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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짤

데카르트의 마음은 투명한가?

동경 TOKYO 2014. 11. 25. 23:51

내가 보고, 듣고, 온기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결코 거짓일 수 없다. (제2성찰 7:29)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마음이 투명하다고 믿었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은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고통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건 그러니까 말이 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이런 생각이 얼마간의 직관적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를 반박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도 도대체 "가족의 품이 그리운 건지 아니면 제대로 된 음식이 그리운 건지" 헷갈려 하는 유학생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이제 우리는 프로이트Sigmund Freud 덕분에 굳이 프로이트까지 가지 않고도 데카르트의 이른바 심성心性 투명성 논제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의식 몰라? 무의식?"같은 말이나 반복하며 그의 사상과 그것이 지니는 철학사적 의의를 등한시하는 것은 상투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노잼인데 유익하지도 않다는 얘기다.

위험하다? 그것은 일면 투명하다는 말이 대체 무엇인지를 따져보지도 않고서 투명과 불투명을 따지고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투명하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가? 정수기 광고도 아니고…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먼저 짚어둬야 할 것은 데카르트가 정신에 관한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보고, 듣고, 온기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분명"하지만, 내가 실제로 보고, 듣고, 온기를 받고 있는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다. 데카르트 스스로가 인정하듯,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잠에 빠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정신은 같은가?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데카르트만큼 지독하게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철학자도 드물다. 심지어 그는 2+3=5라는 수학적 명제가 참인지도 확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수학적 계산을 할 때마다 장난기 많은 악마가 자신을 속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악마가 바로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악령Cartesian Demon'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가 2+3=5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도 2+3=5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믿는다는 것만은 절대로 거짓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음이 투명하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 내가 [나의 관념들ideas을] 다른 무언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자체로 사유하는 한이 관념들은 결코 거짓된 것일 수 없다. () 의지와 감정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거짓되지는 않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가령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이 사악한 것이라거나 실재하지 않는 것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욕망한다는 것은 여전히 참이기 때문이다. (제3성찰 7:37)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거짓일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여전히 참이다.' 데카르트가 말한 마음의 투명성을 잘 표현해주는 이 문장은 그러나 거꾸로 읽을 수도 있다. '자신이 무언가를 믿고 있다는 것은 참이지만, 자신이 믿고 있는 바로 그것이 거짓일 수 있다.' 마음이 어떤 상태를 갖는지는 알아도,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기분이 좋다는 건 확실한데 신이 내 마음에 행복을 불어넣어 주셨는지 내가 뽕에 취한 건지 알게 뭐야?" 그러니까 데카르트가 마음이 투명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오로지 그 내면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마음의 안쪽을 들여다 보면 그 내용을 파악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마음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데카르트가 말한 마음의 투명성이란 이렇게 제한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마음은 투명한가?' 라는 질문은 이제 '데카르트의 마음은 얼마나 투명한가?'와 '데카르트의 마음은 어디까지 투명한가?'라는 두 개의 질문으로 나뉘어져야 한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완전히"이겠고, 두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딱 거기까지만" 정도가 될 것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데카르트의 심성 투명성 논제는 물론 첫번째 질문과 관련된 것이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론을 철저히 밀고 나가면서도 끝끝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만큼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철학의 제1원리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마음에 관한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선히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흐려지지 않고 흐려질 수도 없는 마음 한 조각을 지킬 수 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오히려 그의 회의를 거치고 나서 더욱 견고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이 고집스런 회의를 견딜 수 있는 가장 견고한 이 명제만이 남았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회의주의는 애초에 방법적인 것이었다. 끝없는 의심을 거듭하고도 남을 수밖에 없는 진리를 찾아내기 위한 방법. 데카르트는 한편으로 마음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투명하다는 것을 너무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가 이러한 사실을 딛고 서지 않았다면 아마도 철학의 제1원리를 도출하기란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를 회의주의자보다는 차라리 교조주의자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데카르트가 정말로 교조주의자였는지를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적어도 그가 내세운 이 철학의 제1원리가 오늘날까지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인류의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기실 마음에 의해 정초된 자아self를 손에서 내려놓은 철학자는 (특히 서구에서는) 극히 드물다. 무의식의 세계를 도입하며 우리가 우리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프로이트조차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결국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우리'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 아닌가? 어찌됐든 심기가 불편한 유학생이 있긴 있는 것이다.

투명한 마음 따위는 없다는 말은 이제 그야말로 상식이 되어버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 자아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식의 비판을 되풀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데카르트의 마음이란 다른 무엇이 아닌 존재하는 마음이니까. 심성 투명성 논제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데카르트를 함부로 비웃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위험할 수 있는 또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생각하는 나'는 정말로 무의식 앞에서 부셔졌는가? 혹시 그는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에서 다만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서 등장해왔던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앞에 두고 우리는 눈 감을 수 없다.


여느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 역시 후대 철학자들의 열띤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비판의 유형이며 방법이야 무수히 많지만, 여기서는 '데카르트의 마음은 투명한가?'라는 질문을 둘로 나뉘었던 것처럼 그 비판 역시 두 갈래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에 '마음은 얼마나 투명한가?'에 대한 데카르트의 대답에 반기를 든 프로이트 등이 있었다면, 다른 한편에는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고민을 거듭했던 칸트, 헤겔, 무어G. E. Moore 등이 있었다. 물론, 이들이 이 철학적 작업에 뛰어든 마지막 철학자들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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