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어쩌다 1인 시위는 알바가 되었을까? 본문
과외를 해도 시간당 3만원을 벌기가 쉽지 않은 요새 시급 2만원이라니? 솔깃하다. 그런데 어째 알바 내용이 좀 희한하다. 1인 시위 알바?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알바를 보고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나 역시 이 알바를 처음 접했을 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돈이 급해도 이 알바는 왠지 하기 싫다. 근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분명히 어떤 문제는 있을 터다. 그러나 그 문제가 이 알바에 있을까?
시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다. 그런데 워낙 바쁘다보니 시위를 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다. 아침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학교며 회사로 나가는 날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도대체 무슨 여유가 있어서 시위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국가의 주인인 우리가 표현하고 싶은 뜻과 의견이 있는데도 그저 침묵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1) 시간을 내서 시위를 하거나 (2) 나의 시간을 쏟지 않고서도 정치적 견해를 드러낼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밖에 없다. 나는 (1)은 괜찮은데 (2)는 괜찮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하겠다.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동의한 것이라면 말이다. 꼭 자기 시간을 써야 되는 건가? 1그럼 밥도 직접 논농사 지어서 먹어야겠네? 정말로 두 번째 방법에 해당하는 1인 시위 알바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이런 걸 돈으로 사서는 안 된다며 목에 핏대를 세울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근데 "이런" 것이 도대체 뭔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못에 핏대 세워봤자 변하는 건 혈압밖에 없다. "이런" 것의 구체적인 예를 들더라도 여전히 불충분하다. 일례로 성sex은 어떤가? 성을 돈으로 사면 안 된다고? 왜? 근데 시간은 마음껏 사고 팔아도 되나? 돈을 주는 대가로 가족과의 저녁 시간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남에게 돈을 주고서 내가 쉴 시간을 마련해도 되느냐 말이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돈을 대가로 시간을 팔면서 혹은 시간을 대가로 돈을 지불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감정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대가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할 기회까지 박탈당한다. 그런데 감정 노동을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걸까? 이건 돈으로 사도 되는 건가? 이건 되지만 저건 안 된다고 얘기하려면 그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그 기준도 없이 이런 일은 해도 되고 저런 일은 하지 말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꼰대나 씹선비가 되기 싫으면… 왠지 반감을 일으키는 1인 시위 알바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아예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문제가 이 알바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1인 시위 알바로부터 모종의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사면 안 되는 것what we should not buy을 돈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살 수 없는 것what we cannot buy을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서 억지로 사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알바를 시켜도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1인 시위에서 중요한 것은 그저 메시지의 전달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체험이다. 바쁜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는 간절함을 느껴보는 일, 현장에서 상대측과 대중의 반응을 살피는 일, 내 자신이 주인인 이 나라를 조금이라도 움직여보기가 이토록 힘들다는 것을 느껴보는 일 말이다. 이런 체험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 1인 시위 알바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도, 시간도, 감정도 모두 마찬가지다. 물론 돈을 지불하고서 얻을 수 있는 효용도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 소중한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 오로지 나만이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에의 침잠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그 무언가는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함으로써, 소중한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스스로 나의 감정을 반추해봄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날 이 세계에는 이런 것들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팽배한 걸까? 만물을 수량화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무언가를 돈으로 사려면 일단 그 무언가에 가격표가 붙어있어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가 직접 1인 시위에 참여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진솔한 체험에 무슨 수로 가격을 붙인다는 말인가? 인류는 이 진솔한 체험의 질적 측면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1인 시위'라는 서비스에는 시간당 2만원이라는 가격이 붙는다. 특히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온갖 것에 이런 식으로 가격표가 붙었다. 수십 년 전에는 사고 팔 수 있을 거라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물건들에도 말이다. 가격표가 붙어있다는 건 곧 판매중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것을 다 살 수 있다." 1인 시위 알바를 보고서 씁쓸했다면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려드는 짓에 대한 안타까움 말이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을 하려든다면 그것은 당연히 "억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폭력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자신이 살 수 없는 것까지도 살 수 있으며 실제로 사고 있다는 오해에 빠뜨리고, 이 세계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진실을 좇는 동시에 가격표 달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배제하며, 배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미끼로 스스로에게 가격표를 붙이도록 종용한다. 자본주의를 뒤엎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렇다 할 만한 대안도 없지만 진짜 문제는 자본주의 그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수량화에 대한 광적인 집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기실 모든 것을 수량화시키려는 움직임은 최근에 들어서야 등장한 것이 아니다. 아도르노의 말대로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가령 희생제의는 어떤가? 여기에는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고서 무언가를 얻어내겠다는 계산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희생제의는 한마디로 신과의 거래다. 합리적인 거래는 반드시 동등한 것들끼리의 거래여야 한다. 그리고 양자가 동등한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단하려면 먼저 양자를 수량화해야 한다. 덕분에 인류는 '처녀 다섯 명=전쟁 승리' 혹은 '소 아홉 마리=가뭄 끝' 따위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질적으로 다른 두 대상 사이에 양적 동일성을 나타내는 등호를 삽입하는 일, 이것은 수리 과학으로 세계의 이모저모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근대 초기의 "계몽"과 너무도 닮아 있지 않은가?
1인 시위 알바 모집 공고를 통해 나는 이 "계몽"의 어두운 얼굴을 보았다. 그러니까 문제는 분명히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문제는 1인 시위 알바에 있지 않다. 1인 시위마저 알바가 되는 세계와 그 세계를 떠받드는 사고 방식에 있다. 1인 시위 알바가 문제를 낳는 게 아니다. 문제 상황이 1인 시위 알바를 낳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1인 시위 알바의 문제가 아니라 1인 시위 알바를 가능케 했던 문제, 그리고 1인 시위 알바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문제에 대해 말해야 한다. 정말이다. 돈을 주고 1인 시위를 시키면 안 된다며 비난할 마음은 추오도 없다. 다만 시간당 2만원을 주더라도 1인 시위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체험은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히 하고 싶다. 알바를 쓰든 말든 결국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1인 시위가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별 차이가 없다는 데에도 동의할 수 없다. 어떤가? 1인 시위 알바를 보고 있자니 불편한가? 그러나 알바를 쓰면 안 된다기보다는 쓰더라도 제대로 알고 쓰자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시급과는 맞바꿀 수 없는 무엇이 있음을 알고 쓰자고 말이다. 그런 다음에야 - 그리고 그것이 특별한 해악을 가져오지 않는 이상 - 1인 시위 알바를 무슨 수로 트집잡겠나? 트집 잡아서도 안 되지만 트집 잡을 수도 없다.
계몽을 꿈꾸었던 위대한 사상가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계몽을 추구했던 것은 잘 한 번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더 나은 세계 속에서 말이다. 그래도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 "억지로" 하면 위험해진다. 자본주의의 폭력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더 나아가서는 인류 문명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수가 틀리면 신화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던 계몽 이전의 어두운 시대로 역행할지도 모를 일이다. 신화가 이미 계몽이었다는 문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도르노는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가 되었다."
- 오늘날 한국에서 '시위'라는 말은 유독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 같다. 아마도 군사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이 지나치게 탄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당시 시위를 하던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이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① 물리적인 폭력은 시위를 하려면 반드시 상당한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시위를 함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이 과대평가되면서 오늘날 한국의 시민들은 시위에 참여하기를 꺼리거나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 같다. ② 여론 몰이를 통한 부정적 낙인 찍기는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이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의 형성에 기여했다. 당시 주로 쓰이던 수법은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자들이 사실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남한에 혼란을 야기하려는 속셈을 가진자들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위는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법과 도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행해진다면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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