 책을 꺼내더니 황급히 외투 안으로 숨기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도서관을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한다. 이를 바탕으로 S는 '놀부가 도서관 책을 훔쳤다'고 믿게 된다. 실제로도 놀부는 책을 훔쳤으며 이에 대한 S의 목격은 S의 믿음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놀부가 책을 훔쳤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S의 믿음이 인과적으로 적절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S의 믿음은 골드만의 인과적 지식 이론에서 제시하는 지식의 성립 조건을 만족한다.

한편 놀부에게는 쌍둥이 동생 흥부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흥부도 같은 시각에 같은 도서관에서 책을 훔쳤다. S는 놀부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설사 놀부가 아니라 흥부를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놀부가 도서관 책을 훔쳤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S는 우연히 흥부가 아니라 놀부를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참인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부가 책을 훔쳤다는 사실과 놀부가 책을 훔쳤다는 믿음 사이에 인과적 연관성은 분명 존재하지만 이 연관성은 다만 우연히 성립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S가 '놀부가 도서관 책을 훔쳤다'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는 듯 보인다.


리뷰 텍스트

Edmund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Analysis 23 (1963): 121-123 [보러가기]

Alvin Goldman, "A Causal Theory of Knowing," The Journal of Philosophy 64(12) (1967): 357-372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Peter D. Klein “Knowledge, Causality, and Defeasibility” Journal of Philosophy 73 (1976): 792-812

Gail Stine “Skepticism, Relevant Alternatives and Deductive Closure” Philosophical Studies 29 (1976): 249-261

Linda Zagzebski, "The Inescapability of Gettier Problems," The Philosophical Quarterly 44(174) (1994): 65-73

Jonathan Jenkins Ichikawa & Matthias Steup, "The Analysis of Knowledge,"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14 Edition), ed., Edward N. Zalta, URL = <http://plato.stanford.edu/archives/spr2014/entries/knowledge-analysis/>


  1. Linda Zagzebski, "The Inescapability of Gettier Problems," 『The Philosophical Quarterly』 44(174) (1994): 65-73 [본문으로]
  2. Peter D. Klein “Knowledge, Causality, and Defeasibility,” 『Journal of Philosophy』 73 (1976): 792-8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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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 프로필사진 chanchu1352 2015.06.22 23:03 신고 골드만은 덕 인식론자인가요?
  • 프로필사진 형이상학적 찐따 2015.06.23 21:07 신고 안녕하세요 :-)

    인식론 전공이 아니라 현대 인식론의 논의를 이끌어가는 주요 철학자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는 편입니다 :-(

    다만 적어도 논문 "A Causal Theory of Knowing"을 발표할 때의 골드만은 덕 인식론자가 아닙니다. 이후 입장을 바꾸어 덕 인식론(의 한 형태인 덕 신빙론virtue reliabilism)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어니스트 소사Ernest Sosa와 존 그레코John Greco 등이 인지 능력cognitive faculty의 신빙성을 중시하는 덕 신빙론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덕 신빙론과 달리 인식 주체의 태도나 성품을 중시하는 덕 책임론virtue responsibilism 역시 덕 인식론의 주요한 형태입니다. 린다 자그제브스키Linda Zagzebski, 로레인 코드Lorraine Code, 제임스 몽마르케James Montmarquet 등이 이 입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 프로필사진 어떤 학부생 2015.12.22 16:28 신고 안녕하세요. 글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블로그가 예뻐졌네요! 궁금한 게 있어 댓글 남깁니다.
    위 도표들에서 사실들과 실선 화살표로 직접 연결되지 않은 믿음들--예컨대 마지막 도표의 Bs(u)나 Bs(v)--을 굳이 표시함으로써 골드만이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요?
  • 프로필사진 형이상학적 찐따 2015.12.22 20:58 신고 안녕하세요 :)

    본문에서 쓴 것처럼 Bs(r)은 T가 일요일 밤에 친구인 자신에게 월요일에 명동으로 갈 의도가 있음을 밝혔다는 S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곧바로 Bs(q), 그러니까 T가 월요일에 명동으로 갈 의도를 갖고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T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S는 가령 T가 (적어도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T가 명동에 갈 의도를 밝혔다는 믿음에 근거해서 T가 실제로 명동에 갈 의도가 있다는 믿음까지도 가질 수 있게 되겠죠.

    마찬가지로 T가 명동에 갈 의도를 갖고 있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는 T가 실제로 명동에 갈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가 되기에 불충분합니다. 알고보니 T에게는 월요일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그날 아침이 되어서야 갑자기 기억이 나서 명동 나들이 계획을 취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S는 예를 들어 T가 밤에 세운 계획을 이튿날 아침에 뒤집는 사람은 아니라거나 월요일 아침에 갑자기 T가 몸살에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T가 명동에 갈 의도를 일요일 밤에 갖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T가 월요일에 실제로 명동에 갈 것이라는 믿음을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정리하자면 Bs(u)와 Bs(v)는 각각 S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그리고 추론을 하기 위해 사용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p나 q과 같은 사실들과 화살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배경 믿음background beliefs" 정도가 되겠네요.

    골드만의 인과적 지식론을 이해하는 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
  • 프로필사진 위415탈출자 2017.09.19 23:07 신고 작년 논리학 때도 블로그에서 많은 도움 받았었는데 올해 서철이 들으면서도 많이 배워갑니다ㅜㅜ. 몇년 전 인식론 처음 들을 땐 무슨 소리지 했던 게 비로소 이해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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