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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형이상학이 무엇인지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 형이상학의 역사가 길다는, 그래서 여러 주제가 여러 방법론을 통해 다루어져 왔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면 대체 왜? 이 질문에 답하자면 형이상학적 탐구의 유래를 잠깐 짚어볼 필요가 있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형이상학metaphysics"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어떤 작업이 이루어지는가? 아리..
솔 크립키Saul Kripke는 『이름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에서 고유 명사proper names에 대한 프레게Gottlob Frege의 입장을 비판한다. 프레게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고유 명사는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 정도의 뜻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크립키는 우리가 고유 명사의 뜻을 그 고유 명사에 의해 지칭되기 위하여 만족시켜야 할 조건의 기술 - 한정 기술구defin..
『도덕 형이상학 정초』 제2절에서는 합리적 존재라면 누구나 따를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정언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자연 법칙을 따라 땅으로 떨어지는 야구공처럼) 그저 주어진 법칙을 따르는 게 아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적용되는 도덕 법칙을 입법legislate하는 목적의 왕국kingdom of ends의 시민이다. 이 입법의 과정에서 도덕적 주체를 스스로를 자율적인autonomous 존재..
『도덕 형이상학 정초』의 제1절은 도덕률에 대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갖고 있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그렇다고 제1절에 드러난 칸트의 논증이 귀납적인 것은 아니다. 칸트는 사람들이 실제로 법칙에 대한 존경심에 따라 행위한다는 관찰로부터 그러한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는 결론을 귀납적으로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1절의 논증은 만약 어떤 행위가 법칙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라면 그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는 식의 연역 논증이다. 누군가가 실..
"선의지good will를 제외하고서는 이 세상에서, 혹은 그 너머에서라도, 무제한적으로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생각 할 수 없다"(4:393).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제1절의 목표는 "평범한 인식common recognition을 분석하여 그것의 최상 원칙supreme principle을 규명하는 것"(4:392)이다. 그래서 칸트는 도덕적으로 좋은 행위는..
칸트가 보기에 이 세계의 합리적 질서란 우리가 경험을 통해 발견하는 것도, 오로지 순수 이성만을 통해 도달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구성하는 것이다.『순수 이성 비판The Critique of Pure Reason』은 바로 이론적인 - 앎을 통한 - 구성 작업의 일환이다. 그럼 실천적인 - 행위를 통한 - 구성 작업은? 의무론적 윤리학의 아빠,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
I 생리학적 작용으로서의 도덕 활동생리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노예 도덕]이 일반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 -노예 도덕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반작용이다. 고귀한 가치 평가 방식에서 사정은 정반대다 : 그것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한다.「도덕의 계보」 제1논문 10절 中니체는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에서 기독교와 기존의 도덕률 (그리고 그것들을 근거 짓는 서구의 오랜 형이상학적 전통)이 근본적인 수준에서 심각한 오류들을..
I 미와 숭고아름다움beauty과 숭고sublimity는 물론 적잖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 자체로 쾌pleasure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한 가지다. 쾌락sensation이나 도덕적 옳음moral rightness을 통해 쾌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쾌적한 것들을 지향하는 감각sense의 판단이나 선good을 향하는 이성의 논리적이며 규정적인determinate 판단이 전제되지 않는 것은 이런 맥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