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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비판 I: 윌리엄스의 온전성 반론 본문

논문과 원전

공리주의 비판 I: 윌리엄스의 온전성 반론

동경 TOKYO 2015. 4. 22. 14:11

I 결과주의와 가치 담지자로서의 사태

Consequentialism is basically indifferent to whether a state of affairs consists in what I do, or is produced by what I do (…)

p. 93

결과주의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가 도래하느냐 뿐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그리고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가 죽었다고? 결과주의자가 신경을 쓰는 것은 오로지 그 결과다. 내가 그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는지 아니면 굶어 죽어가는 그에게 밥 사먹을 돈을 보내주지 못해서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없다. 나 때문인지 너 때문인지도 상관없다. 어찌됐든 사람이 죽는 사태state of affairs가 발생하지 않았는가?

결과주의 도덕 이론에서 궁극적으로 가치를 담지하는 것은 바로 사태다. 때문에 더 많은 가치를 담지한 사태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옳은 것으로 규정하는 결과주의에서 그 행위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행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한다.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똑같은 사태를 가져오기만 한다면 말이다.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는 바로 이 지점에서 결과주의의 문제점들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II 소극적 책임

살인마나 유니세프에 돈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이 사람이 죽는 사태를 일으킨다. 둘 다 이 세계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이다. 따라서 둘 다 그른 행위를 한 것이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물과 밥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돈을 보내주면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거나 최소한 늦출 수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돈을 보내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그들이 죽는 사태를 야기한다. 어떤가? 살인마는 분명히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공리주의에 따르면 우리와 살인마는 적어도 똑같이 나쁜 사태를 가져온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우리도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게 바로 소극적 책임negative responsibility이다. 한마디로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 내가 미처 막지 못한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된다는 거다.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은 사람을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우리는 나쁜 놈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이 세계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나쁜 사태를 막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III 두 가지 사례

① 최근 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George는 좀처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가 생계비를 벌고 있지만 George는 아이를 둔 가장으로서의 몫을 다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몹시 괴롭다. 그런데 어느 날 선배 화학자가 George를 찾아와 생화학무기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할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George는 생화학 전쟁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시무시한지를 잘 알기에 선배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런데 선배는 George를 이해하지만 만약 George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화학 무기 개발에 뜻을 품고 있는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생화학 전쟁에 의해 고통받게 될 것이다. 사실은 이 선배도 가급적 생화학 전쟁의 피해를 줄이는 게 좋다는 생각에 George에게 먼저 이 연구직을 제안한 것이다. George는 어떻게 해야 할까?

② 식물학자 Jim은 정글을 탐험하다가 우연히 작은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선 20명의 인디언들이 반정부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인디언을 처단하려던 Pedro는 저명한 학자인 Jim에게 특이한 제안을 한다. Jim이 1명의 인디언을 죽이면 나머지 19명은 살려주겠다는 것이다. 정말 또라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Jim이 이 제안을 거절하면 20명의 인디언 모두 총살당할 것이다. 물론 그도 Pedro에게 총을 겨누고 인디언들을 탈출시킬 생각도 해봤지만 여건상 그럴 수는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1명의 인디언을 죽이거나 20명의 인디언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 뿐이다. Jim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공리주의자들은 아마도 George에게 연구소로 취직을 하라고 말할 것이고 Jim에게는 권총을 들고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겨버리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해야할까? 물론 꽤 많은 사람들이 공리주의자들의 결론에 동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생화학 무기 개발 연구직을 맡는 일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연구직을 거절하고 내 손에 피를 묻힐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르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공리주의적 사고 방식에 동의할 수 없는 까닭은 - 물론 적잖은 사람들이 그 결론에는 동의할 수 있겠지만 - 그것이 George와 Jim의 신념과 다짐[각주:1]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이를테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생화학 전쟁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는 George의 신념이나 무고한 사람을 해하지 않겠다는 Jim의 다짐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충분이 고려되지만 다른 더 중요한 것에 의해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다.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리주의는 오로지 좋은 사태를 가져올 수 있는 행위를 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결과만 좋다면 행위자 자신이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물론 행위자가 자신의 신념이나 다짐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좋은 사태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 그 행위가 좋은 사태를 가져오기 때문이지 결코 행위자의 신념이나 다짐이 어떤 근본적 중요성을 갖기 때문은 아니다.


IV 소외의 문제

한마디로 사람은 그냥 어떤 사태를 불러오기 위한 "매개물medium"일 뿐이다. 그냥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인과적 연쇄 작용을 일으키는 기계 역할만 잘 하면 된다.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또 무슨 뜻을 품고 있는지는 도덕적으로 무관하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 것이 누구인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설사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어떤 나쁜 사태를 일으켰을지라도 나에게 그 사태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는 "소극적 책임"의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Jim이 제안을 거절함으로서 나타나는 결과는 Pedro가 20명의 인디언을 죽인 것이 아니라 20명의 인디언이 죽는 사태다. Jim은 이 사태를 막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므로 Jim이 이 끔직한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결론이다. 이 지점에서 '반정부 시위를 한 인디언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신념과 그 신념에 따라 행위할 의지를 갖고 있는 Pedro가 이 사건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소극적 책임의 문제는 단순히 도덕률이 행위자에게 양적으로 지나친 요구를 한다는 점에 있지 않다. 소극적 책임을 짊어지게 된 행위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신념과 다짐에 따라 행위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욕망이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하고 싶은 일들과 자신 자신에게 필요한 일들이 있다. 그런데 공리주의는 이런 것들을 깡그리 무시해버린다.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딴 거 신경 안 써!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거라면 닥치고 뭐든 해!" 다시 말해 도덕적 주체들은 자기 자신의 인생 계획과 신념으로부터 소외alienation될 것을 요구 받는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와 그 외에 다른 모든 사건들에 의해 이미 결정된 인과적 역사 속에서 나는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행위해야 한다. 물론 필요하다면 나는 내 스스로의 인생 과업project이나 내 스스로의 결정으로부터 물러나야 한다. 다시 말해 내 스스로를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 자신의 신념으로부터 소외시켜야만 한다. 그렇게 떼어내진 나는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건들 - 물론 그 중에는 나의 행위도 포함되지만 - 의 조합으로서의 입력input을 받아 최선의 사태라는 출력output을 내놓는 통로가 될 뿐이다. 그러나 나의 과업과 나의 신념은 곧 나의 정체성identity를 구성하는 것들이 아닌가? 따라서 나 자신을 이것들로부터 떼어내라고 말하는 것은 곧 나의 정체성을 버리라는 말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공리주의는 도덕적 주체들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공격을 가하고 있다.


V 온전성 반론

도덕적 자아 혹은 도덕적 정체성에 대한 공격은 곧 한 인간의 온전성integrity에 대한 공격이다. 좋은 사태를 불러올 수만 있다면 언제든 정체성을 버리라고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언제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명령하는 공리주의 도덕은 인간이 자신의 개인적인 과업과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게 아닌가? 한마디로 내가 온전히 나로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공리주의자들도 ① George가 연구직을 거절하거나 ② Jim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게 더 낫다고 - 그래서 옳다고 - 말함으로써 반직관적인 귀결을 회피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일부 공리주의자들이 앞에서 살펴 본 두 사례에 대해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령 George와 Jim이 제안을 받아들이고서 심각한 죄책감이나 정신적 충격에 시달린다면 오히려 그들이 제안을 안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은 사태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령 "자기함몰적 결벽self-indulgent squeamishness"이 이러한 부정적 감정의 한 예다. "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화학 전쟁에서 고통스럽게 죽었어! 내가 내 손에 피를 묻혔어! 나는 나쁜 놈이야!" 하지만 윌리엄스는 공리주의의 이런 대응이 전혀 효과적이지 않다고 일축한다. 당장 적게는 열아홉, 많게는 수천수만의 목숨이 더 혹은 덜 날아가는 데 고작 한 사람의 불쾌한 감정이 뭐가 그렇게 크단 말인가?[각주:2]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스는 "자기함몰적 결벽"이 단순히 사태의 가치를 결정하는 쾌·불쾌 정도로 환원될 수 없으며 실로 굉장히 중요한 도덕적 함의를 지닌다고 본다. 애초에 우리가 "자기함몰적 결벽"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가 스스로의 과업과 신념으로부터의 소외를 경계하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자기함몰적 결벽"은 단순한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온전성을 침해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평가의 표현이다. (공리주의는 이 같은 도덕적 평가의 표현으로서의 "자기함몰적 결벽"마저도 공리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써 온전성에 대한 위협을 배가한 셈이다.) 따라서 설사 공리주의자들이 반직관적인 귀결을 피해기 위해 "자기함몰적 결벽"의 감정을 운운한다고 할지라도 이는 결코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단 그 감정에 의해 변화되는 공리는 사람 목숨이 주는 공리에 비하면 하잘 것 없기 때문에 공리주의자는 여전히 반직관적인 귀결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자기함몰적 결벽"의 감정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도덕적 주체가 온전성에 대한 공격 및 침해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까지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전략을 바꾸어 "자기함몰적 결벽"이라는 감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리주의가 온전성 반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공리주의적 도덕 주체는 자신의 온전성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겨를도 없이 언제나 최선의 사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나 저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인생 계획와 신념으로부터 소외된다. 공리주의는 도덕적 주체의 온전성을 보전해주지 못한다.


리뷰 텍스트

Bernard Williams, "A Critique of Utilitarianism," in J. J. C. Smart & Bernard Williams, Utilitarianism: For and Against (Cambridge, Eng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pp. 93-118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Peter Railton, "Alienation, Consequentialism, and the Damands of Morality," Philosophy & Public Affairs 13(2) (1984): 134-171

Peter Singer, "Famine, Affluence, and Morality," Philosophy & Public Affairs 1(3) (1970): 229-243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rev. ed.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5

Henry Sidgwick, The Methods of Ethics, 7th ed. (Indianapolis, IN: Hackett Publishing Company, 1981), Bk. IV, Ch. II & Concluding Ch.

  1. 윌리엄스는 "convictions", "commitments", "projects"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본문으로]
  2. 윌리엄스는 또한 George와 Jim이 합리적인rational 주체라면 공리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한 문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 같은 불쾌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데 "자기함몰적 결벽"이나 죄책감 등의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윌리엄스의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자신이 한 행위가 옳다고 믿더라도 여전히 그것이 도덕적으로 유관한 부정적 감정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 5명과 낯선 사람 1명 중 한 쪽만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자녀를 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믿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자는 미처 구하지 못한 낯선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정신적 충격 등에 시달릴 수 있는 것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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