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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은 도덕적 주장을 정당화하는가? 본문

논문과 원전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은 도덕적 주장을 정당화하는가?

동경 TOKYO 2016. 5. 15. 19:54

I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의 우선성

어떤 도덕적 주장을 옹호하거나 비판할 때 어떤 사례에 대한 직관intuition에 호소하는 방법은 윤리학에서 매우 흔한 논증 방법이다. "야, 공리주의자! 너희들 말이 맞다면 5명 살리려고 1명 배 갈라도 되는 거야?" 직관이 도덕적 주장에 대한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매우 강력한 증거 혹은 반증이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는 여러 사례들에 대한 직관적 판단에 꽤나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또 의존한다.

하지만 이것을 직관 對 일반적 원칙general principles의 대립, 가령 공리주의적 원칙과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죽이는 사례의 대립으로 설정해서는 곤란하다. 우리의 직관은 개별 사례만을 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반적 원칙에 대해서도 직관을 갖고, 그 직관에 따라 해당 일반적 원칙이 지지받거나 위협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행복의 총량을 증진해야 한다"거나 "자신을 죽음이나 심각한 부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직관적으로 그럴듯해 보인다. 반대로 "상당한 수준의 쾌락을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원칙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직관적으로 그럴듯한 원칙도 얼마든지 특정 사례에 대한 직관과 부딪힐 수 있다. 이 충돌이 발생할 때 우리는 보통 일반적 원칙에 대한 직관이 아니라 특정 사례에 대한 직관의 손을 들어준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일반적 원칙에 비해 직관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원칙에 대한 직관에 비해 특정 사례에 대한 직관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곧, 이 대립은 직관 對 직관이다.

그런데 우리는 직관에 호소하는 방법을 아주 많이 사용하면서도 우리가 왜 그렇게 하는지도,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은 특히 두 번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case specific intuitions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혹자는 우리가 특정 사례에 대한 호소에 의존하는 것은 "그저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 한 우리의 다양한 믿음 - 그리고 믿고자 하는 경향 - 전부에 의존해야 한다는 보다 일반적인 인식적 정책을 반영"(46)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냥 유독 특정 사례에 대한 직관이 옳다는 식의 자신감을 우리가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진화론적인) 설명을 요하는 사실이긴 하지만, 정당화를 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의 대응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에 의존하는 방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제로 그 직관이 (대개) 옳다는 자신감을 갖는다는 심리학적 사실 외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은 우선성을 부여 받아 마땅한가?


II 경험적 관찰을 통한 유비

케이건은 윤리학에서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을 경험 과학에서 개별 사례에 대한 관찰observation의 유비analogy를 통해 검토한다.

윤리학

경험 과학

직관

관찰 

일반적 도덕 원칙

일반적 자연 법칙

"우리는 그저 관에 든 액체가 붉은 색으로 변하거나 계기판의 바늘이 3을 가리킨다는 것을 - 즉각적으로, 그리고 대개 별다른 생각없이 - 본다. 우리는 이 관찰들에 호소함으로써 어떤 이론을 지지하고, 이 관찰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이라면 무엇이든 거부해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심지어 (…) 그 자체로 볼 때 직관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이론조차도 우리의 경험적 관찰에 의해 제시된 증거와 모순된다면 거부될 것이다. 물론, 모든 관찰이라고 거부될 수 있다. (…)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가 관찰에 중요성을 아예 부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할 수는 없다. 또, 대개 우리는 어떤 일반적인 경험 이론를 계속 옹호하는 것보다는 관찰에 대한 판단을 유지하는 데에 훨씬 더 큰 우선성을 부여한다"(47).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저 어떤 행위가 옳거나 그르다는 것을, 혹은 누군가가 약속을 했다는 사실이 도덕적으로 유관하거나 하지 않다는 것을 - 즉각적으로 그리고 대개 별다른 생각없이 - 본다. 적절한 도덕 이론이라면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하며, 이러한 직관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직관은 언제나 반론에 부딪히거나 거부될 수 있다. (…) 하지만 도덕적 직관에 중요성을 아예 부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별로 그럴듯하지 않다. 또, 대개 우리는 어떤 일반적인 도덕적 원칙을 계속 옹호하는 것보다는 직관에 대한 판단을 수용하는 데에 훨씬 더 큰 우선성을 부여한다"(47).


한 가지 차이점이 있긴 하다. "경험적 관찰의 경우에 우리는 관찰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다. 시각적 관찰은 눈에 의존하고, 청각적 관찰은 귀에 의존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 경험적 관찰은 제대로 기능하는 감각 기관의 존재에 의존한다. 반면, 도덕적 경우에는 어떻게 "관찰"에 대응하는 것 - 도덕적 직관 - 이 가능한지 전혀 분명하지 않다. 감각 기관에 대응하는 "도덕적 감각moral sense"라는 것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 다양한 감각 기관들 자체의 존재는 한 번도 의심받은 적이 없다. (…) 반면, "도덕적 감각"에 대한 논의는 그저 실체 없는 것에 대한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다. 도덕적 직관을 내놓는다고 가정된 기관, 그 존재를 추론해볼 수도 있는 그 무언가, 그러나 그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그것에 대한 논의다. 그리고 (…) 이것은 회의주의에 대한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어쩌면 그런 기관 [도덕적 감각]은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품게 한다"(48).

윤리학

경험 과학

도덕적 감각?

감각 기관

그러나 케이건은 이 차이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 같다. "이 위협이 얼마나 심각한가? 사실, 이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 어쩌면 감각 기관에 대응하는 도덕적 기관(들)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다양한 직관을 가지며 이 직관들을 [도덕적 주장을 출력하기 위한] 입력값input으로 삼는다. 경험적 관찰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이들 직관을 설명하고 또 우선성을 부여하면서 말이다. (…) [그런 다음에야] 그냥 도덕적 감각을 처음부터 상정하는 것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 우리가 이 기관의 구조나 내적 작용에 대해 추가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가정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48). 이제 문제는 도덕적 직관을 산출하는 기관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직관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도덕적 직관을 신뢰할 이유를 갖는가? 도덕적 직관이 신빙성 있는 것이라는 믿음은 정당화되는가? 케이건은 이 지점에서 또 유비를 사용한다. 관찰이 일반적으로 신빙성을 갖는다는 믿음이 정당화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1) 그저 우리가 이들 발견을 - 즉각적으로, 그리고 별다른 생각없이 - 믿어야 한다는 강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을 거부할 좋은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 그것들을 (계속해서) 수용하는 것이 합당하다"(49). 한마디로 우리의 직관에 대해 회의주의적인 시선을 던질 이유가 굳이 없다는 것. (2) 우리가 관찰을 설명할 수 있는 전반적으로 매력적인 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이론은 몇몇 관찰들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관찰은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인다. 임시방편적인 요소를 덕지덕지 붙인 이론이 아니라 간단하고 설명력이 높은 이론으로 우리의 관찰을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의 관찰은 믿을 만하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우리의 관찰이 믿을 만하다는 말은 그저 그것이 우연히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관찰과 그 관찰에 대한 진술의 참 사이에는 비우연적nonaccidental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오늘 서울에 비가 내린다는 관찰은 실제로 오늘 서울에 비가 내리는 사태 때문에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설사 오늘 서울에 실제로 비가 내린다고 하더라도, 나의 관찰이 바로 이 사태 때문이 아니라 망상 때문이라면 양자의 연관성은 비우연적이지 않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케이건은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경험적 관찰이 실로 정확할 뿐만 아니라, 신빙성 있는 방식으로 정확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합당"(51)하다고 말한다.

윤리학에는? 일단 (1) 우리는 우리의 직관을 - 즉각적으로, 그리고 별다른 생각없이 - 믿어야 한다는 강한 느낌을 받는다. 만약 (2) 우리가 직관을 설명할 수 있는 전반적으로 매력적인 도덕 원칙을 구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도덕적 직관이 신빙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직관이 그저 우연히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도덕적 직관과 저변에 놓인 도덕적 현실[각주:1] 사이의 비우연적 연관성"(51)이 필요하다.

직관이 갖는 신빙성의 근거

관찰이 갖는 신빙성의 근거

관찰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강한 경향성

관찰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강한 경향성

직관을 설명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론의 구성 가능성

관찰을 설명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론의 구성 가능성 

신빙성의 근거로 언급된 두 가지 중 두 번째가 특히 더 중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도덕적 직관이 신빙성 있다고 받아들일 자격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러한 이론 [전반적으로 매력적인 이론]을 실로 구성할 수 있는 경우 뿐"이기 때문이다(51). 경험 과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아주 매력적인 높은 이론을 구성할 수 없다면, 우리의 감각이 가져다주는 증거들을 부정확하고 신빙성 없는 것으로 기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저히 설명이 안 되니까! 우리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각주:2]

이렇게 두 번째 근거가 충족되지 않으면 첫 번째 근거도 힘을 잃는 것 같다. "우리가 즉각적으로 그리고 비반성적으로 우리의 직관적 "관찰"을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들 관찰의 정확성에 대해 회의적일 이유가 없는 한에서 그것들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이유를 제공한다. (…) 만약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에) 관찰을 받아들일 수 있는 (…) 전반적으로 매력적인 이론을 구성할 수 없다면, 우리는 회의적이게 될 이유를 얻는다. (…) [윤리학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에) 직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전반적으로 매력적인 이론을 구성할 수 없다면, 이 가정적 논증 [이들 직관의 정확성에 대해 회의적일 이유가 없는 한에서 그것들의 신빙성을 인정한 이유가 있다는 논증]은 무너질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직관에 대해 회의적일 이유를 갖게 된다"(52).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도덕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케이건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왜 그럴까? "가정하건대 지금 요구되는 이론은 단순히 다양한 "현상appearances"을 조직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최소한 관련된 현상들에 대한 설명의 기초 정도는 제공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력을 갖추어야 한다. (…)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표면의 믿으로 들어가는 이론, 경험적 관찰의 내용인 경험적 현상에 대한 어떤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이다. 즉, 우리는 시공간에 존재하는 대상들, 서로 그리고 우리와 상호작용하는 대상들에 대한 이론을, 어떻게 경험적 세계가 우리의 관찰을 통해 비춰지는 바로 그러한 특성들을 갖게 되는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설명하는 이론을 제공하고자 한다"(52).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모든 물건은 땅으로 떨어진다"는 일반적 명제를 이끌어내는 걸로는 부족하다. 이게 무슨 이론인가? 두 물체의 질량과 그 사이의 거리에 따른 양자 사이의 인력에 대한 일반적 진술이 있어야 이론 아닌가?

윤리학에서도 마찬가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이 직관들을 체계적인 패턴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라면 부족하다. (…) 어떻게 도덕적 영역이 다양한 직관들에 의해 나타나는 바로 그러한 특성들을 갖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다략적으로나마 설명하는 이론이 필요하다"(53). 이런 이론을 만들 수 있을까? 대답은 (a) 직관의 내용과 (b) 이론을 적절한 것과 적절하지 않는 것으로 나누는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찌됐든 케이건은 바로 이런 이론을 구성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각주:3] 그는 "적어도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신빙성이 떨어진다"(53)고 결론내린다.

혹자는 케이건의 이런 주장이 "반직관적"이라는 이유로 반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반론은 논점 선취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애초에 직관이 정당화의 효력을 갖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 주장은 직관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옳지 않다고 반론한다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실로 직관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이론을 구성할 수 있을 때에만 직관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정당화될 수 있다"(53). 케이건은 바로 이러한 이론의 구성 가능성 자체를 의문시하는 것이다.[각주:4]


III 오류 이론

도덕적 직관을 의심할 이유는 또 있다. 바로 개별 사례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직관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도 많이. 우리가 이 점을 간과하는 이유는 우리가 직관이 일치하는 지점을 찾으려고는 하지만, 직관이 불일치하는 지점은 애초에 찾으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는 수업에서는 보통 3/4 정도의 학생들이 다수의 직관을 공유하고 (…) 1/4까지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3/4의 의견 일치조차도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다보면 무너진다(55).

물론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을 즉각적으로 밝히는 것과 어떤 사례에 대해 (가령 의식적인 반성의 결과로서) 달리 가질 수 있는 믿음은 구분"(55)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고민을 좀 해보고서 다른 결론을 내놓았다는 것이 곧 그들의 직관이 불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직관의 불일치는 기실 꽤나 광범위한 현상인 것 같다"(56)는 것이 케이건의 생각이다. 뭐야? 이건 그냥 케이건 본인의 직관 아니야? 아마도 심리학자가 나서서 좀 더 제대로 직관의 불일치 현상을 연구해준다면 좋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직관의 불일치 현상은 그저 이따금씩 일어나는 변칙적 현상이 아니다. 체계적이고 나름의 패턴을 갖추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사례에 나타난 몇몇 특성들에 규칙적으로 반응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런 특성들(의 부재)에 매번 무관심하거나, 꽤나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간단히 말해, 직관의 불일치는 규범과 그것에서의 탈선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덕적 감각은 별개의 유형으로 나타나며 각 유형은 저마다 직관적 반응의 규칙적인 패턴을 갖는다"(56).


도덕적 직관이 신빙성을 결여한다면 "[그것들]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하는 적절한 태도는 우리가 개별 사례에 대해 갖는 도덕적 직관 중 적어도 다수는 잘못된 것이라는 오류 이론error theory의 수용을 포함한다"(54). 물론 이 오류 이론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도덕적 직관의 정당화 효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도 있고,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심지어 도덕적 직관을 전반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도 오류 이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왜? 직관의 불일치 현상 때문이다. 직관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불일치 현상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가능한 대응은 오직 직관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영역에서만 직관이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응한다면 "상당히 섬세한 종류의 오류 이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왜 직관이 어떤 영역에서는 제대로 기능하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신빙성 있는 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56). 또 다른 대응은 심지어 직관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지역에서도 여전히 어떤 직관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또 다른 종류의 오류 이론이 필요하다. 왜 어떤 직관들은 믿을 만하고, 다른 직관들은 그렇지 않은 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또, 자신의 (혹은 제3자의) 직관이 옳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인식론적 설명도 필요하다. 그냥 내 직관이 옳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두 번째 대응을 채택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색맹인 사람과 색맹이 아닌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 도덕에서도 "도덕맹"을 구분해낼 수 있지 않은가?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도덕맹"이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사람에게 "도덕맹"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색맹의 경우 우리는 색맹인 사람조차도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이 색맹이라는 것을 보일 수 있다. "야, 이 숫자 읽어봐. 이거 뭐야?" 하지만 도덕적 직관의 불일치가 일어나는 때에도 이런 게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도덕적 직관의 신빙성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결국 오류 이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오류 이론을 제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도덕적 직관의 신빙성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오류 이론을 쉽게 제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직관이 그저 낡아빠진 종교적 견해나 성性에 대한 금기, 혹은 그저 어린 시절부터 잘못된 도덕적 가르침을 내재화한 결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각주:5] 하지만 이 대응은 별로 적절치 못하다. 예를 들어 트롤리 문제the Trolley Problem에 대한 우리의 직관이 종교적 가르침의 흔적이라는 건 별로 설득력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때 트롤리 문제에 대해 토론해본 적도 없고 말이다. 직관을 단순히 낡아빠지고 부당한 가르침이나 지극히 우연적인 역사적 영향력에 의한 것으로만 치부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게 케이건의 생각이다.

어쩌면 진화론적인 접근법을 채택함으로써 우리가 그저 심리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잘못된 직관을 갖게 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설명은 직관의 불일치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갖는 편견은 보편적이어야 할 것인데, 우리의 직관은 일양성uniformity을 결여한다.

물론 케이건이 이로부터 오류 이론의 구성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적절한 오류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때문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도덕적 직관을 어느 정도나 신뢰할 수 있는지 모른다.


IV 개별적 사례와 일반적 주장

윤리학에서 우리는 일반적 주장에 대한 직관보다는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에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경험 과학에서는 이게 설명해야 할 문제가 애초에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 과학의 일반적 법칙에 대해 우리는 별다른 직관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의 총량의 최대화해야 한다"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남을 해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 도덕 원칙에 대해 우리는 얼마간의 직관을 갖는다. 그런데 "F=m·a"가 딱 직관적으로 와닿는가? 케이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가? 공간이 휘어 있다거나 경우에 따라 시간이 빠르게도 느리게도 흘러갈 수 있다는 상대적 이론은 반직관적이지 않은가? 적어도 옛날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윤리학

경험 과학

일반적 도덕 원칙에 대해서도 직관을 갖는다

일반적 자연 법칙에 대해서는 직관을 갖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윤리학자들은 왜 일반적 주장이 아니라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이 중요하냐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한 쪽에 더 큰 중요성을 부과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두 종류의 직관이 다른데 하필이면 정확하게 동등한 정당화 효력을 갖는 게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생각에는 아주 문제적인 가정이 담겨 있다. (왜 이것이 아니라 저것이 더 큰 정당화 효력을 갖느냐는 질문은 제쳐두더라도!)

바로 일반적 주장에 대한 직관과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이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직관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개별particular 사례에 대해 반응한다고 말하지만 기실 사례들의 유형types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개별 사례에 대해 반응할 때 실제로 우리는 일반적인 도덕적 주장에 대해 반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유형의 사례들에 대해 반응한다"(61). 가상의 사례에 반응할 때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사례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행위가 옳다"는 직관을 내놓는다. 아닌 게 아니라 가상의 사례는 모든 구체적인 요소들에 대한 기술을 담고 있지 않다. 실제로 일어난 사례에 대해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사례가 담고 있는 모든 구체적인 요소들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으니까. 이는 심지어 우리가 직접 어떤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이 [그 사례가]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더 잘 보게 되고, 이어서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 사례에서 해야 할 옳은 행동을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직관을 내놓게 된다"(61). 물론 어떤 사례에 대해 들었을 때와 똑같은 사례를 직접 마주했을 때 우리가 내놓는 직관은 다를 수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례에 대한 직관을 내놓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는 문제가 된다. 도덕적 원칙이나 사례의 유형이나 결국 다 일반적인 성격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 원칙에 대한 직관 對 개별 사례에 대한 직관 사이의 각했던 것은 기실 일반적인 것에 대한 직관 對 일반적인 것에 대한 직관 사이의 대립이 된다.

물론 도덕적 원칙과 사례의 유형이 갖는 일반성의 정도는 다르다. 때문에 문제의 대립은 일반성의 정도가 덜 한 것에 대한 직관 對 일반성의 정도가 더 한 것에 대한 직관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전히 설명이 필요하고, 이러한 응답을 옹호하기 위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62). 그가 보기에 우리의 "직관적인 반응은 적절한 수준에서 광범위한 의미로 선험적a priori"(61)인데, 선험적 사유의 대상이 갖는 일반성이 떨어지면 그 사유의 신뢰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선험적 사유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볼 수 없다.


결국 우리의 도덕적 직관을 설명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론이나 도덕적 직관의 일부만을 배제하는 오류 이론을 구성할 수 없는 한 우리는 도덕적 직관에 얼마 만큼의 신뢰를 보내야 할 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윤리학자들은 여전히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지만…


리뷰 텍스트

Shelly Kagan, "Thinking About Cases," Social Philosophy & Policy 18(2) (2001): 44-63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Shelly Kagan, "The Additive Fallacy," Ethics 99(1) (1988): 5-31

Shelly Kagan, The Limits of Morali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Shelly Kagan, "The Structure of Normative Ethics," Philosophical Perspectives 6 (1992): 223-242

James Dreier, "Structures of Normative Theories," The Monist 76(1) (1993): 22-40

Rahul Kumar, "Defending the Moral Moderate: Contractualism and Common Sense," Philosophy & Public Affairs 28(4) (2000): 275-309

Peter Lipton, 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2nd ed. (New York: Routledge, 2004)

  1. 케이건은 이 외에도 "도덕적 "사실facts""(51)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얼핏 케이건이 도덕적 사실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매우 강한 형이상학적 논제를 가정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섣불리 결론 내리는 것은 곤란하다. 케이건이 말하는 "사실"은 주관과 별개로 존재하는 사실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진리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이건이 '사실'이라는 표현에 큰 따옴표를 붙여서 '"사실"'이라고 말한 것도 그가 이 표현으로 가리키고자 한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본문으로]
  2. 케이건은 이 지점에서 최선의 설명을 향한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의 방법을 수용하고 있는 것 같다. 관찰을 잘 설명하는 이론이 곧 참이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만, 이 이론에 부합하는 직관 역시 높은 신빙성을 갖추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의 이런 진단이 옳다면, 케이건의 주장은 이 세계가 간단하고 임시방편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해 약화될 것이다. 어쩌면 이 세계는 애초에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기 힘든 방식을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히려 매력적이지 않은 이론에 부합하는 직관이 더 높은 신빙성을 갖는다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왜 하필이면 이 세계가 설명할 수 있는 (혹은 하기 쉬운)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같은 반론과 이에 대한 대응은 Peter Lipton, 『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2nd ed. (New York, Routledge, 2004), Ch. 9, esp. pp. 144-48에 등장한다. [본문으로]
  3. 이 논문에서는 이에 대한 별다른 논증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The Limits of Morali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8)에서 직관에 부합하는 - 제약constraints과 선택권options을 모두 포함하는 - 이론이 적절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본문으로]
  4. 스캔런의 계약주의가 우리의 직관을 설명해줄 수 있는 적절한 이론이라는 주장은 Rahul Kumar, "Defending the Moral Moderate: Contractualism and Common Sense," 『Philosophy & Public Affairs』 28(4) (2000): 275-309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문으로]
  5. "Sigdwick and Reflective Equilibrium," 『The Monist』 58(3) (1974): 490-517, p. 51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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