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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 차별주의자라고?

동경 TOKYO 2016. 7. 4. 14:47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가수가 아니다!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각주:1]에서 "종 차별주의speciesism"[각주:2]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자신이 속한 종의 개체들의 이해interests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한편 다른 종의 개체들의 이해에는 반하는 편견이나 편향적 태도"(p. 6)로 규정된 종 차별주의는 백인들의 이해를 흑인들의 이해보다 우선시하는 인종 차별주의racism나 남성들의 이해를 여성들의 이해보다 우선시하는 성 차별주의sexism와 비슷하다. 싱어는 종 차별주의가 인종 차별주의나 성 차별주의와 마찬가지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종 차별주의자"인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 편견을 버리자고 말한다. 이에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은 (1) 종 차별주의가 단순한 편견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충분히 제시되지 못했다는 점과 (2) 우리는 사실 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I 종 차별주의?

견해부터 (b) 둘 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인간의 이해가 동물의 이해보다 중요하다는 조금 완화된 견해와 (c)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인간의 이해가 동물의 이해보다 더 중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동물의 이해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설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c)를 받아들일 거다. 하지만 (c)도 다시 여러 형태로 나뉠 수 있다. 인간의 이해는 동물의 이해보다 얼마나 더 중한가? 똑같은 종류의 이해라면 인간의 이해가 100만큼 더 중요한가? 아니면 5배로 더 중요한가? 아니면 더 복잡한 함수가 필요한가?

또 한 가지. 종 차별주의는 절대적인 형태와 상대적인 형태로도 나뉠 수 있다. 전자에 따르면 중요한 건 인간이 도덕적으로 더 중요하다. 자신이 어떤 종에 속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강아지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인간의 중요성이 강아지의 중요성보다 더 커야한다. 자신이 여성이면서도 남성을 우선시하는 게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여성분들은 말하자면 절대적인 형태의 성 차별주의자라고 볼 수 있겠다. 상대적 형태의 종 차별주의는 자신이 속한 종이 다른 종에 비해 더 중요하다는 견해다. 강아지에게는 강아지의 도덕적 중요성이 다른 종의 도덕적 중요성보다 크다고 보는 것. 싱어가 둘 중 어느 것을 옹호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어차피 『동물 해방』의 독자는 다 인간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케이건은 그러나 절대적 형태의 종 차별주의 - 그러니까 인간이 다른 종에 비해 더 중요하다는 견해 - 를 검토한다. (이렇게 본다면 종 차별주의는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과도 다르지 않다.)


II 뭐가 잘못됐다는 걸까?

싱어는 종 차별주의가 "이해에 대한 동등한 고려의 원칙"(p. 6)이라는 근본적 도덕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종 차별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인종에 속한 이들의 이해와 다른 인종에 속한 이들의 이해가 충돌할 때 그들 자신의 이해에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동등성의 원칙을 위배한다. 성 차별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성性을 가진 이들의 이해에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동등성의 원칙을 부여한다. 이와 비슷하게, 종 차별주의자들은 스스로의 종種이 갖는 이해가 다른 종에 속한 개체들의 더 큰 이해를 능가하도록 한다. 그 패턴은 각각의 경우에서 동일하다(p. 9).

물론 싱어가 인간과 동물을 동일한 방식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가령 개에게 투표권을 주자거나… 아닌 게 아니라 개는 투표권에 관심interests이 없다. 하지만 이해 관계가 얽혀 있다면 우리는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같은 이해에는 같은 중요성을! 그러면 개는 무엇에 관심이 있나? 여러가지가 있을 거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인간과 개를 똑같이 대우했을 때 각기 다른 종류와 정도의 고통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같은 고통을 느낀다면, 인간과 개의 고통은 그 도덕적 중요성이 같아야 한다는 게 싱어의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종 차별주의자가 맞는 것 같다.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지는 않으니까! 그런 적도 있긴 했지… 혹자는 같은 실험을 하더라도 인간이 더 큰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왜? 높은 수준의 인지 능력을 갖추었으니까? 그러면 영아나 매우 심각한 지적 장애를 가진 인간은 어떤가? 그냥 막 실험해도 좋은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물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혹은 훨씬 적은 반감을 갖는다. 그렇지 않은가?

(…) 우리는 영아와 장애를 가진 성인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동물과 이러한 인간들을 구분한다면,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뻔뻔스러운 - 그리고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는 - 우리 자신의 종에 속한 개체들에 대한 선호가 아닌 다른 근거가 있는가? (p. 16)


III 정말 잘못된 걸까?

같은 이해에는 같은 중요성을! 이게 싱어의 생각이다. 근데 이해가 같다는 건 뭘 말하는가? 완전히 동일한 이해가 될 필요는 없을 거다. 상한 음식을 먹어서 겪는 고통이나 알러지가 있는 음식을 먹어서 겪는 고통도 얼마든지 도덕적으로 동등한 것일 수 있다. 종류가 같은 고통이라도 도덕적 중요성은 다를 수 있다. 가령 정도가 다르다면. 말하자면 두 이해가 같다는 건 그것들이 도덕적으로 유관한 측면에서 같다는 의미다. 근데 그 도덕적으로 유관한 측면이란 뭘까? 싱어에 따르면 "강도intensity"와 "지속 시간duration"이다. "고통이 얼마나 나쁜지는 그것이 얼마나 강렬한지와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에 달려 있으며, 같은 강도와 지속 시간을 같은 고통은 똑같이 나쁘다. 그것이 인간의 고통이든 동물의 고통이든 상관없이 말이다"(p. 17). 강도와 지속 시간은 유일하게 도덕적으로 유관한 측면이다.

그런데 그 고통을 겪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도덕적으로 유관한 고려사항이 아닌가? 싱어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싱어는 말이 없다. 직관적으로 싱어가 옳지 않느냐고? 케이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나와 당신이 감옥에 갇혔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똑같이 불쾌한 경험을 똑같이 긴 시간 동안 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죄를 짓지 않았고, 나는 아주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달리 나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겪는 고통이 내가 겪는 고통보다 더 큰 중요성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가? (누군가가 당신과 나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을 탈출시켜준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의 고통이 내 고통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6)

싱어는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pain is pain"이라는 간단한 말로 자신의 논증을 압축했다. 하지만 너무 간단했다. 물론 케이건이 종 차별주의에 문제가 없음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싱어가 종 차별주의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한 것 같다.

어쩌면 싱어는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야, 너 그냥 네 직관에 기대고 있는 거잖아?" 케이건이 보기에 이건 누워서 침 뱉기다. 왜 그럴까? 싱어는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쾌락이 중요한 건 우리가 감각을 느낄 수 있는sentient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이쓴 능력은 이해를 갖기 위한 하나의 선결조건 (…)이다. 등교하는 소년의 발에 차이는 것은 돌의 이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터무니 없는 일이다. 돌은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이해도 갖지 않는다. 우리가 돌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돌의 웰빙welfare에 차이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그 능력을 갖춘 존재가 이해를 - 혹은 아무리 적어도 고통을 피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 갖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충분조건이기도 하다. 가령 쥐는 발에 차이지 않는 것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발에 차인다면 고통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pp. 7-8).

그런데 케이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가령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이 화분의 이해에 부합한다는 말은 완전히 유의미한 - 그리고 참인! - 것 같다"(7).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이해를 갖기 위한 필요 조건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이미 싱어도 이미 자신의 직관에 기대어 어떤 실질적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셈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케이건은 싱어가 "감각주의자sentientist"가 아니냐고 묻는다.

물론 감각주의sentientism은 상당한 직관적 호소력을 지닌다. 때문에 싱어는 얼마든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각을 느끼는 능력이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요소이며, 이에 따라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이해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직관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각과 무감각 사이의 선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할 만한 것으로 직관 이외의 것을 생각"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7). 더군다나 싱어가 직관에만 의존한다면 그는 "바로 그의 근거에 따라 거의 모든 사람이 (…)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 기실 도덕적으로 유관한 요소이며, 이에 따라 더 중요한 이해와 덜 중요한 이해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직관을 갖는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7-8). 싱어가 직관에만 의존하는 한, 그리고 종 차별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직관에 의거해 문제가 없는 한, 싱어는 직관에만 의존해서 종 차별주의를 비판할 수 없다.

그럼 인종 차별주의나 성 차별주의는? 그것과 종 차별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만약 종 차별주의가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면 인종 차별주의와 성 차별주의도 그런가? 케이건은 물론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일단 편견이 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가 다른 상황에서라면 적절하다고 여기지 않았을 그런 증거에 근거해서 어떤 견해를 내세운다면 그는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다"(8). 인종 차별주의자와 성 차별주의자들이 하는 말이 뭔가? 흑인들은 멍청해서 이걸 못하고, 여성들은 약해서 저걸 못한다는 식 아닌가? 혹은 이성적이지 못해서 고용할 수 없다거나 음탕해서 믿을 수 없다는 식 아닌가? 이런 믿음은 물론 거짓이다. 하지만 단순히 거짓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거짓된 믿음이 항상 편견인 건은 아니지 않은가? 인종 차별적이거나 성 차별적인 믿음이 편견인 이유는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이 다른 상황에서라면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을 증거에 기해서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각주:3]

검찰이 어떤 백인 소년의 살인죄를 증명하겠다며 어떤 증거를 제시한다고 생각해보자. 배심원은 그 증거가 그 소년의 살인죄를 증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배심원이 흑인 소년이 연루된 사건에 가서는 비슷한 증거가 살인죄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다면 그는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차별주의자들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8).

종 차별주의가 직관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편견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직관은 그 자체로 어떤 주장을 뒷받침할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인간이 다른 종에 비해서 도덕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만큼은 직관을 그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편견에 사로 잡힌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봤을 때 인간이 다른 종에 비해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직관은 언제나 얼마간의 지지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를 단순히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매도하기는 힘들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speciesism"을 "종 차별주의"가 아니라 "종 구분주의" 정도로 번역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IV 그런데 우리는 정말 종 차별주의자들일까?

렉스 루터가 크립토나이트를 사용해서 슈퍼맨을 죽이려고 한다고 상상해보자. 슈퍼맨은 지금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곧 죽을 수도 있다./ 혹시 잊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슈퍼맨은 인간이 아니다. 우리가 속한 생물학적 종의 개체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렉스 루터를 제외하고!) 슈퍼맨은 인간이 아니니까 그의 이해는 그가 인간이라면 그랬을 것보다는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 이 같은 예시는 얼마든지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ET (…)가 (동명의 영화에서) 죽어갈 때, '뭐, 쟤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니까, 별로 중요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물론 우리가 선을 긋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에 놓여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케이건이 보기에 우리가 긋고 있는 선은 "누군가가 인격체인가 아닌가의 여부"(9)에 따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인격주의자personists"다. (논리적으로는 인간이 아닌 존재자도 인격체일 수 있다. 그리고 인격체이냐 아니냐는 1 혹은 0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인격주의자일까? 우리는 정말로 지성을 갖춘 외계인을 인간과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믿는 걸까? 영화 <디스트릭트 9>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정말로 우리가 슈퍼맨을 인간과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저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게 생겨서 - 그리고 잘생겨서! - 호의를 베푸는 건 아닐까? 동등하게 대우해주는 것과 동등하게 대우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가?)

[이미지 출처]

케이건은 사실 싱어 스스로도(!) 이미 인격주의 혹은 그 비스무리한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2.3).

싱어는 동물을 죽이는 것보다 인격체를 죽이는 것이 더 나쁘다고 주장하고 있다.[각주:4] (…) 싱어는 그저 순전한 직관에 기대어 이를 옹호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이 주장을 인격체가 -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시간에 걸쳐 존재하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의식할 수 있는 존재자가 - 미래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짓는다. 인격체를 죽이면, 바로 이러한 욕망을 좌절시키는 셈이다. 그러나 단순히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싱어는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death is death!'라는 슬로건을 포기하는 것이다. 반대로 죽이는 행위에 있어서 싱어는 인격체와 비인격체 사이의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왜 인격체의 삶은 더 큰 가치를 갖는가? 싱어는 달리 더 자세한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천 윤리학Practical Ethics』에서 그는 이것이 보다 높은 수준의 '자의식self-awareness' 및 '합리성rationality' 그리고 인격체가 누릴 수 있는 보다 넓은 '가능한 경험의 범위'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각주:5]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싱어는 고통에 관해서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인격체라는 것과 동물이라는 것 사이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 이는 물론 고통을 동물이 아니라 인격체가 겪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도덕적 유관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 우리는 이미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는 주장이 적절치 못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 아닌 게 아니라, 싱어 자신도 인격체의 삶이 비인격체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해보라. 

그런데 이 의혹이 싱어에 대한 매우 부당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케이건은 싱어가 이 지점에서 비일관성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싱어는 한편으로 인격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주의를 거부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싱어가 인격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싱어의 주장을 정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쉽게.

싱어가 비인격체를 죽이는 것보다 인격체를 죽이는 것이 더 나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죽는 대상이 인격체이거나 인격체가 아니라는 사실 자체에 기인하는 것인가?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싱어는 이 주장을 인격체가 높은 수준의 자의식과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격체는 보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자의식과 합리성을 갖춘 존재자는 죽음을 더욱 두려워할 것이다. 죽음은 그에게 더 나쁜 것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인격체의 죽음이 비인격체의 죽음보다 나쁜 까닭은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 아닐런지? 말하자면 "싱어는 인격체와 비인격체 사이의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할 때 이 중요성은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중요성이 아니라 다만 파생적인derivative 중요성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싱어는 여전히 인격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일반적으로 인격체를 죽이는 것이 비인격체를 죽이는 것보다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음을 앞둔 인격체는 같은 상황에 처한 비인격체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V 인격체가 아닌 인간

그럼 우리는 그냥 인격주의자?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인격체가 아닌, 인격체가 될 수 없는, 인격체인 적이 없었던 인간, 그러나 동물과 동일하게 취급해버릴 수 없는 인간들도 있기 때문이다. (1) 태아나 아주 어린 영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아직 인격체는 아니지만 곧 인격체가 될. (2) 인격체였지만 지금은 아닌 인간도 있을 수 있다. 치매에 걸린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3) 태어나는 순간부터 심각한 인지적 결함으로 인해 인격체였던 적이 없으며, 될 수도 없는 인간이 있을 수 있다.

케이건은 (3)을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3)에 해당하는 인간에게 동물에게 하는 것과 같은 실험을 해도 될까? 대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 그럴까? 싱어는 아마도 이걸 두고서 우리가 종 차별주의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케이건의 생각은 다르다. 케이건이 보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이 [신체적] 결함을 갖고 있는 인간은 전형적 성체adult가 인격체인 그러한 종에 속한다"(12).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특정 종에 속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속한 종의 전형적인 성체가 인격체라는 점이 중요하다. 꼭 인간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그 전형적 성체가 인격체인 종은 있을 수 있다. 지적인 화성인이라든가… 이런 종을 케이건은 편의상 "인격 종persons species"라 부른다. 그래서 이 견해는 종 차별주의와는 다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견해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똑같은 인간이라도 하더라도 인격체가 비인격체보다는 도덕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VI 인격주의

그렇다면 이런 인격주의는 그럴듯한가? 케이건은 먼저 몇 가지 반론을 검토한다.

지적인 강아지 반론The Intelligent Dog Objection: 보통 개에게 특별한 화학적 시술을 해서 인지 능력을 갖춘 인격체로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이 개는 인격 종에 속하는 개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인격주의자들은 이 개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개가 엄연한 인격체라면 이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 아닌가?

케이건은 이게 허수아비를 때리는 반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위 개가 도덕적 중요성을 결여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하지만 인격주의자가 저런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인격주의에 따르면 도덕적 지위는 인격 종에 속하는 비인격적 개체 또는 인격체에게 주어진다. 두 조건 중 하나만 충족시키면 된다. 하나가 충족되지 않아도 좋다.

장애가 생긴 화성 강아지 반론The Impaired Martian Dogs Objection: 우리가 몰랐지만 사실은 강아지들이 화성에서 온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근데 이 강아지들은 화성에서는 인격체다. 지구의 중력이 화성보다 강하다보니 두뇌 발달에 영향을 미쳐서 지구에서 나고 자란 강아지들이 인격체가 아닐 뿐, 본디 인격체라는 것. 지구에 사는 강아지들은 그렇다면 인격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다. 인격주의에 따르면 지구에 사는 강아지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중요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이 아닌지?

케이건은 이것이 우스꽝스러운 결론이라는 직관 자체를 거부한다. 이런 경우에는 "지구에 사는 개들의 이해도 더 큰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혹시 이런 직관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봐 케이건은 한 가지 예시를 덧붙인다. "우리가 화성으로 여행을 가서 지적인 화성인들을 발견했다고 해보자. (…) 그들 중 다수가 지구로 왔는데 - 비극적이게도 - 화성인들이 지구에서 임신을 하면 중력의 차이로 인해 그 자녀들이 인격체가 되지 않으며 영영 인격체가 될 수도 없다./ 나는 이러한 경우에 장애를 갖게 된 화성인 아이들의 이해가 특별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각한 장애를 갖게 된 지구인 아이들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 그런데 이게 바로 장애가 생긴 화성 강아지의 이야기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13-14)

전염병 반론The Plague Objection: 케이건은 어떤 종의 '전형적typical' 성체가 인격체라면 그 종에 속한 개체는 도덕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어떤 종이 인격 종인지의 여부는 통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닌가? 통계적 사실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인격 종도 인격 종이 아니게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면 통계적 사실에 따라 도덕적 지위를 갖는 개체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가령 아주 심한 역병이 돌아서 인간이 모두 인지 능력을 상실했다고 해보자. 번식을 해서 태어나는 아이들도 다 그런 식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격 종이 아니게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각 개체의 도덕적 지위는 이와 같은 역병이 돌 것인지의 여부에 따라 달려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처럼 보인다.

케이건도 이것이 반직관적인 결론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종이 인격 종이 되기 위한 조건은 단순히 통계적 사실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전형적'이라는 게 그냥 비율이 높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 "중요한 질문은 그 종에 속한 대부분의 개체가 어떠한지에 대한 통계적인 질문이 아니라, 그 종에 속한 통상적인generic 개체가 어떠한지에 대한 질문이다"(14). 근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통상적인 사자는 갈기가 있다. 어떤 병 때문에 사자 대부분이 갈기를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통상적 인간은 인격체다 - 어떤 질병 때문에 인격체 인간이 거의 남지 않게 되더라도 말이다"(14). 여전히 통상적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이렇게 되면 인간이 인격 종이라는 사실의 진리값이 위태로워 지지 않는다. 인간의 도덕적 지위는 미래에 창궐할지도 모르는 역병에 취약하지 않다.


그런데 왜 인격 이 중요한가?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 속해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속genus, 과family, 목order, 강class 등에 속해 있기도 하다. 또, 철학에 관련된 글을 읽는 사람들의 집단이나 오늘날 생존해 있는 사람들의 집단 등에 속해 있기도 하다. 근데 왜 하필이면 이 중에서 이 중요한 걸까?

기차역을 총괄하는 역장들의 집단에 속한 개체는 통상적으로 인격체일 것이다. 인격체가 아닌데 역장을 어떻게 맡겠나… 그런데 그 역장들의 집단에 비인격체가 들어올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있다! 고양이가 역장으로 임명된 것. [관련 기사] 그럼 이 고양이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중요성을 갖게 되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다.

혹자는 "역장들의 집단"이 인공적artificial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종과 같이 자연적natural 집단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체 왜? 케이건이 보기에 그럴듯한 대답은 이런 것이다. "자연적인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보통 우리에게 개체의 본성nature에 대해 말해주지만, 인공적인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그렇지 않다"(15). 가령 어떤 개체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것을 알면 우리는 그 개체가 설사 인격체가 아니더라도 인격체가 될 수도 있었을could have been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어떤 개체가 역장들의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 역장이라는 지위가 비인격체에게도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는 것인 이상! - 우리에게 그 구성원이 인격체인지 그리고 인격체가 아니라면 인격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개체의 본성은 속, 과, 목, 강을 보고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알 수 있는 개체의 본성은 종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종을 보지 않으면 그 개체가 갖는 혹은 가질 수도 있었던 본성에 대해 알 수 없다. 이게 바로 - 자연적이든 아니든 - 다른 집단이 아닌 종에 주목하는 이유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떤 속은 '인격 속'이다. 그 속에 속하는 개체는 통상적으로 인격체인 것. 그런게 그 속에 속한 어떤 종은 인격 종이 아니다. 그 종에 속하는 개체는 통상적으로 비인격체다. 그렇다면 이 종에 속한 개체는 인격 종에는 속하지 않되, 인격 속에는 속하는 것이 된다. 이 개체는 도덕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까? 케이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개체가 어떤 속에 속한다는 사실은 이 인격체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VII 양상적 인격주의

이처럼 케이건은 어떤 개체가 특정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유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 개체가 될 수도 있었던 것에 관한 사실 - 바로 양상적 속성modal property - 이 된다. 케이건이 보기에 인격체가 될 수도 있었던 개체(=양상적 인격체modal person)가 도덕적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는 이 양상적 인격주의modal personism이야말로 우리의 직관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이론이다. "내가 보기에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은 어떤 생명체가 인격 종의 구성원이라는 생물학적biological 사실이 아니라, 그 생명체가 인격체가 될 수도 있었다는 (…) 형이상학적metaphysical 사실이다"(16).

(근데 이러면 문제가 생긴다. 지적인 강아지 반론을 생각해보자. 내가 키우는 강아지는 지금 인격체가 아니지만 과거에 화학적 시술을 했더라면 인격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강아지는 양상적 인격체가 아닌가? 그럼 강아지들도 인간과 유사한 수준의 도덕적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는 건가? 케이건의 양상적 인격주의는 이런 귀결로 치닫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인격 종에는 속하지만 인격체가 될 수 없었을 그런 개체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아이의 뇌에 심각한 유전적 결함이 생겼다고 생각해보자. "[이 아이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이 아이]에게 본질적인 것"(17)이라면, 그러니까 이 병에 걸린 아이가 결코 인격체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면, 이 아이는 양상적 인격체가 아니므로 도덕적으로 중요한 존재자가 아닌가?

케이건은 이 아이가 도덕적 지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많은 이들이 이에 반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 사례에서조차도 만약 상황이 달리 흘러갔다면 이 아이도 인격체가 될 수 있었다는 가정을 알게 모르게 끌어들이고 있는 것일 수 있다"(17)는 게 케이건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가 문자 그대로 인격체가 될 수 없었던 존재자라면, 그가 우리가 갖는 것과 같은 도덕적 지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케이건도 양상적 인격주의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귀결을 허용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방금 언급한 뇌 장애가 두 아이에게 발생했다고 생각해보자. 한 아이의 경우에는 그 장애를 일으킨 인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 유전자에 있고, 다른 아이의 경우는 그 장애가 환경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두 아이의 상태가 같더라도 양상적 인격주의자들은 전자에 비하여 후자가 도덕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존재자라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케이건은 우리도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반직관적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양상적 인격주의는 다른 이론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직관을 잘 설명해낼 수 있다. 케이건이 이 입장을 지지하는 것도 이 때문. 물론 이것으로 양상적 인격주의의 참이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이론이라는 점은 확실시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케이건의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1) 양상적 인격성modal personhood는 도덕적으로 유관한 요소다.

(2) 실제적 인격성 역시 그렇다

(3) 실제적 인격성이 양상적 인격성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4) 인격체의 죽음은 동물의 죽음이나 양상적 인격체의 죽음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5) 실제적 인격체의 고통은 보다 큰 중요성을 갖는다.

(6) 양상적 인격체의 죽음은 동물의 죽음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7) 양상적 인격체의 고통은 보다 큰 중요성을 갖는다.


(8) 동물의 고통과 죽음은 도덕적으로 사소한 것이 아니다.

(9) 동물의 고통과 죽음은 - 그 동물이 충분히 높은 수준의 인지 수준을 갖추고 있다면 - (인간을 포함한) 양상적 인격체의 고통과 죽음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 우리가 오늘날 동물을 대우하는 방식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말할 수 있다.


인격성은 정도의 문제다.

(10) 인격성의 정도에 따라 어떤 양상적 인격체는 다른 양상적 인격체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11) 양상적 인격체의 인격성이 실체적 인격체의 인격성에 비하여 현저하게 떨어지는 경우 그 도덕적 중요성이 경감될 수 있다.


리뷰 텍스트

Shelly Kagan, "What's Wrong with Speciesism?," Journal of Applied Philosophy 33(1) (2016): 1-21 [강의 들으러 가기]


같이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David DeGrazia, "Modal Personhood and Moral Status: A Reply to Kagan's Proposal," Journal of Applied Philosophy 33(1) (2016): 22-25

Jeff McMahan, "On 'Model Personism'," Journal of Applied Philosophy 33(1) (2016): 26-30

Peter Singer, "Why Speciesism is Wrong: A Response to Kagan," Journal of Applied Philosophy 33(1) (2016): 31-35

  1. 4th ed. (New York: Harper, 2009). 초판은 1975년에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2. "차별"이라는 표현은 이미 부정적 평가 요소를 담고 있다. 따라서 "specisism"를 "종 차별주의"로 번역하는 것은 이미 이것이 도덕적 문제를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종 구분주의" 정도가 중립적인 번역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speciesism"이 "racism"이나 "sexism"과 같은 단어와 대구를 이룬다는 점을 고려하여 "인종 차별주의" 및 "성 차별주의"라는 표현과 대구를 이루는 "종 차별주의"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나는 이 표현을 채택함으로써 종 차별주의가 반드시 도덕적으로 문제적이라는 주장을 함께 내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본문으로]
  3. 이런 맥락에서 케이건은 그 어떤 견해도 그 자체로 편견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어떤 견해를 내세우는 것이 편견에 사로잡힌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은 입장을 채택하면서도, 그 중 한 사람만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p. 21, n. 4. [본문으로]
  4. Ibid., pp. 18-21; Singer, 『Practical Ethics』 3rd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chs. 4-5. [본문으로]
  5. 『Practical Ethics』, p. 9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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