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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인: 경험주의의 두 독단 비판

동경 TOKYO 2016. 4. 26. 12:42

콰인W. V. O. Quine은 "경험주의의 두 독단Two Dogmas of Empiricism"라는 논문에서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가 받아들이고 있는 두 가지 도그마 - 분석성의 개념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다는 생각(§§1-4)과 환원주의(§§5-6) - 를 비판함으로써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이 구분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I 분석과 종합 사이의 구분?

그 누구도 분석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칸트의 분석성 개념 비판

먼저 콰인은 『순수이성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에 나타난 칸트의 설명을 검토한다. 칸트에 따르면 "분석적 진술이란 주어 개념에 이미 개념적으로 들어 있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무언가를 주어에 귀속시키지 않는 진술"[각주:1]이다. 그런데 콰인은 분석성analyticity에 대한 칸트의 설명에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① "개념적으로 들어 있"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지 불분명하다. 이 말은 그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념적 포함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 한 분석성analyticity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② 분석 명제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오직 주어와 술어만 있는 문장에만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목적어가 있지만 분석 명제로 보이는 것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가령 "나는 내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을 먹고 있다I am eating what I am eating"와 같은 문장은 분석적인 것 같다. 이 문장의 참은 오로지 그 뜻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칸트는 이 문장이 왜 분석적인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칸트는 분석적 명제를 "부정하면 모순이 따라나오는" 것으로 정의하기도 하는데 역시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칸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모순은 어떤 것인가? 아마도 P&~P처럼 통사론적으로 모순되는 경우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여자다"라는 문장은 분석적 명제인 것 같지만 그것의 부정문인 "우리 엄마는 여자가 아니다"가 통사론적으로 P&~P의 형태를 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순을 통사론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규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콰인은 칸트의 이런 설명이 "미흡한 설명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분석성의 정의하기 위해서 다소 넓은 의미의 자기 모순의 개념은 분석성 개념 그 자체 만큼이나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개념[분석성과 자기 모순성]은 수상쩍은 동전의 양면이다."[각주:2]


프레게의 분석성 개념 비판

이어서 콰인은 프레게의 설명을 비판한다. 프레게에 따르면 분석 명제는 (1) 그 자체로 논리적 법칙logical law - 논리적 어휘들을 제외한 다른 어휘들에 대한 모든 가능한 해석에서 참인 문장 - 이거나 (2) 논리적 법칙과 더불어 오직 정의definitions만을 전제로 삼아서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X하지 않은 Y는 X하지 않다"의 형식을 가진 문장은 논리적 법칙이므로 - X와 Y의 의미론적 값이 무엇이든 이 문장은 참이 될 것이기 때문에 - 분석적이다. "모든 겸손하지 않은 학생은 겸손하지 않다"나 "모든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결혼하지 않았다"와 같은 문장이 이런 경우. 이러한 논리적 법칙과 어떤 표현의 정의의 연언으로부터 따라나오는 문장 역시 분석적이다. 가령 총각을 정의하는 문장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가 논리적 법칙인 "모든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결혼하지 않았다"와 만나면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도출 될 수 있다.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문장이 분석적인 까닭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듯 보인다.

콰인은 이것 역시 분석성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정의에 대한 제약 조건이 없기 때문에 엉뚱한 귀결에 빠질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어 "철학자는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라는 정의와 "모든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논리적 법칙으로부터 우리는 "모든 철학자는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인데, 이게 분석적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 같다. "모든 철학자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문장은 그 뜻만 보고서 진리값을 알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니까 말이다. 퍼뜩 떠오르는 해결책은 분석 명제가 (1) 그 자체로 논리적 법칙이거나 (2) 논리적 법칙과 더불어 오직 올바른 정의만을 전제로 삼아서 도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철학자"를 "결혼하지 않은 남자"로 정의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것은 올바른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올바른 정의는 또 뭔가? 정의항과 피정의항이 동의적synonymous일 때 정의가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자"와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동의어가 아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철학자"의 올바른 정의가 될 수 없다. 반면 "총각"과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같은 지시체를 같기 때문에 동의어라고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 문제 해결?

아직 멀었다. 두 표현이 동의어가 되려면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가? 의미[意]가 같은[同] 말[語]이니까 의미론적 값이 같으면 된다? 좋은 시도다. 하지만 의미론적 값이 같다고 꼭 동의어로 볼 수 없는 표현들도 있다. 예를 들어 심장을 가진 동물을 지칭하는 "cordate"와 신장을 가진 동물을 지칭하는 "renate"라는 표현들은 같은 지시체를 갖는다(=의미론적 값이 같다). 그럼에도 두 표현이 동의어라고 말할 수는 없어 보인다. 실제로 "All cordates are renates"라는 문장은 참이지만 그 뜻만 가지고서는 그것이 참이라는 걸 알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이들 두 표현의 의미론적 값이 달랐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장은 있지만 심장은 없는 동물이나 심장은 있지만 신장은 없는 동물들이 사는 세계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달리 말하자면 두 표현이 같은 의미론적 값을 갖는 것은 우연일 뿐이라는 것. 실제 세계에서 어떤 두 표현이 동일한 의미론적 값을 갖는다고 이유만으로 양자 사이에 동의성synonymy이 성립한다고 보기 힘든 이유가 이것이다. 동의성은 필연성을 요청하는 듯 보인다.

A와 B의 의미론적 값이 필연적으로 같다면 A와 B는 동의어다. A와 B가 동의어라면 A를 B로 정의하는 것은 올바르다. 모든 해석 아래에서 참인 논리적 법칙과 A에 대한 올바른 정의의 연언으로부터 도출한 문장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떤 문장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콰인은 대답은 이렇다. 어떤 문장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말은 그 문장이 분석적이라는 말에 불과하다.

도대체 우리는 ["필연적으로"라는 말]을 포함한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부사에 정말로 뜻이 있는가? 이 부사에 뜻이 있다고 본다는 것은 곧 우리가 "분석적"이라는 것의 뜻도 이미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 우리는 뭘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각주:3]  

분석성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올바른 정의 개념을 들여왔다. 그런데 올바른 정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동의성 개념을 도입해야 했다. 막상 동의성 개념을 설명하자니 필연성 개념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필연성의 의미는 결국 분석성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근데 분석성은? 망했어요.

우리가 분석 명제라 생각하는 것도 대부분은 기실 분석 명제가 아니다. 설사 그 명제를 이해하더라도 그 명제만 보고서는 그 진리값을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라는 문장을 보고 우리가 이 문장이 참이라는 것을 곧장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문장을 담고 있는 언어 체계를 이미 얼마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순수한 합리성만으로 이 문장의 진리값을 아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분석과 종합이 분명히 구분될 수 없다는 콰인의 주장은 얼핏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문장이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결론으로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폴 그라이스Paul Grice와 피터 스트로슨Peter Strawson의 말처럼
만약 두 문장이 동의적이라고 말하는 게 무의미하다면, 애초에 문장이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한 것 같다. 왜 그런가? 만약 문장이 의미를 갖는다는 혹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면, 추측컨대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도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문장에 대해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말이 된다면, 두 문장이 동의적이라는 말은 대강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문장이 동의적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한 문장에 대해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오는 참된 대답이 다른 문장에 대해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오는 참된 대답과 같다는 것이다. (…) 만약 우리가 두 문장의 동의성 개념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포기해 버린다면, 우리는 문장의 의미 개념 (문장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의 개념) 역시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버려야 할 것이다.[각주:4]
간단히 줄이자면 이런 것이다. 문장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두 문장의 동의성도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콰인에 따르면 두 문장의 동의성은 정의할 수 없다. 따라서 - 후건 부정에 의해 - 문장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II

콰인은 이어서 검증주의적 의미론을 비판한다. 검증주의에 따르면 어떤 진술의 의미는 그것을 경험적으로 검증하는 방법에 있다. 때문에 두 문장이 동의적이란 건 곧 두 문장을 경험적을 검증할 방법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프레게의 분석성 개념을 빌려오자면) 그 자체로 논리적 법칙인 명제 - 그러니까 모든 해석 아래에서 참인 명제 - 는 분석 명제다. 그런데 분석 명제는 다른 한편으로 오직 그 뜻만을 파악해서 진리값을 알 수 있는 명제이기 때문에 분석 명제와 똑같은 뜻을 가진 명제도 역시 분석 명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명제도 뜻만 보고 진리값을 알 수 있는 명제일 것이니까. 그러므로 검증주의적 의미론에서 분석 명제는 (1) 그 자체로 논리적 법칙이거나 (2) 논리적 법칙과 동의적인 명제다. 논리적 법칙은 모든 해석 아래에서 참이기 때문에 경험적 검증이 필요 없다. 논리적 법칙과 동의적인 명제 역시 경험적 검증을 필요로 하지 않을 거다. 적어도 검증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말이다. 어떤 경험이 주어지든 참인 것으로 검증될 수 있는 명제, 그게 바로 분석 명제다.

그러나 콰인은 분석 명제가 경험의 심판tribunal of experience을 피해갈 수 없다고 본다. 우리의 경험이 분석 명제까지도 확증confirm하거나 반증disconfirm할 수 있다는 것. 분석 명제가 경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오직 경험에 의한 확증 혹은 반증이 개별 진술들에 대해 고립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정 하에서만 옳다. 콰인은 이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참이라고 믿고 있는] 외부 세계에 대한 진술들은 개별적으로individually가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덩어리로서 감각 경험의 심판대에 오른다."[각주:5] 이게 바로 콰인의 인식론적 총체주의epistemological holism의 핵심이다. 모든 유의미한 진술들은 집합적으로en masse 경험의 심판을 받는다. 하나가 심판을 받고 내려오면 그 다음에 다른 것이 심판대에 올라가는 식이 아니다.

우리가 설명하기 곤란한 경험recalcitrant experience - 기존에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들과 충돌하는 경험 - 을 하게 되면 우리는 기존의 믿음들을 수정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때 우리가 수정하지 못할 믿음은 없다. 무엇을 수정하거나 버리고, 무엇을 유지할 것인지는 오로지 실용적 기준pragmatic standards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걸 버리면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경험들도 설명할 수 있다거나 더 적은 수의 공식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에 따라서 말이다. 분석 명제도 고치거나 버리는 게 실용적이라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논리학이나 수학적인 명제들까지도.

전체 과학은 마치 경험에 의해서 그 경계선이 결정되는 역장a field of force과 같다. 주변부에서 경험과의 충돌이 일어나면 이 역장의 내부에서 재조정readjustments이 일어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술들의 일부에 대해 진리값을 재할당해야 한다. 몇몇 진술들을 재평가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진술들도 재평가하게 된다. 그들이 논리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논리적 법칙logical laws라는 것도 결국 이 체계 안에 있는 특정한 진술들, 이 역장의 특정한 구성요소에 불과하다. (…) 하지만 그 전체 역장의 경계선이 경험에 의해 워낙 불확정적underdeterminate으로 결정되어서 어떤 하나의 [우리의 믿음 체계에] 반하는 경험을 마주했을 때 어떤 진술을 재평가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그 선택의 폭latitude이 꽤 넓다.[각주:6]

그 어떤 진술도 합리적 수정rational revision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검증주의 의미론과 완전히 배치된다. 검증주의에 따르면 분석적으로 참인 명제는 어떤 경험이 주어지더라도 참이다. 사실적 의미factual significance를 갖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콰인이 보기에는 그딴 거 없다 경험의 심판대에 오르지 않을 수 있는 명제란 없다.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의 경계가 흐려진다.

(…) 경험에 따라 성립하는 종합 진술과 어떤 경험이 주어지든 성립하는 분석 진술 사이의 경계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된다. 모든 진술이 어떤 경험이 주어지더라도 참인 것으로 유지될 수 있다. 우리가 체계 내의 다른 곳에서 충분히 많은 재조정을 한다면 말이다. 주변부에 아주 가까운 진술조차도 설명하기 곤란한 경험이 주어졌을 때 참인 것으로 유지될 수 있다. 그 경험이 환각이라고 말하거나 논리적 법칙이라 불리는 몇몇 특정 진술들을 수정함으로써 말이다. 이런 점에서 반대로 그 어떤 진술도 수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배중률 조차도 양자 역학을 단순화하기 위해 수정되었다. 배중률을 수정한 일이 케플러가 프톨레마이오스를, 아인슈타인이 뉴턴을, 다윈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밀어낸 일과 원칙적으로 뭐가 다르단 말인가?[각주:7]


리뷰 텍스트

Alexander Miller, Philosophy of Logic 2nd ed. (New York: Routledge, 2007), §§4.1-4.2, 4.4

  1. W. V. O. Quine, "Two Dogmas of Empiricism" in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53), pp. 20-21. [본문으로]
  2. Ibid., p. 20. [본문으로]
  3. Ibid., p. 30. [본문으로]
  4. Paul Grice & Peter Strawson, "In Defense of a a Dogma," 『Philosophical Review』 65(2) (1956): 141-158. [본문으로]
  5. W. V. O. Quine, op. cit., p. 41. [본문으로]
  6. Ibid., p. 42. [본문으로]
  7. Ibid., p. 4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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