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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키: 고정 지시어로서의 고유 명사

동경 TOKYO 2016. 4. 13. 15:05

솔 크립키Saul Kripke는 『이름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각주:1]에서 고유 명사proper names에 대한 프레게Gottlob Frege의 입장을 비판한다. 프레게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고유 명사는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 정도의 뜻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2] 크립키는 우리가 고유 명사의 뜻을 그 고유 명사에 의해 지칭되기 위하여 만족시켜야 할 조건의 기술 -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s - 로 이해하는 한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프레게를 따르다 보면 우연적으로 참인 문장이 필연적으로 참인 문장으로 바뀌어 버린다는 것.[각주:3] 이게 무슨 말일까?

먼저 우연적 참contingent truth과 필연적 참necessary truth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어떤 문장이 우연적으로 참이란 말은 그것이 실제 세계에서는 참이지만 그것이 거짓인 가능 세계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오바마는 2015년에 미국의 대통령"라는 문장은 참이다. 그러나 이 문장이 거짓인 가능 세계도 존재한다.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당선되는 세계도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7+5=12" 혹은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 등의 문장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이 문장들이 거짓인 세계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 분석적 참analytic truth와 종합적 참synthetic truth의 구분이 있다. 분석적으로 참인 문장은 오로지 그 문장을 구성하는 표현들의 뜻에 의해서 참이 되는 문장이다.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라는 문장은 그저 "총각"이나 "미혼" 등의 표현이 가진 뜻에 의해서 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는 2015년에 미국의 대통령이다"라는 문장은 그 문장과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뜻에 의해서만 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필연적 참이 항상 분석적 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칸트는 "7+5=12"가 필연적 참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이것이 분석적으로 참인 것은 아니라고 보고 프레게는 이것이 분석적으로 참이라고 본다. 다만 분석적 참은 곧 필연적 참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뜻을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다   

라는 문장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왜? 이 문장은 그 뜻에 의해서만 참이 되는 분석적으로 참인 문장이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이 문장 내의 여러 표현들의 뜻을 파악한다면 곧 이 문장이 참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석적 참은 또한 필연적 참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문장은 필연적으로 참인 문장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아니다. 이 문장은 필연적 참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가 아니거나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 아닌 세계는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크립키는 고유 명사의 뜻이 한정 기술구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만약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라는 한정 기술구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고유 명사의 뜻이라면 - 프레게의 논제 8에 따라 뜻은 지시체를 결정하므로 -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의 대왕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18대 대통령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박근혜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이상하지 않은가?

한정 기술구는 비고정 지시어non-rigid designator라서 다른 가능 세계에서 다른 지시체를 갖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어쩔 수 없이 생긴다. 그래서 크립키는 고유 명사를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바로 그 대상을 지칭하는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정 기술구는 일반적으로 지시체를 고정하지 못한다. 지시체를 고정하기에는 충분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 왜 충분하지 않은가?

사실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한 사람]이 괴델이 아니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사실은 (…) "슈미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바로 이 작업을 한 사람이었던 거죠. 슈미트의 친구 괴델은 우연히 슈미트의 글을 입수하게 됐고 덕분에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이 괴델의 공으로 돌아간 겁니다. [프레게의 입장]을 따른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괴델"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우리는 기실 슈미트를 지칭하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슈미트가 "산수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기술구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 우리가 "괴델"에 대해 말할 때 실은 항상 슈미트를 지칭하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진 않죠.[각주:4]

한마디로 한정 기술구는 고유 명사의 지시체를 고정적으로 지시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고유 명사의 지시체를 고정적으로 지시하기 위해 한정 기술구가 필요한 것 같지도 않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이 키케로Cicero에 대해 생각할 때 그저 고대 로마의 어떤 유명한 달변가를 생각합니다. 굳이 키케로 외에는 고대 로마의 유명한 달변가가 없는지 [키케로만을 특정하기 위해] 우리가 키케로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 하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죠. 그저 그 이름이 지시체를 갖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흔히들 그 사람을 지칭하죠. 아주 훌륭한 이론 물리학자죠. 여기 계신 분들은 전부 파인만의 이론이 겔만Gel-Mann의 이론과 내용 측면에서 어떻게 다른지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뭐?[각주:5] 그치만 저 바깥에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어떤 사람은 그럴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파인만"이란 이름을 사용하죠. 파인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물리학잔가 뭐 그런 사람 아냐?" 그 사람은 이런 기술이 어떤 한 사람을 특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치만 저는 여전히 그가 "파인만"이란 이름을 파인만을 지칭하기 위한 이름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상이 어떤 고유 명사와 연관된 특정한 한정 기술구를 만족하는 것은 그 대상이 그 고유 명사의 지시체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리뷰 텍스트

Alexander Miller, Philosophy of Logic 2nd ed. (New York: Routledge, 2007), §2.5

  1. 저서의 제목이 "Name and Necessity"가 아니라 "Naming and Necessity"기 때문에 "명명과 필연"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평가도 있다. "Naming"은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밀컫는 말이지 어떤 대상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좋은 지적이지만 "이름과 필연"이라는 번역이 부정확하다는 결론을 뒷받침해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름"은 일반 명사 - "Name"의 번역어 - 로도 볼 수 있지만 "이르다"라는 동사의 명사화 된 형태 - "Naming"의 번역어 - 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마이클 더밋Michael Dummett은 프레게에 대한 이런 해석에 반대한다. "여러 명사들names이 갖는 뜻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서 프레게가 자연스럽게 그러한 한정 기술구를 적게 되었다. 그러나 프레게의 글 어디에도 고유 명사의 뜻은 항상 어떤 복잡한 기술구의 뜻이라는 결론을 지지할 만한 구절은 없다. 같은 지시체를 갖는 두 명사가 다른 뜻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로지 각각의 명사가 지시하는 동일한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recognize한다는 것 뿐이다. 우리가 그러한 인식을 구체화effect하기 위해 사용하는 형태가 반드시 한정 기술구의 형태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Frege: Philosophy of Language』 (London: Duckworth, 1973), pp. 98-99. [본문으로]
  3. 대부분의 고유 명사를 숨겨진 한정 기술구라고 보는 러셀Bertrand Russell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비판이다. [본문으로]
  4. Saul Kripke, 『Naming and Necess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pp. 83-84. [본문으로]
  5.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에서 열렸던 강연의 내용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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