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논제 본문
언어학자 돌이는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쓰이는 언어 L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위해 현장 답사를 떠난다. L의 모든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하 수 있는 번역 매뉴얼translation manual을 만드는 것이 목표. 물론 올바른 매뉴얼을 만드는 게 목표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L이 영어라면 "Water is fluid"라는 문장을 "물은 액체다"로 번역할 수 있는 그런 매뉴얼은 옳지만, 이걸 "물의 본질을 담고 있는 물질은 액체다"로 번역하는 건 옳지 않다. 하지만 콰인은 이게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어떤 번역 매뉴얼이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매뉴얼이 다른 매뉴얼에 비해서 더 유용하고, 더 자연스럽고, 더 간단하고, 더 세련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실용적인pragmatic 관점에서의 비교일 뿐이다. 어떤 게 올바른지를 결정하는 준거로서의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indeterminacy of translation 논제다.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논제는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에 대한 그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의미에 대한 희의론으로 이어진다. 번역이란 것이 뭔가? 한 언어의 문장들을 다른 언어의 문장들과 짝짓는 일이 아닌가? 그럼 번역이 올바르다는 건 뭔가? 짝지어진 문장들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 아닌가? 그럼 번역 매뉴얼이 올바르다는 것은 그것에 의해 짝지어진 모든 문장들의 쌍이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두 문장의 의미가 같은지 다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사실이 없다면, 문장의 의미란 것도 없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문장이 의미란 것을 가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임의의 두 문장이 갖는 의미가 같은지 다른지 알아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두 언어적 표현의 동의성synonymy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면 그 어떤 표현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번역 불확정성 논제에 따르면 번역과 관련된 모든 가능한 증거에 합치fit되지만 서로는 양립불가능한 두 번역 매뉴얼 T1과 T2를 구성하는 것이 최소한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니까 "Water is fluid"라는 문장을 "물은 액체다"로 번역하는 매뉴얼 T1과 "물의 본질을 담고 있는 물질은 액체다"로 번역하는 매뉴얼 T2는 서로 양립불가능하지만 - 하나가 옳다면 다른 하나는 옳을 수 없지만 - 둘 다 주어진 증거들과 모두 합치한다는 것. 우리는 물론 T1과 T2 중 어느 하나를 버리고 다른 것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하나가 옳은 것으로 판명나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실용적인 이유에서다. T1을 따르면 훨씬 더 문장을 짧게 쓸 수 있으니까 T1을 취한다거나…
사실 번역 불확정성 논제에 대한 콰인의 논증은 "아래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below"와 "위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above"로 나뉜다. 둘이 정말로 별개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는 위로부터의 논증이 아래로부터의 논증과 독립적인 논증으로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논증만 소개하기로 한다.
일단 콰인이 논하고자 하는 번역은 원초적 번역radical translation이다. 번역 매뉴얼을 만들기 위해서 참고할 수 있는 증거는 오직 언어 L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뜻이다. 사전도 없고, 누가 만들다 만 번역 매뉴얼도 없다. 이 원주민들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도 전혀 없다. 그저 L의 발화자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원초적 번역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콰인이 한 가지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기준으로서의 사실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 사실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일 것이라는 전제를 말이다. 직관적으로 보면 어떤 표현의 의미는 약정convention에 의해 구성되는 것 같다. "물"이 불이 아니라 물을 의미하는 이유는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 모종의 약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약정은 그냥 뚝딱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이 약정의 내용에 부합하는 행동를 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때문에 콰인은 행동에 관한 사실들은 어떤 번역 매뉴얼이 올바른 것인지를 확정짓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번역 불확정성 논제를 뒷받침하고자 한다. 완전히 다른 두 번역 매뉴얼 T1과 T2가 (그리고 정확히는 무한한 수의 논리적으로 가능한 번역 매뉴얼들이) 모두 행동에 관한 특정한 사실과 일관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위한 매뉴얼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설정될 수 있다. 이때 모든 매뉴얼은 발화 성향speech dispositions와 양립가능하며, 그런 동시에 서로 서로는 양립불가능하다. 1
원초적 번역을 시도하는 돌이에게 어떤 매뉴얼의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증거는 오직 자극 의미stimulus meaning뿐이다. 언어적 행동은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언어적 행동은 이미 그 자체로 의미론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데, 지금 시도하고 있는 작업이 이미 의미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극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문장에 대한 승인assent으로서의 감각적 자극(=긍정적 자극 의미affirmative stimulus meaning)과 어떤 문장에 대한 반대dissent로서의 감각적 자극(=부정적 자극 의미negative stimulus meaning)의 순서쌍이다. "Water"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미국인에게 물을 가리키면서 "Water?"라고 물어봤을 때 돌아올 반응과 불을 가리키면서 "Water?"라고 물어봤을 때 돌아올 반응을 생각해보면 쉽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승인이나 반대를 할 때 어떤 기호를 사용할까?
그 [번역자]는 어떻게 원주민들의 승인과 반대 표현을 보거나 들었을 때 그것이 승인과 반대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제스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터키 사람들의 제스처는 우리 것 [미국인들의 제스처]와는 거의 반대다. [어떤 나라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 들여지는 제스처가 다른 나라에서는 모욕적인 의미의 제스처로 받아 들여진다는 얘기다.] 번역자가 해야 할 일은 관찰을 통해 추측guess하고, 그의 추측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보는 것이다. 가령 토끼가 그 자리에 분명하게 있는 경우 "가바가이gavagai?"라고 질문을 했을 때, 혹은 다른 것이 그 자리에 분명하게 있는 경우 그에 따라 다른 질문을 했을 때, "에벳"과 "요크"라는 답변이 워낙 자주 돌아와서 그게 "예"와 "아니오"라는 말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고 생각해보자. 하지만 아직도 "에벳"과 "요크" 중 무엇이 "예"이고 무엇이 "아니오"인지는 모른다. 이어서 번역자는 원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어떤 언명pronouncements을 할 때 그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실험을 해본다. 만약 그가 꽤 규칙적으로 "요크"가 아니라 "에벳"이라는 답변을 듣는다면, "에벳"이 "예"라고 받아들일 이유가 더 커진다. 그리고 나서 번역자는 원주민이 말할 때 마다 "에벳"와 "요크"라고 말해보고 반응을 지켜본다. 어떤 말을 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더 잠잠한serene 경우라면 그것이 "예"일 가능성이 더 커진다. 물론 이런 방법들이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유용한 가설을 세울 수는 있다. 만약 이런 일련의 시도들이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하면 이 언어학자는 해당 가설을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비슷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와 "아니오"를 번역하는 일부터 벌써 "결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돌이는 원주민들이 토끼가 근처에 있을 때면 "요, 가바가이"라는 표현에 대체로 승인의 표현을 보낼 준비가 된 반면에 토끼가 근처에 없을 때는 "요, 가바가이"라는 표현에 반대의 표현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언어 L에서 "요, 가바가이"라는 표현이 갖는 자극 의미와 한국어에서 "토끼가 있네"라는 표현이 갖는 자극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인이 "토끼가 있네"라는 표현에 대해서 이러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러이러한 반응을 보이고, 저러저러한 상황에서는 저러저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어민들도 "요, 가바가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이러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러이러한 반응을 보이고, 저러저러한 상황에서는 저러저러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 이를 근거로 돌이는 "요, 가바가이"는 "토끼가 있네"로 번역된다고 번역 매뉴얼에 쓴다.
그런데 "토끼가 있네"가 정말 제대로 된 번역일까? 혹시 "요, 가바가이"는 "해체되지 않은 토끼 몸뚱아리가 있네"가 아닐까? 물론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요, 가바가이"와 "해체되지 않은 토끼 몸뚱아리가 있네"도 자극 의미는 똑같다. 토끼가 있으면 해체되지 않은 토끼 몸뚱아리가 있고, 해체되지 않은 토끼 몸뚱아리가 있으면 토끼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번역 매뉴얼을 만들기 위해 돌이가 참고할 수 있는 증거는 오직 자극 의미뿐이다. 따라서 "토끼가 있네"와 "해체되지 않은 토끼 몸뚱아리가 있네" 중에서 어떤 것이 올바른 번역인지 돌이는 확정지을 수 없다. 다른 번역도 마찬가지다. "토끼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있네"도, "토끼의 본질을 담고 있는 개별자가 있네"도, "토끼 모양을 한 존재자가 있네"도 모두 "요, 가바가이"와 동일한 자극 의미를 갖는다.
물론 콰인도 우리가 실제로는 이 많은 번역들 중에 무엇을 고를지 몰라서 헤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번역을 결정하는 일이 "요, 가바가이"라는 표현의 의미에 관한 사실에 근거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선택을 한다면 그건 오로지 실용적 기준을 참고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뿐. 자극 의미에 관한 사실은 "요, 가바가이"에 대한 모든 번역을 동등한 정도로 정당화한다. 이 사실만 따지고 본다면 모든 번역이 동등한 수준으로 수용가능하다는 것.
혹자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돌이는 용케 지시 대명사 "이것"과 "저것"에 해당하는 말과 동일성 술어 "-는 …와 같은 것이다"에 해당하는 말을 알아냈다. 돌이는 원주민에게 어떤 질문을 함으로써 "가바가이"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토끼의 꼬리를 손가락으로 가라킨 다음, 그 토끼의 귀를 가리키면서 "것이 가바가이와 것저 가바가이는 은같 다이것?"(=이 가바가이와 저 가바가이는 같은 겁니까?)하고 물어봤을 때 "에벳"이라는 답변 - 이건 이미 승인의 표현임이 밝혀졌다고 가정한다 - 이 돌아온다면 "가바가이"는 "토끼"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볼 수 없다. 콰인이 보기에 이런 반론은 이미 언어 L의 "은같 다이것?"에 대한 올바른 한국어 번역이 "같은 토끼입니까?"라고 미리 가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만약 이런 가정이 참이라면 "것이 가바가이와 것저 가바가이는 은같 다이것?"이라는 질문의 올바른 한국어 번역은 "이 가바가이와 저 가바가이는 같은 토끼입니까?"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에벳"이라면 물론 "가바가이"는 "토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은같 다이것?"의 올바른 번역이 "같은 토끼입니까?"가 아니라 "같은 토끼가 차지하는 공간입니까?"라거나 "같은 토끼 모양을 한 존재자입니까?"라면 어떤가? 그래도 여전히 "것이 가바가이와 것저 가바가이는 은같 다이것?"에 대한 원주민들의 반응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올바른 번역은 확정될 수 없다. 3
리뷰 텍스트
Alexander Miller, Philosophy of Logic 2nd ed. (New York: Routledge, 2007), §§4.6-4.7, 4.9
- W. V. O. Quine, 『Word and Object』 (Cambridge, MA: MIT Press, 1960), p. 27. [본문으로]
- Ibid., pp. 29-30. [본문으로]
- 콰인의 의미 회의론은 의미가 있더라도 우리는 끝끝내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의 인식론적 회의론이 아니다. 번역 불확정성 논제의 핵심은 번역자가 출발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출발어의 의미를 확정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근거로서의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사 번역자가 출발어를 모국어로 삼는 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기에 이상적인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 자극 의미에 대한 이상적인 수준의 인식론적 접근권access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 올바른 번역을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 콰인의 생각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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