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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가능성과 도덕적 책임

동경 TOKYO 2015. 10. 12. 15:15

“행위자는 오로지 그가 다른 방식으로 행위할 수 없었던 경우에만 자신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대안적 가능성의 원칙the principle of alternate possibilities”은 상당한 직관적 호소력을 갖는다(고 여겨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는 말은 왠지 이미 저질러진 행위에 대한 핑계로서 나름의 효력을 지니는 것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해리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는 이 원칙이 거짓이라고 말한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대안적 가능성)이 없는 경우와 도덕적 책임이 면제되는 경우가 같은 때는 많지만 전자가 후자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안적 가능성의 존재는 도덕적 책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기본적인 전략은 간단하다. 누군가에게 대안적 가능성이 열려있지 않았음에도 - 즉 다른 행위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음에도 -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도덕적 책임을 지는 경우를 제시하는 것이다.


I 강제 원리

잠깐 곁다리를 짚어야겠다. 프랭크퍼트는 대안적 가능성의 원칙과 함께 강제coercion에 의해서 하게 된 행위에 대해서는 도덕적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강제 원리coercion doctrine[각주:1]에 대해서도 논한다. 흔히 후자가 전자의 한 가지 형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행위자가 어떤 행위를 하도록 강제당했다는 사실은 (1) 그가 대안적 가능성을 박탈당했다는 것과 (2) 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지만 프랭크퍼트는 (2)가 (1)에 의해 함축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제 그가 대안적 가능성의 원칙의 거짓과 강제 원리가 대안적 가능성 원칙의 한 형태가 아님을 보이기 위해 제시하는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II 사례

철이[각주:2]는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낯선 행인의 지갑을 훔치겠다고 결정한다. 이때 누군가가 철이에게 그 행인의 지갑을 훔치지 않으면 매우 큰 위해를 가할 것이라며 그가 절도를 하도록 강제한다. 결국 철이는 지갑을 훔친다. 과연 철이는 절도 행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는가? 프랭크퍼트는 철이 자신의 결정decision과 다른 누군가의 위협threat이 철이가 실제로 지갑을 훔치도록 만드는 데에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에 따라 그 대답이 달라질 것이라고 보고 각각이 서로 다른 역할을 맡는 3가지 가상의 사례를 제시한다.


[1] 철이 1호는 매우 합리적인 구석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다. 한 번 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행위는 무조건하고야 만다. 상황이 바뀌더라도 최초의 결정을 철회하는 일은 절대 없다. 엄청난 손해가 따를 것이 분명하더라도 말이다. 때문에 위협은 철이 1호를 움직이는 데에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한다. (만약 철이 1호가 지갑을 훔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위협이 아무리 무시무시하더라도 그는 지갑을 훔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경우 철이 1호가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은 절도에 대한 그의 도덕적 책임을 제거하거나 줄여주지 않는다.

철이 1호 사례는 물론 강제 원리나 대안적 가능성의 원칙에 대한 반례가 되지 않는다. 반례는 강제가 있거나 대안적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책임이 성립하는 경우를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위협은 강제하는 효과coercive effect를 갖지 않았고 따라서 철이 1호로부터 대안적 가능성을 빼앗지도 않았다”(p. 832).

[2] 철이 2호는 위협에 의해 휘둘린다. 위협이 가해지자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애초에 자신이 내렸던 결정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로 하여금 절도를 하게 만든 것은 오로지 위협뿐이다. 최초의 결정은 아무런 인과적 효력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 철이 2호가 처음의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하겠지만 – 그리하여 그의 성품character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가할 수도 있겠지만 – 절도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프랭크퍼트의 직관이다. 물론 철이 2호 사례도 강제 원리나 대안적 가능성의 원칙에 대한 반례가 아니다.

[3] 철이 3호는 (1호와 달리) 위협에 무관심하지도 않고, (2호와 달리) 그것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가령 그는 위협에 무관심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절도를 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위협의 영향을 받아서 절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철이 3호는 스스로 절도를 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으며, 그에게 위협은 가해졌지만 그 위협에 의해서 절도를 한 것은 아니다. 절도 행위에 영향을 준 것은 오로지 철이 3호 자신의 결정뿐이다.

프랭크퍼트는 철이 3호의 절도 행위가 위협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그의 도덕적 책임은 경감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가 최초의 결정을 내리든 내리지 않았든 결국 절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점에서 대안적 가능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때문에 철이 3호의 사례는 대안적 가능성의 원칙에 대한 좋은 반례가 된다. 이 사례는 강제 원리가 대안적 가능성의 원칙의 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안적 가능성의 부재하지만 그것은 위협의 강제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각주:3]


III 반론

프랭크퍼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반론에 대응하고자 한다. “어쩌면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철이 3호가 그 행위가 아닌 다른 행위를 할 수 없었던 것 [다시 말해 그에게 대안적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 그가 합리적이며 [따라서 철이 1호와 달리 위협을 행위를 하는 데에 유관한 고려사항으로 받아들이며] 그가 마주한 위협이 합리적인 모든 사람을 움직일 만큼의 충분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p. 834; 강조 추가).

프랭크퍼트가 제시하는 일단의 대응은 “엄밀하게 말해서strictly speaking” 그 같은 위협의 존재가 곧 대안적 가능성을 없애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할 수 있었다”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러한 대응의 힘은 달라질 수 있다. 가령 “다르게 할 수 있었다”를 ‘다르게 하는 논리적 가능 세계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철이 3호에게 아무리 강한 위협이 가해지더라도 여전히 그는 다르게 할 수 있었다고 – 물론 결정론이 거짓인 한에서 – 말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다르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강한 요인이 없었다’라는 의미라면 여전히 위 반론은 완전히 반박된 것이 아니다. 이에 프랭크퍼트는 철이 4호의 사례를 통해 “다르게 할 수 있었다”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더라도 위 반론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음을 보이고자 한다.


[4] 그네는 철이 4호가 절도를 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은 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철이 4호를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한다. 만약 철이 4호가 절도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네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이 4호가 절도를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개입해서 철이 4호가 절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다. (철이 3호에게는 위협이 인과적 효력을 갖지는 못할지언정 항시적으로 가해졌다. 반면에 철이 4호에게는 위협이 (가해지기만 한다면) 인과적 효력을 가지지만 항시적으로 가해지지는 않는다.)

여기서 “다르게 할 수 있었다”를 달리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네가 무슨 짓을 할 것인지에 대해 여러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철이 4호가 (...) 다르게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충분한sufficient 조처”이기만 하다면, 철이 4호에게 절도를 하면 끝내주는 일자리를 준다고 제안을 하든, 최면에 빠뜨리든, 뇌에 전기신호를 가해서 절도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들든 상관없다.[각주:4]

이제 철이 4호가 스스로 절도를 하겠다고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그네가 애초에 개입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철이 4호는 절도에 대해 오롯이 도덕적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단순히 그네가 개입할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 즉 철이 4호에게 대안적 가능성이 없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의 도덕적 책임을 경감할 수 없다.

철이 4호에게 대안적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대안적 가능성이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절도를 한 것은 아니다. 절도를 한 것이 대안적 가능성의 부재를 원인으로 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안적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이 철이 4호가 절도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추측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IV 수정 원칙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대안적 가능성의 원칙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 원칙을 수정하여 제안할 수도 있다. “행위자가 다르게 행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했다면 그는 그 행위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p. 838; 강조 추가).

그러나 프랭크퍼트는 이 수정 원칙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누군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말할 때 우리가 그에게서 도덕적 책임을 면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대안적 가능성이 없었다는) 사실과 실제로 행해진 행위 사이의 인과 관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프랭크퍼트의 생각이다.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듣고서 그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귀속시키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오로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그들에게 대안적 가능성이 없었다는 사실은 실제로 행해진 행위의 유일한 원인이다)”고 본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가령 프랭크퍼트가 보기에 우리가 그에게서 책임을 면해주는 것은 (그가 어떤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동시에) “그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V 도덕적 책임의 근거

앞선 논의를 바탕으로 프랭크퍼트는 도덕적 책임의 근거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한다. 마지막 두 페이지에 걸쳐서 압축적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깊은 이해를 도모하기가 쉽지는 않다.

Person A

Person B

대안적 가능성 유무

X

X

대안적 가능성의 결여와 행위 사이의
인과 관계 성립 여부

O

O

행위에 대한
행위자의 욕망 유무

O

O

행위에 대한 욕망과
행위 사이의
인과 관계 성립 여부

O

X

 도덕적 책임

O

X

A는 (1) 여건상 절도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2) 바로 그러한 여건 때문에 절도를 했다. 동시에 (3) 그는 절도를 하기를 원한데다가 (4) 절도를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절도를 했다. 이 경우 A는 그 행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진다.

B는 경우가 좀 다르다. 그 역시 (1) 여건상 절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2) 이 때문에 그 행위를 행했으며 (3) 그 행위를 하는 것을 원하기도 했다. 다만 그 행위를 하기를 원했다는 것이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원인은 아니다. 이 경우 B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프랭크퍼트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B는 오로지 대안적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절도를 한 것(=B가 절도를 한 유일한 원인은 그에게 대안적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이다.[각주:5]


리뷰 논문

Harry G. Frankfurt, “Alternate Possibilities and Moral Responsibility,” The Journal of Philosophy 66(23) (1969): 829-839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Harry G. Frankfurt, "Freedom of the Will and the Concept of a Person," The Journal of Philosophy 68(1) (1971): 5-20

Harry G. Frankfurt, "What We are Morally Responsible for" [1983] in The Importance of What We Care Abou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95-103

T. M. Scanlon, What We Owe to Each Other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Ch. 6

Ken Gemes, "Nietzsche on Free Will, Autonomy, and the Sovereign Individual" in Ken Gemes & Simon May, eds., Nietzsche on Freedom and Autonom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33-49

Maudemarie Clark & David Dudrick, "Nietzsche on the Will: An Analysis of BGE 19" in Ken Gemes & Simon May, eds., Nietzsche on Freedom and Autonom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247-268


  1. 프랭크퍼트는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이 원리를 "the doctrine that coercion excludes moral responsibility"(p. 831)로 서술하고 있다. [본문으로]
  2. 프랭크퍼트의 논문에서는 "Jones"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3. 이런 이유로 인해 철이가 진정한 의미에서 강제된 것은 아니라고 볼 여지도 있다. 프랭크퍼트의 논문 p. 833에 관련된 진술들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4. 일상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위협이 아니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threat”은 어떤 행위를 하도록 행위자를 움직이는 힘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 위협이 될 수 있다. [본문으로]
  5. 철이 2호가 B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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