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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도덕 형이상학 정초』 읽기 I: 예비적 고찰/서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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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도덕 형이상학 정초』 읽기 I: 예비적 고찰/서문

동경 TOKYO 2015. 6. 10. 22:44

칸트가 보기에 이 세계의 합리적 질서란 우리가 경험을 통해 발견하는 것도, 오로지 순수 이성만을 통해 도달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구성하는 것이다.『순수 이성 비판The Critique of Pure Reason』은 바로 이론적인 - 앎을 통한 - 구성 작업의 일환이다. 그럼 실천적인 - 행위를 통한 - 구성 작업은? 의무론적 윤리학의 아빠,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정초The Groundwork of Metaphysics of Morals[각주:1]를 읽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사실 『도덕 형이상학 정초』의 주요 테제들 - (1)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결코 다른 사람에 의해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2) 자기 스스로의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3) 도덕률을 따르는 것이 곧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 이 이미 도덕 철학을 넘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도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도덕 형이상학 정초』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칸트의 철학적 기획 전반을 잠시 톺아볼 필요가 있다. 칸트 철학의 출발점은 도대체 순수 이성이 세계에 관한 지식과 우리의 행위를 관장하는 능력에 무엇을 보태줄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다. 당시의 경험론자들은 우리의 지식이 모두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도덕적 관념들도 예외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합리론자들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모든 진리가 자명한 합리적 원칙들에 의해서 도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답변에 만족하지 못했다. 왜?

경험론자들은 종합synthetic 판단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얻어낼 수는 있었으나 이렇게 얻은 지식은 그저 "맹목적"이었다. 데이비드 흄이 회의주의에 빠진 까닭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무수히 많은 인상과 관념들을 얻어내지만 그것으로부터 체계적인 지식을 얻어내기란 불가능하다. 경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내 앞의 컴퓨터가 실제로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 앞에 컴퓨터가 있다는 인상만이 있을 뿐이다. 에어컨을 켜니 시원해진다. 그 뿐이다. 에어컨이 시원해진 것의 원인인지는 모른다. 둘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인상은 없으니까. 심지어 흄은 자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합리론자들은 선험적인a priori 판단을 통해 경험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으며 보편성·필연성을 갖춘 지식 체계의 기반을 마련하기는 했으나 그 위에 지어진 지식 체계란 내용이 없이 다만 "공허"할 뿐이었다. 총각은 남자라거나 엄마는 여자라는 말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고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전해주지 않는다. 총각이 남자라고? 그래… 근데 뭐 어쩌라고…

분석적

종합적

선험적

합리론

칸트

후험적

X

경험론

칸트의 철학적 기획은 바로 선험적이면서도 종합적인 판단 - 우리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전해주면서도 경험과 독립적으로 획득되는 판단 - 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각주:2] 그래서 순수 이성이 형이상학적 사변에서나 실천적 맥락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느냐는 칸트의 물음에 대한 열쇠는 우리가 선험적 종합 판단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데에 있다. 『도덕 형이상학 정초』는 실천적 맥락에서 나타나는 도덕 법칙이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임을 보이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도덕 형이상학 정초』 서문에서 칸트는 철학을 다시 논리학logic, 자연학physics, 윤리학ethics이라는 세 가지 분과 학문으로 나눈다. 논리학은 사유의 법칙을, 자연학은 자연의 법칙을, 윤리학은 자유의 법칙[각주:3]을 다룬다는 것이다. 논리학은 경험을 요구하지 않는 순수 이성의 영역이기 때문에 선험적 종합 판단이 필요하지 않다. 반면 자연학과 윤리학에서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가령 우리는 경험을 통해 메르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호흡 곤란 증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메르스 바이러스가 호흡 곤란의 원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경험만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인과적 연결을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속성이 '메르스 바이러스'라는 개념에 내재한 것도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험적 종합 판단이 역할을 발휘한다. 각종 현상들이 인과적 질서를 따른다는 판단은 지성understanding이 갖고 있는 선험적인 인과율의 범주이 있기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칸트는 이 같은 방식으로 흄의 회의주의를 해결한다.) 이런 식으로 획득한 지식의 총체가 바로 "형이상학"이다. 이를테면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갖는다는 지식은 자연 형이상학metaphysics of nature에 속한다.

자연 형이상학이 이 세계는 어떠한가[be]에 다루는 것과 달리 도덕 형이상학은 이 세계는 어떠해야 하는가[ought]에 다룬다. 하지만 선험적 종합 판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크게 다르지 않다. 경험을 통해서는 그저 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뿐이다. (흄은 존재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도덕적 판단이 분석적이라고 볼 수도 없다. 만약 그랬더라면 모든 도덕적 논쟁들은 그저 도덕적 판단을 개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험적 종합 판단들의 총체가 다름 아닌 도덕 형이상학metaphysics of morals에 속한다.

사실 이 도덕 형이상학은 이후 『도덕 형이상학Metaphysics of Morals』와 『실천 이성 비판The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등에서 더욱 자세히 전개된다. 『도덕 형이상학 정초』는 그야말로 "정초" 작업일 뿐이다. 여기서의 목표는 다만 "도덕률의 최상 원칙[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의 모색과 수립"(4:392)이다. 엄밀히 말하면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시도되는 작업은 어떤 행위를 할 때 내세우는 이유[준칙maxim]가 보편적인 법칙이 될 것을 의지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정언 명법이 선험적이면서도 동시에 종합적임을 보이는 일, 그것이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시도되는 바다.


리뷰 텍스트

Immanuel Kant, The Groundwork of Metaphysics of Morals, rev. ed., trans. Mary Gregor & Jens Timmerman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Christine M. Korsgaard, "Introduction," in Immanuel Kant, The Groundwork of Metaphysics of Morals, rev. ed., trans. Mary Gregor & Jens Timmerman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vii-xxx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Christine M. Korsgaard, Creating the Kingdom of End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1. 국내에서는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이원봉 번역/책세상 출판), '도덕형이상학의 기초' (강태원 번역/다락원 출판), '윤리 형이상학 정초' (백종현 번역/아카넷 출판) 등 다양한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본문으로]
  2. 크리스틴 코스가드Christine Korsgaard에 따르면 후험적a posteriori이면서 분석적analytic 판단은 불가능하다. 분석적 판단은 반드시 선험적이며 - 후험적일 수 없으며 - 후험적 판단은 반드시 종합적이기 - 분석적이 아니기 - 때문이다. 반면 선험적 판단은 반드시 분석이거나 종합적 판단이 반드시 후험적일 필요는 없다. 이 점은 Christine M. Korsgaard, "Introduction," in Immanuel Kant, The Groundwork of Metaphysics of Morals, rev. ed., trans. Mary Gregor & Jens Timmerman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vii-xxx, pp. ix에서 언급된다. [본문으로]
  3. 자유로운 존재들의 행동거지를 관장하는 법칙이 있다는 칸트의 생각으로부터 우리는 자유가 무질서나 모든 종류의 법칙으로부터의 독립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도덕률에 따르는 것이 곧 자유로워지는 길이라는 『도덕 형이상학 정초』의 주요 테제와도 맞닿아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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