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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실증주의와 에이어의 검증주의적 의미론

동경 TOKYO 2016. 4. 23. 14:23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는 철학이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사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유의미한 진술과 무의미한 진술을 엄격히 나누는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 입장으로 멀게는 경험주의자 버클리George Berkeley와 흄David Hume, 가깝게는 프레게Gottlob Frege와 러셀Bertrand Russell에 그 사상적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뿌리와 잎을 잇는 역할을 한 것은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로 대표되는 전기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다.


I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의 논제 중 논리 실증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모든 실질적 명제substantive propositions는 - 그것이 참이라면 - 후험적a posteriori으로 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이런 얘기가 나올까?

모든 명제는 (상호 독립적인) 요소 명제elementary propositions를 연결사로 이어 만든 것이다. 요소 명제들은 다시 이름들names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들은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원초적 기호다. 이름들은 대상objects에 대응하고, 요소 명제는 이 대상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조합되어 있는 사태state of affairs에 대응한다. 이 사태들의 결합이 바로 명제에 대응하는 사실facts이다.

언어

세계

이름

대상

요소 명제

사태

명제

사실

언어와 세계 사이의 1:1 대응 관계를 염두에 두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4.01 명제는 현실reality의 그림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와 세계는 같은 형식 - 논리적 형식 - 을 공유한다. 1:1 대응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도, 언어로 세계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4.121 (…) 명제는 현실의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을 보여준다show. 명제는 그것을 드러낸다display.

4.5 명제의 일반적 형식은 이런 것이다: 이것이 사물들이 서 있는stand 방식이다.

그래서 요소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이 요소 명제를 이루는 이름들이 지칭하는 대상들이 그 명제 내에서 이 이름들이 결합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대상 a와 b를 지칭하는 이름 A와 B가 특정한 방식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명제 P가 참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a와 b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실질적 명제와 그것을 이루는 요소 명제의 진리 조건이 세계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명제만을 보고서는 그 진리값을 알 수가 없다.

2.224 그림[실질적 명제]만을 보고서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225 선험적a priori으로 참인 그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험적으로 참인 명제는 실질적 명제가 아니라 그저 동어반복tautologies일뿐이다.

6.1 논리학의 명제들은 동어반복이다.

6.11 그러므로 논리학의 명제들은 아무것도 말하지say 않는다. (논리학의 명제들은 분석적 명제들이다.)

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가? 논리학의 명제들은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문장, 연결사, 술어, 양화사 등의 논리적 어휘가 가리키는 대상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이런 논리적 어휘들은 의미론적 값을 갖지 않는다.

4.0312 "논리적 상항"은 무언가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내 기본적인 생각이다.

4.441 "논리적 대상logical objects"이란 없다.

그저 사실만이 있을 뿐. 그런 점에서 논리적·수학적 명제들은 무의미sinnlos/senseless하다. 그래도 논리적 명제들은 논리적 형식을 보여준다. 말은 않아도 무언가 보여드리겠습니다!

2.172 그림은 그 표상의 형식을 표상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보여준다.

그래서 명제들은 모두 (1)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선험적 분석 명제이거나 (2) 경험적으로 혹은 후험적으로 알 수 있는 무언가를 말하는 명제다. 그 외의 것은? 그러니까 분석적 선험 명제도 아니고 후험적 종합 명제도 아닌 것들은? 그냥 명제가 아니다. 윤리적 명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6.42 윤리학의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6.421 윤리학을 낱말들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윤리학적 명제는 그냥 헛소리unsinnig/nonsensical[각주:1]다.


II 논리 실증주의

『논리철학 논고』는 말하자면 유의미성의 기준을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논리 실증주의는 대체 어떤 진술이 유의미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규명하면 철학적 탐구의 범위 역시 분명하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유의미와 무의미를 나누는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 기준의 통과 여부로 진술이 유의미한 것인지 무의미한 것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

논리 실증주의자의 대표 주자 알프레드 에이어Alfred J. Ayer는 이런 맥락에서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은 알 수 없는 것의 본성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의 본성에 놓여 있음을 보이는 것이 바로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의 기여"이며 "형이상학자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그가 유의미한 진술을 하고자 한다면 지켜야 할 규칙을 위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각주:2] 한스 한Hans Hahn 역시 비슷한 생각이다. "관찰로 감각가능한 세계를 뚫고서 "참된 존재자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모든 형이상학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가능한 까닭은 그 작업이 인간의 사유 능력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워서가 아니라 무의미해서다. 이는 형이상학적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 모두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관한 우리의 합의를 위반하면서까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각주:3]

그리하여 논리 실증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유의미성의 기준을 제시한다. 문장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1) 선험적 생각, 그러니까 오로지 문장의 뜻에 의해서 참이 되는 - 분석적인 - 생각을 표현하거나 (2) 후험적 생각, 그러니까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verifiable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 검증가능하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III 검증주의 원칙

후험적 명제의 검증가능성verifiability에 대해 에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에 관한 진술로 보이는 것들의 진정성을 검사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기준이 바로 검증가능성의 기준이다. 명제가 어떤 사람에게 사실적으로 유의미factually significant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그 사람이 문장이 표현하고자 하는 명제를 검증하는 방법을, 달리 말하자면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어떤 관찰을 해야 그 명제를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거짓인 것으로 내치게 될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반면, 만약 주어진 명제가 참이라는 혹은 거짓이라는 가정이 그가 미래에 겪게 될 경험의 성질에 대한 그 어떤 가정과도 일관성을 이루는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적어도 그에게 이 명제는, 동어반복이 아닌 이상, 그저 사이비 명제pseudo-proposition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런 생각도 표현하지 않는 명제]에 불과하다. (…) 질문과 관련해서도 그 절차는 동일하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어떤 관찰이 우리로 하여금 질문에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대답하게끔 해줄 것인지 물어본다. 만약 그 어떤 관찰도 우리로 하여금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있게끔 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해당 문장이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는 진정성 있는 질문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그 문법적 외양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생각을 표현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더라도 말이다.[각주:4]

문장이 반드시 평서문declarative일 필요는 없다. 의문문interrogative 등 다른 형태의 문장들도 검증주의의 칼날을 벗어날 수 없다. 심적 상태에 관한 진술도 마찬가지다. 의도에 관한 문장은 오로지 그 의도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그러한 행위들이 경험적으로 관찰가능할 때에만 유의미하다.

검증가능성은 정확히 언제 성립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① 실천적 검증가능성practical verifiability과 원칙적 검증가능성verifiability in principle 사이의 구분과 ② 강한strong 검증가능성과 약한weak 검증 가능성 사이의 구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문장이 나에 대해 실천적 검증가능성을 가지려면 내가 스스로를 그 문장을 검증하기 위한 충분한 관찰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위치시킬 수 있는 실천적 수단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내 자신을 "이 사과가 빨갛다"라는 문장을 검증하기 위한 충분한 관찰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위치시킬 수 있는 실천적 수단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과가 빨갛다"라는 문장은 내 입장에서 실천적으로 검증가능하다. 반면 원칙적 검증가능성은 내가 내 자신을 그러한 처지에 위치시킬 실천적 수단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해당 문장을 검증하기 위해서 어떤 관잘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처지에 있어야 할 것인지를 이론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면 성립한다. "태양계를 제외하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계에 토끼가 있다"라는 문장은 원칙적으로 검증가능한 문장이다. 에이어는 원칙적 검증가능성을 채택한다.

강한 검증가능성은 경험을 통해 해당 문장이 반드시 참이라는 것을 보일 수 있을 때에 성립하는 반면에 약한 검증가능성은 해당 문장이 경험을 통해 참일 개연성이 높음을 보일 수 있을 때에 성립한다. 에이어는 약한 검증가능성을 채택한다. 오로지 어떤 문장의 참을 결정적으로 보증할 수 있을 때에만 검증가능성이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는 너무 많은 명제들이 검증가능하지 않거나 검증가능하더라도 - 우리가 결정론의 진리값을 알 수 없는 한 - 그것이 검증가능한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가령 과학적 일반화를 통해 얻은 "물질은 가열하면 팽창한다"라는 문장은 유의미하지만 우리의 관찰은 이 문장이 거짓인 세계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진술이 유의미한지 - 검증가능한지 - 검토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은 "이 문장의 진리값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내게 있는가?"가 아니라 "이 문장의 진리값과 유관한 관찰이 논리적으로 가능한가?"다.

하지만 여전히 검증가능하다는 것의 의미가 완벽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관찰이 어떤 문장의 진리값과 유관하다는 건 - 관찰을 통해서 어떤 문장을 검증할 수 있다는 건 - 그 관찰이 그 문장의 참에 대한 증거evidence가 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증거가 된다는 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가?

실제적 혹은 가능적 관찰을 기록하는 명제를 경험적 명제experiential proposition라고 부르자. 허면 우리는 진정한genuine [유의미한] 사실적 명제factual proposition의 특징이 - 그것이 하나의 혹은 유한히 많은 경험적 명제와 동치라는 점이 아니라 - 그저 특정한 몇몇 전제들 [보조 가설들]을 가지고는 연역해낼 수 없는 어떤 경험적 명제가 그 전제들과 [검증의 대상이 되는] 사실적 명제의 연연conjunction으로부터는 연역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5]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라는 사실적 명제 H를 검증할 수 있는 증거는 "적색편이 현상이 일어난다"라는 경험적 명제 O가 될 수 있다. 보조 가설 I와 H의 연언으로부터 O가 연역되기 때문. 그러면서도 I만으로는 O를 연역해낼 수 없다. 그래서 O는 H에 대한 증거가 된다. 달리 말해 (H&I)→O)&~(IO)가 참이라면 O H의 증거가 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 같은 원칙은 굉장히 터무니 없는 가설도 검증가능하다는 귀결로 치닫는다. 보조 가설 I에 대한 어떤 제약 조건도 없기 때문이다. 가령 I를 "이데아가 존재한다면 오늘 비가 내린다"로 둔다면 우리는 오늘 비가 내리기만 하면 얼마든지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가설 H를 검증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 비가 내린다"는 경험적 명제 OI만으로부터 연역되지는 않지만 H&I로부터는 연역되지 않는가?

에이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적 검증가능성direct verifiability와 간접적 검증가능성indirect verifiability의 개념을 도입하고, 어떤 진술이 사실적 의미를 지니려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검증가능해야 한다는 수정원칙을 제시한다. 그러면 직·간접적으로 검증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진술은 스스로가 곧 관찰 진술observation statement이거나, 하나 이상의 다른 관찰 진술만으로부터는 연역되지 않지만 이러한 전제들[보조적 관찰 진술]들과 스스로의 연연으로부터는 연역되는 관찰 진술이 최소 하나 있을 때에 직접적으로 검증가능하다.[각주:6] 

위의 반례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가설 H도 관찰 진술이 아니고, 관찰 진술 O를 단독으로 연역해내지는 못하지만 H와 함께 O를 함축하는 보조 가설 I - "이데아가 존재한다면 오늘 비가 내린다" - 도 관찰 진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HI 둘 중에 적어도 하나는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진술이어야 한다는 것. 에이어는 직접적 검증가능성의 개념을 통해서 간접적 검증가능성 개념을 규정한다.

어떤 진술이 간접적으로 검증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그 진술은 다른 전제들만으로부터는 연역되지 않는 하나 이상의 직접적으로 검증가능한 진술을 이 다른 전제들과의 연언을 통해서 함축entail해야 한다. 둘째, 이 다른 전제들은 모두 분석적이거나, 직접적으로 검증가능한 것이거나, 간접적 검증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독립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각주:7]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가설 H는 간접적으로도 검증가능하지 않다. 물론 이 가설과 특정 보조 가설의 연언으로부터 - 그 자체가 관찰 진술이라는 점에서 - 직접적으로 검증가능한 진술 "오늘 비가 내린다"가 연역된다. 그러나 이 보조 가설 "이데아가 존재한다면 오늘 비가 내린다"는 분석적이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검증가능하지도 않고, 간접적으로 검증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독립적으로 보일 수도 없다. 역시 보조 가설 I가 검증에 적절치 않다는 것.

그런데 이마저도 반례에 부딪힌다. 지친다… 검증주의를 포기하는 게 빠르겠다… 알론조 처치Alonzo Church는 에이어의 수정된 검증주의 원칙도 여전히 지나치게 많은 진술들을 사실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한다.[각주:8]

S = (~O1&O2)∨(~H&O3)

O1, O2, O3는 각각 서로 논리적으로 독립된 관찰 명제진술들이고 H는 "이데아가 존재한다"라는 진술이다. 처치는 에이어의 원칙에 따르자면 S가 직접적으로 검증가능하다는 것을 보인 뒤에 H가 간접적으로 검증가능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서 에이어의 검증주의론을 비판한다.

O3 O1만으로부터 연역되지는 않지만 O1&S O3를 연역적으로 함축한다. [명제논리의 형식적 도출] S - 그 자체로 관찰가능하지는 않지만 - 관찰가능한 명제와의 연언을 통해 관찰가능한 전제를 함축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검증가능하다.

S는 그 자체로 O2를 함축하지 않지만 S&H는 (그 자체가 관찰 진술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검증가능한 O2를 함축한다. 간접적 검증가능성의 첫번째 성립 조건이 만족된 것. 거기다 S는 직접적으로 검증가능한 진술이기 때문에 - 비록 그것이 분석적이거나 간접적 검증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독립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 두번째 성립 조건도 만족된다. 결국 에이어의 수정된 검증주의 의미론도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진술이 최소한 간접적으로는 검증가능하다는 귀결을 피할 수 없다.


리뷰 텍스트

Alexander Miller, Philosophy of Logic 2nd ed. (New York: Routledge, 2007), §§3.1-3.2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D. F. Pears & B. F. McGuiness, trans. (New York, Routledge, 2001)

  1. "어불성설"이라고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2. A. J. Ayer, ed., 『Logical Positivism』 (Glencoe, IL: Free Press, 1959), p. 11. [본문으로]
  3. Hans Hahn, "Logic, Mathematics, and Knowledge of Nature" in Ibid., p. 159. [본문으로]
  4. A. J. Ayer, 『Language, Truth, and Logic』 (New York: Dover Press, 1946), p. 35. [본문으로]
  5. Ibid., pp. 38-39. [본문으로]
  6. Ibid., p. 13. [본문으로]
  7. Ibid. [본문으로]
  8. "Review of Ayer『Language, Truth, and Logic』," 『Journal of Symbolic Logic』 14 (194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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