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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의 문제 I: 캠벨의 자유의지론 본문

논문과 원전

자유의지의 문제 I: 캠벨의 자유의지론

형이상학적 찐따 2014.12.11 01:03

캠벨C. A. Campbell의 자유의지론libertarianism

The "nature" of the self and what we commonly call the "character" of the self are by no means the same thing, and it is utterly vital that they should not be confused. (p. 388)

양립불가능론자 캠벨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는다고 믿었다. 물론 그는 인간이 습관habits이나 성향dispositions과 같은 성품character 갖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러한 성품은 자아self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 자아는 성품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위는 바로 이 자아에서 비롯된다.


I 예비적 고찰

캠벨이 관심을 갖는 자유란 도덕적 책임moral responsibility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그는 논의를 발전시키기에 앞서 이 같은 자유가 갖는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① 자유롭게 의지한다는 것은 외적 행위overt acts가 아니라 내적 행위inner acts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외부적 행위에 대해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그것이 내면적 행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내면적 행위를 취할 수 없는 로봇이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다.

②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위 주체가 그 행위의 유일한 입안자sole author여야만 한다. 만약 자아 외부에서 그 행위가 취해지도록 한 다른 요인들이 있다면 자아는 그 행위에 대한 부분적 입안자part-author가 되며 따라서 도덕적 책임 역시 덜 지게 된다. 물론 유전적 요인이나 사회적 여건이 우리의 선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범죄자가 아무리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더라도 그가 한 행위를 "의지"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③ 행위자는 그가 실제로 취한 행위와는 다른 행위를 취할 수도 있었어야 한다. 물론 성인군자같은 사람이 남을 돕는 것을 보고서 우리는 "저 사람은 저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라는 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칭찬하는 것은 현재 그가 남을 돕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성품을 계발하기 위한 행위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로크John Locke나 무어G. E. Moore, 찰스 스티븐슨Charles Stevenson과 같은 철학자들은 이 보다 약화된 가언적hypothetical 조건을 제시한다. '행위자는 만약 그가 행위의 시점에 다른 행위를 취하기를 원했더라면 그가 실제로 취한 행위와는 다른 행위를 취할 수도 있었어야 한다.' (윌리엄 로위William L. Rowe 교수가 "로크的 자유"라는 용어로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자유가 결정론과 양립가능함을 암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의지한대로 행위할 수는 있어도 다른 무언가를 의지할 수가 없다면? 그래도 행위자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가? 캠벨은 여기에 더해 어떤 사람 X의 도덕적 책임에 관한 논의에서 'X의 성품 등이 달랐더라면'과 같은 조건은 완전히 무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X의 성품 등이 달랐더라면 그 사람은 이미 현재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 X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이 조건은 정언적categorical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캠벨 "리드的 자유"를 채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II 자유의지주의

그건 그렇고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설사 어떤 그른 행위가 행위자의 통제에서 벗어난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 그리고 그것을 고려해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가능하더라도 - 여전히 그 행위가 바로 그 행위자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는 것 같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 캠벨은 "상식Common Sense"를 참고하자고 제안한다. (이 "상식"이란 말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왜 캠벨은 이 일반 명사를 대문자로 썼을까? 캠벨이 말하는 "상식"이란 어떤 의미의 상식일까?) 그가 보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이 유전적 요인이나 사회적 여건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린 사람 X와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 Y는 분명히 다른 성품을 갖게 될 것이다. 때문에 이 두 사람이 같은 정도의 도덕적 노력moral effort을 기울이더라도 실제로 나타나는 행동은 다를 수 있다. 이것은 두 사람의 행동이 완전히 똑같은 경우 X보다 Y가 정도의 도덕적 노력을 덜 기울였음을 뜻한다. 둘 모두 똑같이 폭행을 저질렀을 때 우리가 X에 대해 비교적 덜 비판적일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은 유전적 요인이나 사회적 여건에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성품과는 독립적으로 도덕적 노력을 기울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게 자아다. 바로 이 자아는 I에서 언급된 종류의 자유의지를 갖는다는 것이 캠벨의 생각이다. (그런데 성품과 독립된 자아라는 것이 있긴 있는 걸까? 캠벨은 여기서 다소 의심스러운 형이상학적 전제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례로 불교 철학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증거"란 이렇다. '증거'라는 말을 이런 데다 갖다 붙여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의지하는 것은 내면적 행위이다. 그러니 겉으로 봤을 때는 그것을 관찰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오로지 그 내면적 행위를 직접 행함으로써만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가? 우리의 성품을 거스를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캠벨은 "이러한 확신이 사실은 그저 자기기만self-delusion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는 그냥 넘어간다. 이게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한데?

이어서 그는 결정론을 공격한다. "이론적으로는theoretically" 결정론자들의 논증에 설득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듯) "실천적으로는practically"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실천적인 믿음이 이론적인 믿음에 무릎 꿇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결정론자들은 "현상학적 분석phenomenal analysis"을 너무 경시한 것이 아닌가? 캠벨의 이런 지적은 분명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결정론이 반드시 옳다고는 볼 수 없다'라는 약한 주장에 머무른다. '결정론은 틀렸다'라거나 '자유의지주의가 옳다'와 같은 강한 주장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얘기다. 가령 결정론자들은 이렇게 받아칠 수 있다. 이론적인 믿음이 실천적인 믿음에 무릎 꿇어야 할 이유는 있는가? 당신의 "현상학적 분석"이 옳은지도 의심스럽지만, 그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는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만약 캠벨이 일종의 이원론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라면 - '현상학적'이란 말을 '본체적'이란 말에 대비되는 것으로 사용한 것이라면 - 결정론자들의 비판을 어느 정도 피해갈 방도가 있다. 자유의지를 현상계에서만 논의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여전히 캠벨은 현상계에서 결정론이 성립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positively 증명해야만 한다.)


III 예상되는 두 가지 반론 그리고 그에 대한 재반박

[반론 ①] 자유의지주의는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을 결여하고 있다. 만약 결정론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 그리고 자유의지주의가 옳다면 -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란 얘기다. 가령 스포츠 잡지나 탐독하던 친구가 내일 갑자기 헤겔의 저서를 독일어 원전으로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위자가 성품과는 완전히 추상된 자아를 갖는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습관과 성향에 무관하게 행위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캠벨은 술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친구가 내일 갑자기 위스키"에 미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인가?

캠벨이 보기에 이것은 오해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 A와 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드는 일 B가 충돌하는 경우에 자유의지가 어떤 식으로 기능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A와 B가 충돌하지 않는 경우는 굉장히 많다.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동일하다는 말은 아니다.) 스포츠 잡지를 보는 것이 도덕적 의무와 충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눈 앞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도 잡무언가지만 읽고 있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가 내일도 여전히 스포츠 잡지를 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사실 이때 친구는 단순히 스포츠 잡지에 대한 그의 욕망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포츠 잡지를 읽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발현한 것이다.) 하지만 친구가 벤치에 앉아 스포츠 잡지를 읽고 있는데 우연히 심각한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그냥 무시하고 스포츠 잡지를 마저 읽을 것인가? 분명 스포츠 잡지를 읽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쓰러진 사람을 돕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물론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 가령 다 큰 어른이 배고파 죽겠다고 투덜거리는 것을 발견했을 때 - 그냥 무시하고 스포츠 잡지를 읽고 싶다는 욕망을 따를 수도 있다.

우리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과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일들에 의해서 우리가 취할 가능성이 있는 행위에 어느 정도의 제한이 가해진다. 모든 사건이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언제 어떤 행위를 취할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행위의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는 "변덕caprice"가 아니며 사회적 삶은 "카오스"가 아니다.

[반론 ②] 도대체가 성품과 완전히 추상된 자아라는 것이 무엇인가? 행위자가 무슨 이유로 도덕적 노력을 기울이거나 기울이지 않는지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캠벨이 말하는 자유의지란 완전히 "이해 불가능한unintelligible" 것이다.

캠벨은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밝힐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이해가능성은 두 가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만약 어떤 행위가 이해가능하다는 것이 곧 연역적으로 추론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행위란 이해불가능한 것이 맞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어느 정도의 범위 내에서는 예측이 가능하지만 정확히 어떤 행위가 취해질 것인지를 필연적으로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유의지주의를 버리는 것과 같다. 캠벨은 이해가능성이 이런 의미로 해석되는 한에서는 자신의 이론이 행위에 대한 이해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을 선선히 인정한다. 하지만 이해가능성이 행위에 의미meaning를 부여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될 때 문제는 조금 더 심각해진다. (이 '의미'라는 말이 이 맥락에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건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캠벨은 이 '의미'가 대체 뭘 의미하는지 명확히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캠벨은 이러한 반론이 "유의미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을 외부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 유의미함을 드러내야만 한다"(p. 387)고 가정하고 말한다. 만약 이 가정을 따라 의지한다는 것이 곧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본다면, 자아에서 비롯되었다고 일컬어지는 행위에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옳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어떤 것을 의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관찰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의지의 행위가 주관적 활동subjective activity인 이상 그 행위를 외부 관찰자가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만 간주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논문의 초반부에서 지적했듯 의지의 행위는 내면적 경험inner experience을 통해 파악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정론자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의지하는 바로 그 행위자의 시점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외부 관찰자의 시점만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정론자들은 "그 본성상 자유의지를 드러낼 수가 없는 매체를 통해서 자유의지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자유의지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단언한다!"(p. 388) 한마디로 우리는 모두 자유의지가 있다고 느끼는 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캠벨의 대응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는 앞서 말한 "자기기만"의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 자유의지에 대한 "현상학적" 경험만으로 그의 논변을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논의를 현상계에 한정시킨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상계에서도 인간의 행위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캠벨의 주장은 증명되기는 커녕 치밀한 논변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현상학적 분석"이란 것에 너무 안일하게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캠벨은 자아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비철학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현상적이고 내면적인 행위 및 경험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곧바로 자아의 존재를 추론해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은 이미 흄David Hume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물론 한편의 논문에서 이러한 용어들을 모두 명확히 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심리철학적 개념을 다루다보면 이율배반antinomy의 문제에 빠지기도 한다는 점 역시 캠벨 스스로도 잘 인식하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그가 은연중에 기대고 있는 형이상학적 전제들에 대한 의구심을 철회해 줄 수는 없다. (물론 캠벨에 대한 우호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그는 "상식"에 비추어 볼 때에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이 상식을 언어의 일상적 용법이라고 본다면 어떨까? 우리는 일상에서 행위나 의지의 자유에 대해 언급할 뿐만 아니라 자유로움과 자유롭지 않음을 구분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불가지론을 내세우는 형이상학자들은 자유와 관련된 어휘들의 새로운 용법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점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것은 "이해가능성"이 캠벨이 언급한 두 가지 의미로만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습관과 성품으로부터 독립된 자아의 존재 여부에 대해 충분히 회의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회의가 정당하다면 그것의 사유가능성conceivability을 부정할 여지 또한 없지 않다. "이해가능성"은 바로 이 '사유가능성'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캠벨의 자아는 이해불가능하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존 롤즈John Rawls에 대한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우연적으로 주어진 속성attributes을 거세당한"[각주:1] 자아를 상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정당한가? (이후에 롤즈는 샌델이 자신의 주장을 오해했다고 말한다.[각주:2] 나는 롤즈의 탁월한 대응을 높이 평가하지만 동시에 그의 자아관이 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본다. 이 문제란 것이 샌델이 지적한 것과 같은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캠벨, 그는 정말로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발버둥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행위란 앞선 상태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오는 것이거나 완전한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들을 그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철학자 중에는 칼 지넷Carl Ginet[각주:3]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From phenomenological analysis of the situation of moral temptation we find that the self as engaged in this situation is inescapably convinced that it possesses a freedom of precisely the specified kind, located in the decision to exert or withhold the moral effort needed to rise to duty where the pressure of its desiring nature is felt to urge it in a contrary direction. (p. 389)


리뷰 논문

C. A. Campbell, "Has the Self "Free Will"?," [1967] in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ed., Beginning Metaphysics: An Introductory Text with Readings (Blackwell Publishers, 1998): 376-389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안건훈 "자유의지와 결정론: 양립가능론자와 양립불가능론자의 논쟁," 김성재, 정인재 편, 『논쟁과 철학』,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 353-374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Freedom and Responsibility," in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ed.,Beginning Metaphysics: An Introductory Text with Readings (Blackwell Publishers, 1998): 358-374

William L. Rowe, "Two Concepts of Freedom," Proceedings and Addresse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Association 61(1) (1987): 43-64

Harry G. Frankfurt, "Freedom of the Will and the Concept of a Person," The Journal of Philosophy 68(1) (1971): 5-20

Susan Wolf, "Sanity and the Metaphysics of Freedom," [1987] in Ferdinand Schoeman, ed., Responsibility, Character and the Emotions: New Essays in Moral Psych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46-62


  1.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p. 93 [본문으로]
  2. (1985) "Justice as Fairness: Political not Metaphysical," 『Philosophy & Public Affairs』 14(3): 223-251 [본문으로]
  3. "Might We Have No Choice?," in Keith Lehrer, ed., 『Freedom and Determinism』 (New York: Random House, 1966): 87-10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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