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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키의 인과적 지시 이론

동경 TOKYO 2016. 4. 17. 16:32

크립키Saul Kripke는 고유 명사proper names는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s가 아니라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s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정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하기 위해 한정 기술구는 충분하지도 필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고정 지시어로서의 고유 명사] 그렇다면 고유 명사는 어떻게 특정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하는가? 크립키는 인과적 연쇄에서 그 답을 찾는다.

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봅시다. 부모가 어떤 이름으로 그를 부르겠죠. 부모는 자기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아이에 대해 얘기할 겁니다. 시간이 가면서 이 아이를 만나는 사람도 생기겠죠. 이런 저런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 이름은 일종의 연쇄를 통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퍼져나갈 겁니다. 이 연결 고리의 저 멀리에 있는 어떤 사람이 시장에선지 어디에선지 리처드 파인만에 대해 들었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은 리처드 파인만을 지칭할 수 있을 겁니다. 대체 누구한테서 처음으로 파인만이란 이름을 전해들은 건지 혹은 심지어 처음이 아니더라도 누구한테서 파인만이란 이름을 전해들은 건지 기억을 못하더라도 말이죠. 그래도 그는 파인만이 유명한 물리학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파인만에서 시작된 의사소통의 연결 고리가 마침내 이 사람한테도 미친 거죠. 어쨌든 이 사람은 파인만을 특정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인만을 지칭합니다. (…) 파인만으로부터 시작된 의사소통의 연쇄가 형성된 거죠. 그는 파인만의 이름을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퍼져 나가게 한 [언어]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각주:1]

 크립키는 이런 설명이 매우 거칠다는 걸 인정한다. 사실 크립키의 이런 입장은 "인과역사적 지시 이론causal-historical theory of reference" 혹은 줄여서 "인과적 지시 이론"으로 불리지만 사실 크립키는 이것이 "이론theory"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정적 지시체를 갖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일일히 나열할 수 있는지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게 인과적 지시 "이론"의 전부는 아니다. 월광 소나타 등을 작곡한 천재 음악가에게 "베토벤"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그 이름은 인과적 연쇄를 통해 내 귀에 들어오게 됐다. 어느날 나는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하게 됐는데 그 강아지의 이름을 "베토벤"이라고 짓는다. 만약 내가 강아지를 쳐다 보면서 "베토벤!"이라고 말하면 나는 독일의 천재 음악가를 지칭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름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전달"될 때, 그 이름을 전해들은 사람은 그 이름을 전해준 사람이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지시하고자 했던 바로 그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 그 이름을 사용하겠다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각주:2]

내가 강아지를 보면서 "베토벤! 물어!"라고 말할 때 나의 의도는 독일의 천재 음악가 베토벤을 지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크립키의 이론은 이런 방식으로 내가 강아지의 이름을 부를 때조차도 음악가 베토벤을 지칭하게 된다는 엉뚱한 귀결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크립키의 지시 이론은 다음과 같은 반례를 피할 수 없다.[각주:3] 고조선 사람인 철이는 "독도"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어떤 지역을 지칭한다. 철이를 만나 "독도"라는 이름을 전해들은 탐험가 두비야는 철이가 쓰는 언어에 능통하지 못해 "독도"가 한반도 동쪽에 위치한 어떤 섬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라고 오해한다. 그럼에도 두비야는 "독도"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철이가 그 이름을 사용할 때 지칭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지칭하고자 하는 의도는 가지고 있다. 그저 철이가 "독도"라는 표현을 통해 무엇을 지칭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뿐. 두비야는 후손들에게 그리고 그 후손들은 다시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독도"라는 이름을 전한다. 그들은 모두 "독도"라는 말로 자신의 선조들이 "독도"라는 이름을 통해 지칭하고자 하는 바로 그 대상을 지칭할 의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인들은 "독도"라는 말을 사용할 때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어떤 지역을 지칭하는가? 그렇지 않다. "독도"라는 고유 명사는 한반도 동쪽에 위치한 어떤 섬을 가리킨다.

아무리 고유 명사의 피전달자가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전달자가 그것을 통해 지칭하고자 한 대상을 지칭할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전달자가 그 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고유 명사의 지시체가 고정될 수 없다는 귀결, 크립키의 이론은 이런 귀결을 피해갈 수 없다.


리뷰 텍스트

Alexander Miller, Philosophy of Logic 2nd ed. (New York: Routledge, 2007), §2.13

  1. Saul Kripke, 『Naming and Necess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p. 91. [본문으로]
  2. Ibid., p. 96; 강조 추가. [본문으로]
  3. Gareth Evans, "The Causal Theory of Names" in 『Collected Paper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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