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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 유명론 IV [트롭 이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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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 유명론 IV [트롭 이론]

동경 TOKYO 2017. 2. 3. 13:34

극단적 유명론austere nominalism메타언어적 유명론metalinguistic nominalism은 모두 구체적 개별자concrete particulars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트롭 이론은 구체적 개별자에 더해 추상적 개별자abstract particulars인 속성들attributes이 존재한다고 본다. 색상, 모양, 크기, 성품 등과 같은 속성들. 하지만 그들은 실재론realism과 달리 이 속성들이 반복적으로 예화될 수 있는 존재자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개별자이니까. 이런 점에서 트롭 이론trope theory은 유명론의 한 부류다.

따라서 두 개의 다른 구체적 개별자가 똑같은 하나의 속성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구체적 개별자 빨간 공은 빨강이라는 속성을 갖지만, 그 빨강은 다른 공이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두 개의 개별자가 하나의 속성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바로 이 개별자로서의 속성을 "트롭tropes"이라 부른다.

물론 두 개의 다른 공이 모두 빨간 색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들이 각각 질적으로 분별불가능한indiscernible 빨강의 속성을 갖기 때문이지, 수적으로 동일한identical 하나의 속성을 공유하기 때문은 아니다. "네 옷이랑 내 옷이랑 같네!" 이건 결코 옷이 하나라는 말이 아니다. 옷은 수적으로 두 벌이다. 하지만 두 벌의 옷은 질적으로 다르다.

트롭 이론 역시 유서가 깊다. 소수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트롭 이론(과 유사한 형태의 입장)을 받아들였다고 보기도 한다(Categories 2 1a20-1b9). 옥캄William of Ockham은 확실히 이 입장을 받아들인 것 같다. 뭐야, 이 양반은? 극단적 유명론, 메타언어적 유명론, 트롭 이론을 다 발아들이는 거야? 로크John Locke, 버클리George Berkeley, 흄David Hume 등 경험론자들도 이 이론과 유사한 입장을 펼치는 듯 보인다. 현대에는 스타우트G. F. Stout나 윌리엄스D. C. Williams, Keith Campbell 등이 트롭 이론을 주창했다.


왜 트롭 이론인가?

그들은 왜 트롭 이론을 내세우는가? 트롭이 개별자로서 존재하지 않는 한 색상이며, 냄새, 소리, 모양 등을 지각할 수 없다는 게 트롭 이론을 옹호하는 이들의 생각이다. 이게 없다면 경험적 지식의 원천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지각perception 뿐만이 아니다. 선택적 집중의 대상도 트롭이라 보는 편이 나은 것 같다. 가령 우리는 타지마할의 색상을 떠올릴 수 있다. 이때 우리가 하는 일은 극단적 유명론자들이 말하듯 타지마할이라는 구체적 개별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지마할의 어떤 속성, 색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타지마할의 색이 결국 보편자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지마할의 흰색을 떠올리는 사람은 단순히 흰색 일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타지마할이 갖는 바로 그 흰색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다. 트롭으로도 지각과 선택적 집중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굳이 보편자를 상정할 필요가 있는가?

그렇다면 속성 일치 현상에 대해 트롭 이론은 무어라 말하는가? 가령 타지마할의 색과 종이의 색이 비슷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타지마할과 종이가 갖는 트롭들의 유사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들은 그 유사성이 어딘가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트롭들의 유사성은 원초적primitive 혹은 분석불가능한unanalyzable 사실이다.

보편자를 지칭하는 듯한 술어들은? 트롭 이론은 보편자에 관한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은 사실 트롭에 관한 일반적 주장을 담은 문장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입장이 갈린다. (1) 옥캄과 같은 제거주의자들eliminationists은 가령 "지혜"라는 추상적 단칭 용어abstract singular terms를 포함한 문장이 지혜라는 보편자에 대한 말이 아니라, 지혜들이라는 트롭들에 관한 말이라고 주장한다. 추상적 지시체를 갖는 표현은 언어에서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그 표현들을 보편자를 지칭하지 않는 듯 보이는 표현들로 대체하기만 하면 되니까. 이들에 따르면 추상 단칭 용어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2) 하지만 어떤 트롭 이론가들은 추상 단칭 용어가 무언가를 가리키기는 한다고 본다. 바로 유사한 트롭들의 집합sets of resembling tropes을. 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집합? 그거 보편자랑 같은 거 아니냐? 물론 비슷한 측면이 있다. 보편자도 다수의 개별자에 의해 예화될 수 있고, 집합도 다수의 개별자를 원소로 삼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둘은 다르다. 집합은 그 동일성 조건이 명확하다. 집합 A의 모든 원소, 그리고 오직 집합 A의 원소만이 집합 B의 원소일 때, 집합 A와 집합 B는 동일하다. 한마디로 갖는 원소들을 갖는 집합들은 동일하다는 것. {x|x는 1과 3 사이의 자연수}와 {y|y는 1과 3 사이의 짝수}가 동일한 것은 이런 까닭. 하지만 보편자는 이런 식으로 동일성 조건을 정의할 수 없다. 같은 개별자들에 의해서 예화되는 보편자들이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인간임being a human being과 깃털이 없고 두 발로 걷는 짐승임being a featherless biped라는 두 보편자는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둘은 정확히 같은 개별자들에 의해 예화된다. 그렇다면 유명론자들도 얼마든지 집합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오직 구체적 개별자에 대해서만 얘기하고자 하는 극단적 유명론자들과 메타언어적 유명론자들은 집합 개념을 반기지 않겠지만.

트롭을 상정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가령 극단적 유명론은 어떤가? 극단적 유명론자들이 조금 "덜 극단적"이게 되어서 그들의 존재론에 집합 개념을 허용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들은 추상적 단칭 용어 'F-ness'가 F인 구체적 개별자들을 원소로 갖는 집합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집합의 동일성 조건을 고려할 때 극단적 유명론자들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실제로 심장을 가진 모든 것들은 신장을 갖고, 신장을 가진 모든 것들은 심장을 갖는다. 곧, 심장을 갖는 것들의 집합과 신장을 갖는 것들의 집합은 동일하다. 하지만 심장을 가짐과 신장을 가짐은 수적으로 동일한 보편자가 아니다. 트롭을 도입하면 이 문제가 해결된다. '심장을 갖는다'는 술어는 유사한 트롭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가령 내가 심장을 가짐my having a heart나 당신이 심장을 가짐your having a heart와 같은 트롭들의 집합을. 반면에 '신장을 갖는다'는 술어는 내가 신장을 가짐my having a kidney나 당신이 신장을 가짐your having a kidney와 같은 트롭들의 집합을 지칭한다. 두 집합은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두 술어의 비동일성이 설명된다.

정말 설명되나? 트롭 이론은 어떤 술어를 개별자에게 붙이는 것이 곧 그 개별자가 관련된 집합에 속한 트롭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는 문장의 참을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어떤 트롭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들먹인다는 것. 이때 소크라테스는 아무 트롭이나 가져서는 안 된다. '지혜롭다'는 술어가 가리키는 유관한 집합에 속한 트롭을 가져야 한다. 어떤 트롭이 그런 트롭인가? 트롭 이론은 이 지점에서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트롭은 그저 존재한다. 어떤 것에 의해서 그와 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혜 트롭은 그냥 지혜 트롭이다. 색상 트롭은 그냥 색상 트롭이고.

트롭 이론은 메타언어적 유명론과도 대조적이다. 메타언어적 유명론은 추상적 지시체를 갖는 듯 보이는 표현들을 담은 문장이 기실 언어적 표현, 곧 말에 관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굉장히 반직관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는 말이 그저 "'소크라테스'라는 명사에 '지혜롭다'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다"는 말이라고? 트롭 이론은 이에 반대한다. "소크라테스가 지혜롭다"는 말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속성, 곧 非언어적 존재자에 관한 것이다.


문제점

① 집합 개념이 문제가 된다. 서로 다른 추상 단칭 용어에 대응하는 집합이 동일한 경우가 있다. 그 집합들이 공집합null set일 때. 그렇다면 이는 이들 추상 단칭 용어가 기실 동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낳는다. '유니콘unicorn'과 '용dragon'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충족되지 않는 용어다.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참이 아니지 않은가? 유니콘과 용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트롭 이론에 따르면 추상 단칭 용어는 트롭들의 집합이다. 곧 '유니콘임being a unicorn'과 '용임being a dragon'이라는 표현의 지시체는 공집합이다. 그렇다면 두 표현은 동일한 표현인가?

트롭 이론의 옹호자들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참이 아닌 표현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이 반론을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그 어떤 개별자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는 트롭은 없다는 것. 그 어떤 개별자에 의해서도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는 없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 반론은 오직 그 어떤 개별자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는 트롭이 있다고 보는 "플라톤주의적" 트롭 이론가들에게나 통하는 반론이다.

② 또 집합이 문제다. 집합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그 원소를 필연적으로 갖는다는 것이다. S={a, b, c}라고 해보자. S의 원소가 하나 빠지거나 S에 또 다른 원소가 하나 들어오면, S는 더 이상 S가 아니다. 집합의 동일성은 그 원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가? 말하자면 어떤 집합이 자신의 원소가 아닌 다른 것을 원소로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순간 더 이상 그 집합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버리니까. 그런데 트롭 이론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용감한 것은 그가 유관한 집합 S의 원소인 한 트롭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용감한 사람이 용감하지 않게 되거나 용감하지 않던 사람이 용감하게 되면 그 집합은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된다. 이제는 소크라테스가 집합 P의 원소인 한 트롭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집합 P는 용기에 대응하는 집합이 아니다. 허면 소크라테스를 용감하다고 부를 수 없는 것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오직 지금 용감한 사람들이 용감할 때, 그러면서도 지금 용감하지 않은 사람은 계속 용감하지 않은 상태로 머무를 때, 바로 그 때에만 용감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트롭 이론은 가능 세계possible worlds 개념을 끌어들여 이 반론을 벗어나고자 시도할 수 있다. 용기에 대응하는 집합의 원소는 실제 세계actual world에 존재하는 용기 트롭들만을 원소로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용기 트롭들을 원소로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감한 사람이 용기를 잃거나 용감하지 않던 사람이 용감해지더라도 집합 S는 여전히 S가 된다. 애초에 S의 원소는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용기 트롭을 원소로 삼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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