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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주의와 평가적 초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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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주의와 평가적 초점

동경 TOKYO 2015. 4. 17. 23:39

I 결과주의와 평가적 초점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는 결과의 좋음 혹은 나쁨을 기준으로 도덕적 평가를 한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평가를? 그 평가대상evaluand이 행위act라면 - 행위를 취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가 얼마나 좋은지를 평가한다면 - 그것은 행위 결과주의act consequentialism가 된다. 반면 규칙 결과주의rule consequentialism는 행위가 아니라 규칙rule을 직접적인 평가대상으로 삼는다. 최적의 규칙은 물론 최선을 결과를 가져오는 규칙이다. 행위는 (그것이 가져올 결과가 아니라) 바로 이 최적의 규칙에 의거해서 평가된다. 행위 결과주의나 규칙 결과주의나 도덕적 정당화가 좋음good의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들 두 이론은 각각 행위와 결과를 제1 "평가적 초점evaluative focal points"으로 갖는다. 좋음을 통해 직접적으로 평가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동기 결과주의motive consequentialism 제도 결과주의institution consequentialism니 하는 이론들 역시 모두 결과의 좋음이라는 근본적 가치foundational value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각기 다른 평가적 초점을 갖는 것이다.)


II 행위 결과주의=직접 결과주의? 규칙 결과주의=간접 결과주의?

오랫동안 행위 결과주의는 직접적direct인 반면에 규칙 결과주의은 간접적indirect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규칙 결과주의에 대한 이른바 "규칙 숭배rule worship" 비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가 규칙에 위배된다면? 그때도 규칙을 따라야 하는가?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텐데도? 규칙이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결과주의가 근본적으로 가치있다고 여기는 좋음보다 규칙이 더 선행한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규칙 결과주의가 이미 내재적 정합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규칙 결과주의의 이런 문제점은 규칙만을 평가점 초점으로 삼고 - 즉 좋음에 의해 직접적으로 평가하고 - 정작 행위는 (좋음이 아니라) 규칙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행위 결과주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행위 결과주의는 정말로 직접적인가? 행위에 대해서는 그렇다. 하지만 규칙을 평가할 때는 간접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는가? 사실 규칙 결과주의도 규칙에 대해서만큼은 직접적이다. 말하자면 행위 결과주의를 직접 결과주의로, 규칙 결과주의를 간접 결과주의로 분류하는 것은 "오로지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는 '진정으로' 제1 평가적 초점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할 경우에만"(p. 135) 가능하다. 누군가가 이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이미 그는 "행위 숭배act worship"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행위가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은 행위 결과주의 역시 규칙을 (좋음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평가함으로써 터무니없는 귀결로 빠져드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행위 결과주의와 규칙 결과주의는 제1 평가적 초점이 무엇인지만 다를 뿐 결국 둘 다 간접 결과주의라는 것이다. 행위든 규칙이든, 그것이 반드시 제1 평가적 초점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케이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 행위나 규칙이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제1 평가적 초점이 되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케이건은 그 어떤 것이라도 제1 평가적 초점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III 간접 결과주의 비판

이제 케이건은 간접 결과주의 - 규칙 결과주의뿐만 아니라 행위 결과주의도 여기에 포함된다 - 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특정한 하나의 대상만을 유일한 직접적 평가대상으로 삼는 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지적한다.


규칙 결과주의 비판

사실 규칙은 그 자체로 아무런 효과도 없다. 규칙은 오로지 그것이 채택되는 한에서만 - 혹은 (케이건의 표현을 따르자면) "embedded" 되는 경우에만 - 어떤 효과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규칙 결과주의는 규칙을 어떤 식으로 채택할 것인지에 따라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다.

먼저 도덕적 주체들이 규칙에 어느 정도로 잘 따를 것인가에 따라 그 규칙의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우리는 모두가 규칙에 완벽하게 순응conform할 것이라는 - 모두가 규칙에 따를 동기를 갖고 있으며, 모두가 규칙에 따르는 행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모두가 실수없이 그 행위를 수행할 것이라는 - 이상적ideal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규칙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반대로 좀 더 현실적인realistic 상황을 가정하고서 - 규칙을 따를 동기가 없거나 부족한 사람도 분명히 존재하고, 항상 규칙에 따르는 행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며, 무엇을 해야할지 아는 사람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서 - 그러한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규칙이 무엇인지를 따져볼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최적의 규칙을 구체화하고 나면 이제 그 규칙을 기준으로 무엇이 옳은 행위인지를 평가해야 한다. 행위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방법도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최적의 규칙에 순응하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규칙이 명령하는 바에 정확히 들어맞아야 옳은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도덕적 주체들이 규칙을 채택했을 때 실제로 따라나오는 행위 - 그러니까 규칙 채택의 결과로서의 행위 - 가 옳은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최적의 규칙을 구체화하는 2가지 방식과 규칙에 의거해 옳은 행위를 규정하는 2가지 방식에 따라 다음과 같은 4가지 형태의 규칙 결과주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최적의 규칙은?

현실적 구체화

이상적 구체화

옳은 행위는?

규칙 준수

(1)

(3)

규칙 채택의 결과

(2)

(4)

케이건은 이제 이들 4가지 형태의 규칙 결과주의를 하나하나 비판한다. 치밀함 돋는다… 그 전에 케이건은 논의의 간결함을 위해 한 가지 요인을 통제 혹은 배제한다. 우리가 어떤 규칙을 채택하는 그 순간 이 규칙은 어떤 효과를 발휘한다. 가령 "살인을 하지 말라"는 규칙은 그 규칙이 없었더라면 살해당했을 사람들의 목숨 외에도 다른 좋음을 가져다 준다. 이 규칙이 지켜지는 한 사람들이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을 것임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안도감reassurance 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이건은 규칙이 배경 원칙background principle로서 작용하는 것만으로 발생하는 좋음은 이 논문에서 고려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이 때문에 규칙 결과주의에 대한 케이건의 비판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1)은 "바람직한 불응desirable nonconformity"의 문제에 빠진다. 애초에 규칙 자체가 경우에 따라 사람들이 그 규칙을 위반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규칙에 불응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1)은 어떤 행위가 실제로는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규칙에 순응한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으로 옳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2)는 적어도 애초에 이따금씩 위반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규칙을 이상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옳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규칙을 채택함으로써 실제로 나타나게 될 행위를 옳은 행위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바람직한 불응"의 문제는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2)는 "바람직하지 않은 불응undesirable nonconformity"의 문제에 부딪힌다. (2)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규칙을 채택한 행위자가 실제로 하게 되는 행위는 옳다. 그러나 이 행위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일 수도,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규칙을 채택하는 한 규칙 결과주의는 (1) 나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규칙에 순응하기만 하면 그 행위는 항상 옳다거나 (2)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물론 규칙까지 위반하는 그 행위까지도 옳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케이건은 이 같은 문제점이 (필요한 부분만 약간 수정하면mutatis mutandis) 모든 종류의 간접 결과주의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4) 역시 (2)와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않은 불응"의 문제에 부딪힌다. 이상적인 상황을 전제하고서 구체화된 규칙이라고 할지라도 행위자들이 그 규칙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규칙도 어기면서 동시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데도 실패하는 행위가 발생할 것이다. (4)는 그 정의상 이러한 행위를 옳은 것으로 본다.

규칙에의 완전한 준수를 요구하지 않는 한 규칙 결과주의는 항상 규칙을 위반하면서도 그 이론이 근본적 가치로 삼는 것을 증진시키지도 못하는 행위를 옳다고 한다는 점에서 타당한 이론이 될 수 없다. 케이건은 이 문제 역시 (필요한 부분만 약간 수정하면) 모든 종류의 간접 결과주의가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3)이 유일하게 그럴듯한 형태의 규칙 결과주의인가? 케이건은 (3) 마저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한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대체 어떻게? (3)에 따르면 최적의 규칙은 사람들이 그 규칙에 순응한다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규칙이기 때문에 이 규칙에 불응하면서 동시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행위의 가능성은 선험적으로a priori 배제되는 것 아닌가? 케이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3)에도 여전히 "바람직한 불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3)에서 규칙들은 순전히 모든 행위자들이 그 규칙에 완벽하게 순응할 것이라는 이상적인 상황을 전제하고서 구체화된 것이므로 만약 이러한 이상적 상황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 - 다시 말해 "완벽한 순응"의 상황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 - 우리에게 그 어떤 지침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말하자면 (3) 행위자가 규칙을 위반하는 상황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서 만들어진 이상적 규칙을 상당수의 행위자들이 규칙을 위반할 때에도 곧이곧대로 따라야 한다는 귀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설사 그 행위가 커다란 "재앙disaster"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를 바탕으로 케이건은 규칙 결과주의가 "내재적으로 이미 받아들이기 어려운inherently implausible" 이론이라고 결론내린다.


행위 결과주의 비판

그러면 우리는 행위 결과주의를 받아들여야 할까? 케이건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행위 결과주의도 규칙 결과주의와 마찬가지로 간접 결과주의에 속하기 때문에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행위에 근거해 규칙이 평가되는 방식에 따라 행위 결과주의를 2가지로 나눈다. 4가지가 아니라 다행이다. (1) 최선의 규칙은 옳은 행위를 (이상적으로) 규정prescribe하는 규칙이다. (2) 최선의 규칙은 옳은 행위를 (현실적으로) 산출produce하는 규칙이다. 그럼 이들 두 형태의 행위 결과주의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먼저 (1)에 따르면 규칙을 평가하는 잣대는 그 규칙이 실제로 우리가 옳은 행위를 하도록 만들었느냐가 아니다. 이 규칙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옳은 행위를 명령하거나 규정하기만 하면 최선의 규칙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1)이 말하는 최선의 규칙은 너무도 자명하다. "옳은 행위를 하라"가 아니겠는가? 옳은 행위를 명령하거나 규정하는 규칙이 이게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 규칙은 한마디로 "쓸모없는useless" 규칙이다. 물론 우리가 무엇이 옳은 행위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완벽하게 갖췄다면 문제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리 적어도 몇몇 경우에서 만큼은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으로 유용한usable 지침을 원할 것이다"(p. 146).

(2)는 그래도 좀 낫다. (2)에 따르면 규칙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옳은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 규칙은 어디까지나 좋은 결과를 초래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옳은 행위가 실제로 취해지느냐 마느냐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2)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을 통해 보다 잘 드러난다. 돌이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각 상황에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지는 알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돌이는 총 10번의 행위를 취해야 한다. 돌이는 자신이 10번의 행위를 취하게 될 10번의 상황 중에서 정확히 몇 번째 상황이 상황 2가 될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중 9번은 상황 1이 될 것이고 나머지 1번은 상황 2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행위 A

행위 B

상황 1 (9회)

+1

0

상황 2 (1회)

-1,000,000

0

(2)에 따르면 최선의 규칙은 돌이로 하여금 항상 행위 A를 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 규칙이 옳은 행위를 가장 많이 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규칙이 돌이가 행위 B를 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돌이가 더 적은 수fewer의 옳은 행위를 할 공산이 크다. (혹자는 이 지점에서 최선의 규칙은 돌이가 매번 행위 A를 하도록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경우에 옳은 행위를 하도록 - 다시 말해 상황 1에서는 행위 A를, 상황 2에서는 행위 B를 하도록 - 만드는 규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 그 규칙이 어떤 것일지 혹은 심지어 그런 규칙이 가능할지도 분명하지 않다.) 즉 돌이가 (2)를 받아들인다면 옳은 행위를 더 자주 할 수는 있겠지만 최종적으로 좋음을 산출하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 것이다. 결과주의에게 중요한 것은 옳은 행위의 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산출되는 좋음이 아니던가?

이 지점에서 누군가 다음과 같은 대안을 모색할 수도 있다. 옳은 행위라고 모두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은 행위가 갖는 중대성significance - 그것이 가져올 좋음 혹은 그것이 방지할 나쁨의 양 - 에 따라 그 행위의 옳은 정도에 가중치weight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이 대안적 해석을 따른다면 우리는 돌이가 상황 1에 있을 때 취하는 행위 A는 아주 조금 옳은 반면에 그가 상황 2에서 취하는 행위 B는 그 옳은 정도가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돌이로 하여금 항상 행위 B를 하도록 만드는 규칙을 최선의 규칙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전략은 행위 결과주의자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이 대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행위 결과주의자는 스스로 행위 결과주의자이기를 포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행위만을 제1 평가적 초점으로 삼고 규칙은 행위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행위 결과주의와 달리 이 대안적 해결책은 규칙을 제1 평가적 초점으로 삼는 것이다.


III 직접 결과주의

케이건은 규칙 결과주의와 행위 결과주의가 자신이 지적한 문제에 부딪히는 것은 그것들이 제1 평가적 초점으로 삼은 것들 - 규칙과 행위 - 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그들이 근본적 가치로 받아들이는) 좋음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제1 평가적 초점에 의해 간접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만약 결과주의가 최선의 결과를 이상적 지향점으로 삼는다면 도대체 무언가를 제2 혹은 제3의 평가적 초점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지점에서 그는 오직 단 하나의 제1 평가적 초점만을 갖는 간접 결과주의와 대비되는 "직접 결과주의"를 제시한다. 모든 대상을 직접적으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이 직접 결과주의에서는 모든 평가대상이 제1 평가적 초점이 되며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본) 간접 결과주의의 문제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최선의 규칙과 최선의 동기가 우리에게 다른 행위를 명령한다면? 거기에 최선의 동기가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는 행위가 최선의 규범의 명령과 다르다면? (...)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가?"(p. 152) 케이건은 이러한 "충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규칙과 동기와 규범이 명령하는 행위들 중에 가장 좋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무엇인지만 따지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충돌은 간접 결과주의에게는 문제가 될지언정 직접 결과주의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자 다른 말을 하는 규칙과 동기와 규범 역시 각각이 얼마나 좋은 혹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느냐에 따라 평가하면 된다. 그것들이 다른 평가적 초점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띠지 못한다.



IV 총체적 결과주의

케이건은 비록 이 논문에서는 오직 행위와 규칙만이 평가적 초점의 후보군으로 논의되었지만 이 밖에도 동기, 규범, 제도, 의사결정 절차 등 많은 대상들이 평가적 초점의 자리에 놓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흔히 평가적 초점의 후보군으로 받아들이는 것들로부터 눈을 돌리기만 하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잠재적인 제1 평가적 초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원자atoms, 날씨weather, 하수도 체계sewer systems, 항성suns"(p. 151)까지도 말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건은 데렉 파핏Derek Parfit이 『이유와 인격Reasons and Persons』에서 제시한 "총체적 결과주의global consequentialism"의 아이디어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하다. (케이건이 명시적으로 "총체적 결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얼핏 총체적 결과주의는 직접 결과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나는 양자가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 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직접 결과주의는 이미 평가대상으로 받아들여진 것들을 모두 직접적으로 평가하는 결과주의다. 가령 행위와 규칙이 유관한 평가대상이라면 그것들을 모두 제1 평가적 초점으로 삼는 것이다. 반면 총체적 결과주의에서는 평가대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없다. 이 이론에 따르면 그야말로 모든 존재하는 대상이 평가적 초점이 된다. 따라서 총체적 결과주의는 항상 직접 결과주의이지만 직접 결과주의가 항상 총체적 결과주의인 것은 아니다. 일례로 행위와 규칙은 제1 평가적 초점으로 가지면서 그 외의 다른 평가대상을 갖지 않는 결과주의는 직접적이되 총체적이지는 않은 결과주의에 해당한다.

총체적 결과주의와 직접 결과주의의 대척점에 서있는 국지적 결과주의local consequentialism와 간접 결과주의 역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간접 결과주의는 1개 이상의 평가대상을 (근본적 가치에 의거하지 않고) 다른 평가적 초점에 의거하여 간접적으로 평가한다. 그 뿐, 간접 결과주의는 제1 평가적 초점이 2개 이상인 것을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다. 반면 국지적 결과주의는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제1 평가적 초점으로 삼는다.[각주:1] 따라서 국지적 결과주의는 (제1 평가적 초점 외에 다른 평가대상이 최소 하나라도 있다면) 항상 간접 결과주의다. 그러나 간접 결과주의가 반드시 국지적 결과주의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행위와 규칙을 제1 평가적 초점으로 가지며 제도를 규칙에 의거해서 평가하는 결과주의는 간접적이지만 국지적이지 않다.


V 평가적 초점과 도덕 이론

많은 철학자들은 행위 결과주의를 직접 결과주의라고 불러왔다. 때문에 케이건이 말하는 직접 결과주의와 간접 결과주의의 한 형태로서의 행위 결과주의를 혼동하게 된 것이다. 케이건은 평가적 초점 분석은 결과주의뿐만 아니라 다른 도덕 이론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자면 계약에 근거해서 직접적으로 규칙을 선택하고, 이 규칙들을 이용해 행위와 제도를 평가하는 계약주의 이론은, 계약에 근거해서 제도institutions를 직접적으로 평가하고, 이 제도들을 이용해 규칙을 만들고, 이 규칙들에 의거해서 다시 행위를 평가하는 계약주의 이론과 구분되어야 한다"(미주 12).


VI 비판

① 정말로 다른 대상이 아닌 바로 이 대상을 제1 평가적 초점으로 놓아야 할 이유는 없는가? 어떤 평가대상은 그 특성상 다른 대상에 비해 제1 평가적 초점이 되기에 더 적절하지 않은가? 결과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이론을 수정·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규칙, 동기, 제도, 성품 등을 평가적 초점으로 도입한 것은 그저 자의적인 선택일 뿐인가? 그것들이 도덕적 평가에 적합하기 때문은 아닌가?

② 평가대상의 범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문제는 없는가? 좋음의 증진에 기여하는 원자가, 눈 색깔이, 기후가 옳다right는 진술[각주:2]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들이 옳다면 우리는 그것들의 존재를 증진시키거나 혹은 최대화시킬 규범적 이유를 갖게 되는가? 특정한 눈 색깔이 다른 눈 색깔에 비해 좋음의 증진에 가장 큰 기여를 한다면 우리는 그 눈 색깔의 갖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갖도록 명령·권고할 이유를 갖는가? 설사 우리가 옳은 기후(가 존재하는 사태)를 야기할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당위는 가능을 함축한다ought implies can는 테제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규범적 이유를 인정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 규범적 이유를 인정한다면 불가능한 당위 역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이러한 반론이 오로지 간접 결과주의적 관점을 채택하는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직접·총체적 결과주의에 따라 행위를 다른 평가적 초점을 통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제1 평가적 초점으로 두는 한 이런 반론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III절의 마지막 단락에서 지적한대로) 옳은 행위는 옳은 기후 - 다시 말해 좋음을 최대화하는 기후 - 를 야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냥 좋음을 최대화하는 행위다.[각주:3] 어떤 기후가 아무리 좋음을 최대화한다고 하더라도 - 그래서 옳다고 하더라도 - 그 기후를 야기하려는 행위가 실제로 좋음을 최대화할 수 없다면 - 그 행위는 옳은 행위일 수 없다. 기후를 바꾸는 것처럼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굉장히 어려운 일을 시도하는 것이 좋음을 최대화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직접·총체적 결과주의적 도덕은 위 반론이 말하는 것처럼 행위자에게 옳은 기후를 야기하라는 식의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위 반론은 오로지 간접 결과주의의 틀 내에서만 유효하다는 점에서 논점 선취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규칙 결과주의를 논하면서 규칙이 일반적으로 수용accept되는 것만으로 발생하는 효과를 배제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이러한 효과는 기실 규칙 결과주의를 핵심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규정짓는 특징이기 때문이다.[각주:4] 이 요인을 충분히 고려했을 때에도 규칙 결과주의는 그럴듯하지 않은 도덕 이론으로 치부될 수 있을까? 이제 - 현실적 상황을 전제하고 구체화된 규칙에 대한 완벽한 순응을 옳다고 규정하는 - 규칙 결과주의 (1)에 대한 케이건의 비판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 전에 규칙 결과주의 (1)이 구체적으로 어떤 규칙을 포함할지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아마도 이상적 상황을 전제한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을 해하지 말라"는 <평화> 규칙이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을 해하지" 않는다면 최선의 결과를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규칙 결과주의 (1)처럼 현실적 상황을 전제한다면 이 규칙은 채택되기 어려울 것 같다. 일부 사람들이 (아마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상황에서 여전히 상당수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을 해하지" 않는다면 폭력 사태를 억제하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그러한 사태가 심화되는 것을 방관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이를테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위협을 가한 자를 해하라"는 <반격> 규칙이 차라리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케이건은 규칙 결과주의 (1)이 포함하는 규칙은 이미 어느 정도 위반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규칙인데 그것을 완벽하게 따르는 것은 오히려 좋음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규칙 결과주의 (1)의 문제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에 따른 행위를 옳은 행위로 규정한다는 데 있다. 가령 <반격> 규칙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이 규칙 결과주의 (1)에 의해 옳은 것으로 규정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작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핏 이 주장은 그럴듯 해보인다. 다른 사람이 나를 공격했을 때 내가 반격을 한다면 이 세계의 좋음은 아마도 감소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규칙 결과주의가 말하는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반격을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은 나를 더 심하게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격을 함으로써 '내가 <반격> 규칙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반격> 규칙은 그것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또 그러한 사실이 일반적으로 믿어질 때 폭력 등에 대한 억지 효과deterrent effect를 가질 것이다. 이 효과는 공격과 그에 따른 반격이 전혀 혹은 지금 일어나지 않더라도 항상 작용한다.

물론 케이건이 정말로 <반격>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 다시 말해 공격을 받더라도 결코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 차라리 좋음의 측면에서는 더 바람직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케이건이 논지를 전개할 때 구체적인 예를 들지도 않았을 뿐더러 규칙의 일반적 수용이 갖는 효과를 논의에서 배제했을 뿐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각주:5] 어찌됐든 그는 이 효과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규칙 결과주의를 불공정하게 다루었다. 규칙이 수용되어 배경 원칙으로 작용할 때 나타나는 효과가 충분히 고려된다면 규칙 결과주의가 케이건의 생각처럼 그리 쉽게 반박될 수는 없을 것이다.


리뷰 텍스트

Shelly Kagan, "Evaluative Focal Points," in Brad Hooker, Elinor Mason and Dale Miller, ed., Morality, Rules, and Consequence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0), pp. 134-155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Philip Pettit & Michael Smith, "Global Consequentialism," in Brad Hooker, Elinor Mason and Dale Miller, ed., Morality, Rules, and Consequence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0): 121-133

Brad Hooker, "Rule-consequentialism," in Hugh LaFollette & Ingmar Persson, ed., The Blackwell Guide to Ethical Theory, 2nd ed. (Wiley-Blackwell, 2013): 238-260

Shelly Kagan, "The Structure of Normative Ethics," Philosophical Perspectives 6 (1992): 223-242

  1. "Global Consequentialism," in Brad Hooker, Elinor Mason and Dale Miller, ed., 『Morality, Rules, and Consequence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0): 121-133에서 필립 페팃Philip Pettit과 마이클 스미스Michael Smith는 총체적 결과주의에 대비되는 국지적 결과주의가 "어떤 한 가지 평가대상의 범주에 특권을 부여"(p. 122)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논문에서 국지적 결과주의의 예로 거론되는 것들은 모두 행위 결과주의이거나 행위가 아닌 무언가를 제1 평가적 초점으로 갖고 그것을 통해 행위(의 옳음)을 평가하는 결과주의다. 때문에 나는 행위를 평가대상으로 삼는 것이 국지적 결과주의의 본질로 규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지적 결과주의의 테제가 명시적으로 서술되어 있지는 않아서 국지적 결과주의의 본질적인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속단하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2. Ibid., p. 121 [본문으로]
  3. 물론 옳은 기후를 야기하는 행위와 좋음을 최대화하는 행위는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어떤 행위가 옳은 기후를 야기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좋음을 최대화하는 것일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규칙의 수용이 갖는 효과를 고려할 때 비로소 규칙 결과주의를 행위 결과주의와 적절히 구분할 수 있다는 지적은 Brad Hooker, "Rule-consequentialism," in Hugh LaFollette & Ingmar Persson, ed., 『The Blackwell Guide to Ethical Theory』, 2nd ed. (Wiley-Blackwell, 2013): 238-260 등에서 제시된 바 있다. [본문으로]
  5. "(…) once embedded, a variety of factors can affect the consequentialist 'score' that a rule (or a set of rules) receives. For example, once embedded, rules can have an impact on results that is independent of their impact on acts: it might be, say, that merely thinking about a set of rules reassures people, and so contributes to happiness"(p. 139). "acts"는 원문에서 이탤릭체로 강조되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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