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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이론에 대한 대응

형이상학적 찐따 2016.10.10 13:06

오류 이론error-theory에 대한 대응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맥키J. L. Mackie의 도덕적 판단에 관한 오류 이론도 예외가 아니다. 먼저 오류 이론이 내재적인 정합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방법이 있다.


I 맥키의 주장은 내재적으로 불안정하다

크리스핀 라이트Crispin Wright는 만약 도덕적 판단이 모두 거짓이라면 도덕적 판단을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맥키의] 견해가 주는 가장 큰 불편함은 바로 별다른 설명 없이 도덕적 담론을 잘못된 믿음bad faith 정도로 격하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생각을 했든, 이 세계가 무엇이 옳은지, 혹은 그른지, 무엇이 의무인지 등에 대한 우리의 주장 중 어느 것에라도 전리를 전달할 수 없다unsuited to confer truth는 것을 철학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순간, 적절한 대응은 분명 그러한 주장을 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 만약 도덕적 판단의 본질이 진리를 겨냥하는 것이라면[=맥키의 개념적 주장이 참이라면], 그리고 맞출 수 있는 도덕적 진리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철학으로부터 배우게 된다면[=맥키의 존재론적 주장이 참이라면], 우리 스스로 중대한 도덕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사안들에 대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사유하는 우리의 모습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각주:1]

맥키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는 도덕적 담론의 의미가 "진리를 빗겨선 어떤 평가의 규범"에 있으며, 이 규범들을 "[도덕적] 진술들이 겨냥하고 있으며, 또 충족시킬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각주:2] 실제로 맥키는 도덕적 담론의 의미가 (간단히 말하자면) 사회적 협동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각주:3] 사회적 협동의 이익을 "보조적 규범subsidiary norm"이라고 부른다면 결국 도덕적 진술들의 의미는 (의미론적 값semantic value이 아니라) 보조적 규범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정직해야 한다"거나 "부정직해도 좋다"는 말은 둘 다 거짓false이지만 그렇다고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정직해야 한다"는 문장이 널리 받아들여진다면 이 문장은 보조적 규범의 충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정직해도 좋다"는 문장은 널리 받아들여졌을 때 반대로 보조적 규범의 달성에 방해가 될 것이다. 문제는

만약 도덕적 담론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수많은 거짓들falsehoods 중 어떤 보조적 규범에 의거하여 받아들일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적절한 구분 - 그러니까 도덕적 주장에 대한 일상적 논의나 비판을 위한 정보를 실제로 제공해주는 구분 - 이 있다면, 왜 도덕적 담론의 진리truth를 상정된 보조적 규범 - 그것이 무엇이든 - 의 충족의 관점에서 설명하지 않고 꼭 총체적 오류에 대한 비판을 촉발시키는 방식으로 해석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오류 이론가들은 일상의 도덕적 사고에서 찾은 미신superstition이 도덕적 진리에 대한 설명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그것[=도덕적 진리를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피하는 도덕적 진리에 관한 구성construction of moral truth을 허용하기에는 너무 [존재론적으로] 깊이 들어간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논변의 전망이 얼마나 밝은지는 잘 모르겠다.[각주:4]

설사 도덕적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가 옳다고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맥키의 주장은 내재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II 도덕의 개념과 존재는 대응할 수 있다

A. 기이성 논변 비판

오류 이론의 전체 얼개는 이렇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의 개념은 객관적·정언적으로 지시적인 사실(=객관적 가치objective values)이다. 그런데 그런 건 없다. 따라서 도덕의 개념을 포함한 모든 도덕적 판단은 거짓이다.

먼저 객관적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의 지도direction과 동기부여motivation의 속성은 기질적dispositional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왜 기질적인가? 왜냐하면 객관적 가치가 무엇을 하라고 알려주고 또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성질은 특정 조건 하에서만 그렇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객관적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사태가 원숭이에게 규범적 효력을 가질리는 없다. 결국 객관적 사실이 갖는 규범적 속성은 특정한 조건이 만족된 반사실적 조건 하에서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특정한 조건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논의하지 않겠다.)

이는 색의 속성과 같다. 빨간색 대상을 접한 이는 그것이 빨갛다고 판단할 이유를 갖게 되고 실제로 그것을 빨간 것으로 보게 된다. 맥키의 말을 빌리자면 빨간 대상은 빨강으로 보여야 함to-be-seen-as-red이라는 속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대상이 객관적으로 빨간 것과 그것이 "적절한" 주관에 의해 빨간 것으로 보여지는 것 사이에는 내재적 연관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빨강이라는 속성이 형이상학적으로 기이하다queer고 말하지 않는다. 왜 나만 갖고 그래?

어떤 대상이 도덕적으로 좋은 것과 그것이 "적절한" 주관에 의해 추구되는 것 사이에도 내재적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건 왜 기이한가? 도덕적 사실이 기이하다는 생각은 그것이 "적절한" 주관에 의해 접해진다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지도와 동기부여를 할 수 있어야만 도덕적 사실이 비로소 도덕적 사실일 수 있다고 가정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당위는 가능을 함축한다ought implies can"는 테제를 받아들이는 이상 도덕적 사실의 규범적 속성은 기질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테제가 참인 한 도덕적 사실은 결코 정언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테제가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도덕적 사실의 규범적 속성이 정언적이라는 결론이 곧장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도덕적 선의 존재는 기이할 수 있다. 하지만 색의 존재보다 더 기이한가? 맥키는 이를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


B. 기질적 속성으로서의 도덕적 선

그렇다면 어떤 것이 빨간 것과 그것이 적절한 주관에게 빨간 것으로 보여지는 기질을 갖고 있다는 것 사이에 성립하는 내재적 연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애초에 빨강에 대한 개념이란 곧 적절한 여건에서 적절한 주관에게 빨간 색으로 나타나는 기질에 대한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크John Locke의 생각과 달리 우리에게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빨강도 기질적 속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선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도덕적 선에 대한 개념은 곧 적절한 여건에서 적절한 주관에게 좋은 것이라 판단되는 기질에 대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는 이상하지 않은가? 빨강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정말로 기질적인가? 우리에게 현상하는 빨강이란 불을 켜면 활성화activate되었다가 불을 꺼면 다시 비활성화되는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발강은 불을 켜면 드러나는revealed 것일 뿐이다.

밀러는 이 생각이 오해라고 주장한다. 어떤 기질은 드러나지 않을 때 사라지고 드러날 때만 생기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빨강이라는 속성을 기질이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이 드러나지 않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병이 잘 깨진다brittle는 말은 병이 절대 깨지는 반사실적 상황 - 떨어진다거나 힘을 받는다거나 - 이 도래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참이다. 그 속성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잘 깨짐이라는 속성은 기질로서 언제나 존재한다. 색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어두울 때 이 속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기질로서 이 속성은 존재한다. 적절한 반사실적 상황이 갖추어지면 - 가령 조명이 적절하다거나 보는 사람의 시각이 양호하다거나 - 빨간 것으로 나타날 것이 아닌가? 빨강을 경험할 때는 곧 이 빨강의 속성이 드러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된 때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빨강의 속성은 경험되기를 기다리며 존재한다is there to be experience.

물론 모든 속성에 대한 개념이 다 기질적인 것은 아니다. 일례로 역겨움nausea의 개념은 정언적이다. 역겨움은 주관과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기질로서 존재하다가 특정한 조건 하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겨움은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색은 아니다.

도덕적 선의 개념은 이런 점에서 역겨움보다는 색에 더 가깝다. 우리가 살인이 그르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살인이라는 행위가 그르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되 그것이 우리에게 드러나기도 하고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도덕적 선은 우리에게 드러날 때에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표상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객관적 가치에 대한 개념과 객관적 가치의 존재는 모두 기질적이라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그렇다면 맥키의 오류 이론은 거짓이 된다.


리뷰 텍스트

Alexander Miller, Contemporary Metaethics: An Introduction, 2nd ed. (Cambridge: Polity Press, 2013), §§6.6, 6.8-6.9.

  1. Crispin Wright, "Truth in Ethics" in Brad Hooker, ed., 『Truth in Ethics』 (Oxford: Blackwell, 1996), p. 2. [본문으로]
  2. Ibid., p. 2. [본문으로]
  3. J. L. Mackie, 『Ethics: Inventing Right and Wrong』 (New York: Penguin, 1973), ch. 5. [본문으로]
  4. Wright, op. cit., p. 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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