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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도덕 형이상학 정초』 읽기 III: 제2절 본문

논문과 원전

칸트 『도덕 형이상학 정초』 읽기 III: 제2절

동경 TOKYO 2015. 6. 14. 20:03

『도덕 형이상학 정초』의 제1절은 도덕률에 대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갖고 있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그렇다고 제1절에 드러난 칸트의 논증이 귀납적인 것은 아니다. 칸트는 사람들이 실제로 법칙에 대한 존경심에 따라 행위한다는 관찰로부터 그러한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는 결론을 귀납적으로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1절의 논증은 만약 어떤 행위가 법칙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라면 그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는 식의 연역 논증이다. 누군가가 실제로 법칙에 대한 존경심에서 행위하는지의 여부는 윤리학의 탐구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 우리의 의지를 다스린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말은 우리가 실제로 정언 명령에 따른다는 것을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합리적rational 존재라면 정언 명령에 따를 것임을 보인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제2절의 목표는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의 원칙 중 하나인 도덕 법칙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다. 도덕 법칙은 자연 법칙과 분명히 다르다. 가령 우리가 야구공을 던지면 그 공은 반드시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공이 자연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공이 "나는 자연 법칙에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야구공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야구공은 그저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우리가 행위할 때에 따르는 원칙에 대해 반성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그저 법칙을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표상representations을 따른다. 물론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 욕망과 공포에 휘둘리거나 자연의 힘에 거스를 정도로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 비합리적으로 행위하기도 한다. (우리가 실제로 행위할 때에 따르는 주관적 원칙으로서의 준칙maxim과 실천 이성이 제시하는 객관적인 도덕 법칙 사이의 괴리가 발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천 이성의 객관적 법칙을 다름 아닌 명령imperatives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ought -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 를 규정하는 명령말이다. 그런 점에서 명령에 대한 논의가 제2절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명령은 가언적hypothetical이거나 정언적categorical이다. 가언 명령은 "만약 네가 X를 의지한다면 너는 X를 해야 한다"는 식이다. 가령 '건강해지고자 한다면 담배를 끊어라'는 명령은 가언적이다. 가언 명령은 어떤 의미에서 기술적인 조언이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기 때문이다. 한편 정언 명령은 그냥 "너는 X를 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러저러 하다면' 따위의 조건은 붙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명령이란 말이다.

칸트는 가언 명령이 분석적으로analytically 도출된다고 말한다. 어떤 목적을 - 단순히 욕망하거나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 의지한다는 것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을 의지한다는 것을 개념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목적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일이다. 문제는 정언 명령이다. 정언 명령에는 조건이 없기 때문에 당위에 관한 진술을 분석적으로 도출해낼 수 없다. 정언 명령은 종합적synthetic일 수밖에 없다. (도덕률이란 결국 선험적a priori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인 실천적 원칙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제2절에서는 그 가능성이 모색되지 않는다. 제2절은 제1절과 마찬가지로 분석이 주를 이룬다.)


I 보편 법칙의 정식

정언 명령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단번에 그것이 담고 있는 바를 알 수 있다. 정언 명령은 (…) 오로지 준칙이 이 법칙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담고 있으며, 또한 이 법칙은 준칙을 제한할 수 있는 그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기에, 행위의 준칙은 오직 법칙 그 자체의 보편성만을 따르면 된다(4:420-1).

정언 명령은 우리의 준칙이 반드시 순응conform해야만 하는 법칙이다. 준칙이 정언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만족시켜야 하는 상위의 조건이나 그렇게 하기를 명령하는 또 다른 법칙이 있어서가 아니다. 정언 명령은 그저 우리가 무조건적으로unconditionally 따라야 할 무엇이다. 어? 그런데 우리는 항상 어떤 준칙에 따라 행위하지 않는가? 그래서 준칙이 반드시 정언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곧 준칙이 곧 법칙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준칙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법칙을 법칙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 보편성이라는 형식이니까 말이다.

조건적인 요구conditional requirements는 퇴행regress의 문제를 야기한다. "신의 의지를 따르고자 한다면 약속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은 오로지 "신의 의지를 따라야 한다"는 명제가 참인 경우 뿐이다. 반면 무조건적인 요구에 따라 행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따르라고 명령하는 또 다른 상위의 법칙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요구가 곧 법칙이기 때문이다. 정언 명령은 바로 그 자체로 법칙이 되는 원칙들에 따라 행위하라고 말한다. "(…) 단 하나의 정언 명령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네 행위의 준칙이 보편 법칙이 되는 것을 또한 의지할 수 있도록 오직 그렇게 행위하라act only in accordance with that maxim through which you can at the same time will that it become a universal law는 것이다"(4:421). "네 행위의 준칙이 마치as if 네 의지에 의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라도 될 것처럼 행위하라"(4:421), 이게 바로 보편 법칙의 정식The Formula of Universal Law이다.

그런데 내 행위의 준칙이 보편 법칙이 되는 것을 의지할 수 있는지 어떻게 판단하나? 간단한 사고실험을 하면 된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내 행위의 준칙이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 법칙law of nature이 되는 것을 내가 의지할 수 있겠는가?' 가령 돈을 갚을 능력도 의지도 없으면서 금방 갚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에게 돈을 받아내는 건 어떤가? 이때 행위자의 준칙은 아마도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구하기 위해 거짓 약속을 한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준칙이 자연 법칙이 된다면 어떨까? "돈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돈을 구하기 위해 거짓 약속을 한다"는 자연 법칙이 있는 세계를 우리는 의지할 수 있는가? 야구공을 던지면 반드시 내려오는 것처럼 돈이 필요한 사람은 반드시 거짓 약속을 하는 그런 세계를 말이다. 칸트는 이런 세계를 의지하는 것은 곧 모순을 범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 모두가 필요하다면 갚을 의도도 없으면서 돈을 구하기 위해 거짓 약속을 한다는 자연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아무도 약속을 믿지 않을 것이고 모두가 약속의 표현들을 한갓 공허한 속임수로 보고 웃어넘길 것이기 때문"(4:422)이다. 약속과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아예 불가능해질 것이란 말이다. 거짓 약속 준칙은 이른바 "개념 상의 모순 검증the contradiction in conception test"를 통과하지 못한다.

그러면 보편 법칙의 정식은 황금률Golden Rule과 어떻게 다른가? 얼핏 남들에게 자신을 대했으면 하는 방식대로 남을 대하라는 황금률은 보편 법칙의 정식과 매우 유사해보인다. 하지만 양자는 분명히 다르다. 보편 법칙의 정식에 따르면 우리는 모순contradiction을 피해야 한다. 반면에 황금률은 다만 비일관성inconsistency을 보이지 말라고 말할 뿐이다. 살펴본 것처럼 거짓 약속을 하는 사람은 보편 법칙의 정식을 위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이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구하기 위해서 나에게 거짓 약속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또라이다 최소한 일관적이기는 하다. 황금률은 지키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절대로 필요없기 때문에 자신도 다른 사람을 절대 돕지 않는 사람도 황금률은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개념 상의 모순 검증"을 통과한 준칙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반드시 보편 법칙의 정식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자신의 능력을 계발할 생각은 안 하고 허구한 날 집에만 틀어박혀서 먹고 자기만 하는 것도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귀찮아서 움직이지 않고자 한다면 그렇게 한다"는 준칙이 보편화되더라도 그것이 개념 상의 모순을 일으키는 것 같지는 않다. 원한다면 모두가 잉여 인간으로 살아가는 세계가 개념적 모순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가 이러한 세계를 의지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모두가 기분만 내키면 잉여 인간처럼 살아가려는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잉여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농사 짓는 사람이 있어야 집에서 밥 퍼먹고 살 것 아닌가? 택배 아저씨가 있어야 쌀 배달해줄 것 아닌가? 농부와 택배 아저씨가 다 집에서 뒹굴거리면 나는 어쩌나? 준칙은 "의지 상의 모순 검증the contradiction in will test"도 함께 통과해야 보편 법칙의 정식에 부합할 수 있다.

사실 이 모순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몇 가지만 소개한다. (1) "논리적 모순 해석"에 따르면 거짓 약속이 보편 법칙이 된 세계에서의 약속은 둥근 사각형이나 마찬가지다.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념 상의 모순 검증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2) "목적론적 모순 해석"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약속 행위는 신뢰와 협동심의 구축이라는 자연적 목적을 갖는데 거짓 약속 준칙은 바로 이 자연적 목적을 거스른다는 것이다. 거짓 약속 준칙이 곧 자연 법칙이 된다면 그 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자연 법칙에 의해 다스려지게 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3) "실용적 모순 해석"은 거짓 약속 준칙이 보편화되는 순간 금전 확보라는 목적 달성의 효력을 잃는다는 데에 집중한다. 말하자면 거짓 약속은 금전 확보의 원인이다. 그런데 거짓 약속 준칙이 자연 법칙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는 이 인과 관계가 사라지거나 적어도 약해지기 때문에 돈을 얻어낸다는 목적을 달성하기가 불가능하거나 어려워진다. 의지 상의 모순 검증에 대한 칸트의 진술이 이 해석과 잘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II 인간성의 정식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준칙이 보편 법칙으로 의지될 수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편 법칙이 될 수 있는 준칙만을 의지해야 하는가?  보편 법칙의 정식을 따라야 하는가? 우리가 정언 명령이라는 무조건적인 요구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 다시 말해 윤리학이 성립한다는 것을 - 증명하기 위해서는 보편 법칙의 정식이 어째서 필연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다스리는 원칙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야 한다. 이제 칸트는 도덕 법칙이 모든 합리적 존재들에 대해 권위를 갖는다는 점, 그러니까 합리적인 존재라면 누구나 도덕 법칙에 따르도록 동기부여될 것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법칙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표상에 따라 행위한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준칙이나 법칙을 표상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행위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end이다. 때문에 모든 합리적 존재들이 따라야만 하는 무조건적인 요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모든 합리적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공유하는 목적, 그러니까 객관적 목적objective ends 또한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근데 그게 뭘까?

일상에서 우리가 목적으로 삼는 것들은 오로지 상대적인 가치만을 갖는다. (제1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선의지good will를 제외한 모든 것은 오로지 조건적인 가치만을 가진다. 내재적으로 좋은 것은 선의지밖에 없다.) 기술은 오로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우에만 가치를 지닌다. 학문이나 예술은 물론 조금 다르다. 다른 목적을 위한 한갓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가치는 상대적이다. 그 가치가 학문과 예술에 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가치의 원천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크리스틴 코스가드Christine M. Korsgaard의 말처럼 "순수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인간이 인식의 욕망을 갖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다. 시각 예술과 음악은 감각적 경험의 무관심적 향유disinterested enjoyment를 위한 능력을 고양시키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다. 문학과 철학은 그것이 자기 이해에 대한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주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다"(pp. xxii). 곧 이것들을 추구하는 우리는 기실 우리 스스로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것이 "[모든] 인간 행위의 주관적 원칙"(4:429), 그러니까 모든 행위의 준칙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도덕 법칙을 따르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그러니까 합리적 존재라는 객관적 목적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언 명령은 이제 이러한 객관적 목적의 가치를 존경하라는 인간성의 정식The Formula of Humanity으로 나타난다.

네 자신의 인격에 있는 것이든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는 것이든 상관없이 항상 인간성을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절대 한갓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행위하라So act that you use humanity, whether in your own person or in the person of any other, always at the same time as an end, never merely as a means(4:429).

한마디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합리적 존재로 대우하라는 거다. 인간성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순간 - 그러니까 선의지에 반하는 방식을 행위하는 순간 - 다른 모든 것들을 가치를 잃는다. 때문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는 인간을 한갓 조건적 가치를 위해 희생시키거나 해치는 것은 모순이다.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사 결정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가 합리적인 존재인 한 그가 스스로 설정한 목적은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행위나 삶의 향방을 결정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 곧 그의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 곧 선의지를 제외한 모든 것들에게서 가치를 앗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강요나 기만이 도덕적으로 금지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외압이나 속임수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방해한다. 스스로의 목적을 제대로 추구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거짓 약속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돈을 주기를 - 다시 말해 돈을 주겠다고 결정하기를 - 원할 것이다. 그런데 돈을 갚을 생각이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상대방이 돈을 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돈을 주겠다는 의사 결정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거짓 약속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인간성, 그러니까 의사 결정 능력을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거짓 약속이 도덕적으로 그른 이유는 단순히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차라리 진실을 말하면 원하는 목적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상대방의 합리적 의사 결정 능력을 조작하려 한 태도가 문제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III 목적의 왕국과 자율적 주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진실을 말함으로써 그를 우리가 서 있는 인식론적 지평으로 초대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를 그들도 공유함으로써 함께 숙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구성원 모두가 함께 사유하는 공동체, 모두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그 자체 목적으로 대우하는 이 이상적인 공동체가 바로 "목적의 왕국kingdom of ends"이다.

보편 법칙의 정식과 인간성의 정식은 각각 정언 명령의 형식form(=보편화가능성)과 질료matter(=객관적 목적으로서의 인간성)를 규정한다. 합리적 존재인 인간은 보편화할 수 있으며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하는 준칙을 법칙으로 만든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도덕 법칙의 입법자legislator다.

합리적 존재인 내가 철학 공부를 목적으로 삼으면 - 그 목적이 선의지에 위배되지 않는 한 - 나는 곧 철학 공부에 가치를 부여confer하는 셈이다. (코스가드는 인간성이 가치 부여value-conferring의 능력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 순간 철학 연구는 좋은 것, 그러니까 추구되어야 할 무엇이 된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나의 철학 연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목적을 존중해줄 것과 내가 이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물론 학문 연구라는 목적이 인간성의 가치에 반하는 경우 - 가령 피실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위험한 실험을 진행한다든지 - 에는 결코 연구 행위의 준칙을 법칙으로 입법할 수 없다.

우리가 도덕 법칙에 따르는 것은 바로 이 법칙이 우리 스스로 입법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 법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처음부터 존재하던 그런 게 아니다. 우리 자신의 법칙이다. 의무를 따르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의무를 따르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칸트 윤리학에서의 도덕적 규범성은 그래서 자율적autonomous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도덕 법칙에 따르는 것은 합리적인 존재라면 누구나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합리적인 존재로 바라보기 때문이지 도덕 법칙을 따름으로써 어떤 이익을 얻거나 피해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가령 처벌이 무서워서 법을 따르거나 지옥에 갈 것이 두려워서 종교적 교리를 따르는 것은 타율적heteronomous이다. 타율적으로 따르는 명령은 항상 가언 명령이다. "처벌을 받지 않고자 한다면 물건을 훔치지 말라"거나 "천국으로 가고자 한다면 거짓을 일삼지 말라"는 식이 될 것이란 말이다. 반대로 무조건적인 요구를 담고 있는 정언 명령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동기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순수 이성 비판The 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모색된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Copernican Revolution"은 그의 윤리학에서도 발견된다. 자연 법칙은 우리가 세계 속에서 발견해내거나 순수 사유를 통해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부여impose하는 것이다. 도덕 법칙도 이와 마찬가지라서 그 원천은 다름 아닌 인간의 자기규율self-government 능력이다. 칸트의 인식론이 이론 형이상학이었다면 그의 윤리학은 실천 형이상학metaphysics in practice이다. 우리는 이성의 법칙을 우리의 행위에, 그리고 우리의 행위를 통해 다시 이 세계에 부여한다. 따라서 우리는 정언 명령을 "너 자신을 스스로의 준칙을 통해 보편 법칙을 입법하는 자로 간주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정언 명령에 따르는 사람은 스스로를 목적의 왕국에서 살아가는 시민citizens으로, 존엄성dignity을 갖춘 존재로 표상한다.

"공통된 법칙들을 통한 합리적 존재들의 체계적 통합체"요 "그 자체 목적인 합리적 존재들과 각각이 스스로의 것으로 설정한 목적들 모두의 전체"(4:433)인 목적의 왕국 시민들은 자유롭다. 스스로에게 적용될 법칙을 스스로 입법하는 자들이기에, 그리고 그 법칙이 또한 누구나 자신의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명령하고 있기에 말이다. 법칙은 그 자체로 부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법칙을 스스로 입법하는 한 인간은 자유롭다.


리뷰 텍스트

Immanuel Kant, The Groundwork of Metaphysics of Morals, rev. ed., trans. Mary Gregor & Jens Timmerman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Christine M. Korsgaard, "Introduction," in Immanuel Kant, The Groundwork of Metaphysics of Morals, rev. ed., trans. Mary Gregor & Jens Timmerman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vii-xxx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Christine M. Korsgaard, Creating the Kingdom of End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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