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칸트 『도덕 형이상학 정초』 읽기 IV: 제3절 본문
『도덕 형이상학 정초』 제2절에서는 합리적 존재라면 누구나 따를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정언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자연 법칙을 따라 땅으로 떨어지는 야구공처럼) 그저 주어진 법칙을 따르는 게 아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적용되는 도덕 법칙을 입법legislate하는 목적의 왕국kingdom of ends의 시민이다. 이 입법의 과정에서 도덕적 주체를 스스로를 자율적인autonomous 존재로 여긴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도덕 법칙을 입법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더군다나 이 도덕 법칙은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명령함으로써 자유로운 이성의 사용을 보장한다.
정언 명령이란 게 있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칸트가 제2절에서 논증한 것은 인간들이 실제로 도덕 법칙을 따른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이 합리적 존재라면 그럴 것이란 말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정말 합리적인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욕망desire과 경향심inclination에만 휘둘리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인과 법칙causal laws에 지배받는 게 아닌가? 인간은 정말로 자율적인 존재인가? 우리에게 자유의지free will가 있는가?
이제 칸트는 모든 합리적 존재가 (도덕 법칙에 따르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를 갖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제1절과 제2절에서 칸트는 각각 도덕적 가치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관념과 합리적 행위에 대한 관념을 분석analyze함으로써 정언 명령을 정식들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제3절의 목표는 분석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다고 후험적a posteriori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자율적 의지의 담지자는 한 둘이 아니라 모든 합리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선험적 종합 판단이 필요한 까닭이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 세계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 행위의 원인은 의지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의지가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없다. 의지의 원인이 따로 존재한다면 - 그러니까 의지가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면 - 우리의 행위 역시 인과적 연결고리 속에 있을 것이 아닌가? 따라서 의지가 자유롭다면 그 의지는 반드시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 지배 받아야 한다. 자유의지는 스스로에게 법칙을 부과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와 도덕 법칙 아래 놓인 의지는 하나요 동일한 것이다"(4:447). 1
(정언) 명령을 따르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의 흔적은 보편 법칙의 정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편 법칙의 정식에 따르면 우리는 법칙이 될 것을 의지할 수 있는 준칙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 이 정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준칙이 법칙의 형식form of law을 갖추도록 하라는 것 뿐이다. 정언 명령은 법칙의 내용content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저 법칙이기만 하다면 어떤 내용이라도 좋다는 것이다. 고로 보편 법칙의 정식에 따라 행위하는 것과 자유의지를 갖고서 행위하는 것은 다른 것일 수 없다.
칸트에 따르면 합리적 행위는 반드시 자유를 상정하고서 일어난다. 도덕 법칙에 따라 행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합리적 존재는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정한다. (이에 따라 그 목적은 가치를 획득한다.)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표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The 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세계에 관해 사유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인 본체적noumenal 세계로 혹은 우리에게 드러나는 대로의 세계인 현상적phenomenal 세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갖는다는 자연 법칙은 오로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 다시 말해 현상계에서만 정립될 수 있다. 그렇다고 본체계에서의 인간을 더러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말그대로 그저 있을 뿐이며 우리는 그 세계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간이 정말로 자유롭다는 증거evidence나 지식knowledge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합리적 존재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할 근거를 갖는다. 스스로를 본체적 세계의 구성원으로 여기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도덕 법칙을 단순히 의식consciousness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에 의해 동기부여motivate받는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표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칸트는 말한다. 우리가 도덕률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자체 목적인 것들 (다시 말해 합리적 존재들)의 보편적 왕국이라는 고귀한 이상"(4:462) 때문이라고. 우리가 이 목적의 왕국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의 준칙들이 마치 자연 법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경써서 행위할 때"(4:463) 뿐이다.
리뷰 텍스트
Immanuel Kant, The Groundwork of Metaphysics of Morals, rev. ed., trans. Mary Gregor & Jens Timmerman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Christine M. Korsgaard, "Introduction," in Immanuel Kant, The Groundwork of Metaphysics of Morals, rev. ed., trans. Mary Gregor & Jens Timmerman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vii-xxx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Christine M. Korsgaard, Creating the Kingdom of End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C. A. Campbell, "Has the Self "Free Will"?," [1967] in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ed., Beginning Metaphysics: An Introductory Text with Readings (Blackwell Publishers, 1998): 376-389
- 해리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 등의 철학자는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가능compatible하다고 본다. 프랭크퍼트의 견해는 "Freedom of the Will and the Concept of a Person," The Journal of Philosophy 68(1) (1971): 5-20 등의 논문에서 잘 드러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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