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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의 문제 II: 프랭크퍼트의 계층적 양립가능론 본문
해리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의 계층적 양립가능론hierarchical compatibilism
I 개념
특이하게도 프랭크퍼트는 인격체person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인격체는 많은 경우 '사람들people'의 단수형인 '사람'으로만 간주되는데, 그는 이러한 이해가 상당히 제한적이라고 지적한다. 인격체가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인격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종species으로만 인격체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 개념적으로는 인간이 아닌 종도 인격체가 될 수 있고, 인간도 경우에 따라 인격체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높은 수준의 지능을 갖춘 외계인이나 변신한 헐크 정도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프랭크퍼트는 "2차적 욕망second-order desire"을 참고하자고 제안한다. (2차적 욕망을 갖는 것이 곧 인격체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2차적 욕망이란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가령 사자들도 고기를 먹고 싶다거나 잠을 자고 싶다는 1차적 욕망을 갖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런 1차적 욕망들을 갖거나 갖지 않기를 욕망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는 어떤가? 상당수의 흡연자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과 끊고 싶은 욕망을 모두 갖는다. 이것들이 1차적 욕망이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은 제발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금연을 운운하는 흡연자들도 많이 있지 않은가? 이들은 담배를 피고 싶은 욕망보다 끊고 싶은 욕망을 더 욕망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2차적 욕망이다.
가령 "철이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한다"라는 문장은 철이의 1차적 욕망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실제로 철이가 이 욕망에 따라 행위할지도 알 수 없다. 만약 철이가 실제로 담배를 피운다면 이 욕망은 유효한effective 것이 된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 담배는 절대 피우지 않겠다는 욕망이 더 강하다면, 그래서 철이가 실제로는 담배에 손도 대지 않는다면,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욕망은 유효하지 않다. 그 욕망이 곧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철이가 실제로 어떤 행위를 하도록 만든 1차적 욕망 - 다시 말해 유효한 욕망 - 이 바로 프랭크퍼트가 말하는 의지will다.
이 의지 개념이 왜 중요한가? 프랭크퍼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사례를 비교한다. 먼저 그는 니코틴 중독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예를 든다. 이 의사는 자신도 니코틴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면 환자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니코틴에 대한 욕망을 갖고 싶어한다. 담배에 끌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이해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의사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망이 유효한 욕망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담배를 피우게 될 만큼 그 욕망이 강력하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담배에 대한 욕망을 원하지만 그것이 곧 자신의 의지가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담배에 대한 욕망에 대한 욕망이 있을 뿐, 담배에 대한 욕망은 그에게 없다.
하지만 기말고사가 내일인데 핸드폰 게임이나 하고 있는 학생은 어떨까? 공부에 집중하고자 하는 욕망은 물론 이 학생이 가진 수많은 1차적 욕망들 중에 하나다. 그러니까 공부에 집중을 못하고 게임을 계속하더라도 학생의 1차적 욕망은 충족될 것이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게임만 한다면 공부에 집중하고자 하는 1차적 욕망에 대한 2차적 욕망은 충족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이 학생은 공부에 집중하고자 하는 욕망이 유효하기를 - 그 욕망이 곧 그의 의지가 되기를 - 원한다. 그러므로 그는 공부에 집중하고자 하는 욕망을 원하면서 동시에 공부에 집중하기를 원한다. (공부에 집중하고자 하는 1차적 욕망이 스스로의 의지가 되기를 - 유효하기를 - 바라면서 동시에 실제로 공부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의사와 학생 모두 2차적 욕망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두 가지 2차적 욕망은 분명히 다르다. 프랭크퍼트는 학생이 갖는 종류의 2차적 욕망을 특별히 "2차적 의욕volition"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2차적 의욕을 갖는 것이 인격체의 본질이다. (프랭크퍼트는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인격체 개념을 들먹이며 논문을 시작한 것이다.) 반면 2차적 의욕을 갖지 않는 생물은 그저 '방종체wanton'에 불과하다. (실제로 2차적 의욕이 충족되는 지의 여부와는 무관하다.) 방종체는 많은 욕망들 중에 무엇이 자신의 의지가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방종체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2차적 의욕이지 사고능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자들도 세련된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사냥을 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짠다. 사고능력을 갖는다고 해서 2차적 의욕을 갖는 것은 아닌 것이다. 물론 사고능력을 갖추지 않고서 2차적 의욕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II 인격체와 방종체 그리고 자유의지
철이는 니코틴 중독자다. 그렇지만 그는 '중독을 꺼리는 중독자unwilling addict'다.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는 것이다. 보건소에도 찾아가보고 니코틴 패치나 전자담배를 써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담배를 피우려는 그의 욕망은 너무도 강력해서 이런 노력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철이의 욕망이 철이를 집어삼키는 것이다. 철이는 분명 담배를 피우려는 욕망과 끊으려는 욕망을 모두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들 1차적 욕망에 대해 중립적neutral이지 않다. 후자가 유효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담배를 끊으려는 욕망이 자신의 의지가 되었으면 하는 2차적 의욕을 갖는다. 때문에 우리는 철이가 인격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체가 어떤 욕망에 따라 행위할 때 그 욕망은 반드시 그가 욕망하는 것이거나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
인격체인 철이는 다름 아닌 자신의 2차적 의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규정한다. "나도 담배를 끊고 싶은데 뜻대로 되질 않네"라고 말할 때 이 '나'라는 것은 담배를 피우려는 욕망보다 끊으려는 욕망이 더 강하기를 바라는 인격체를 가리킨다. 물론 그가 담배를 피운 것은 엄연히 그 스스로의 욕망에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욕망이 그의 의지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에 대한 욕망이 그의 의지 - 그를 움직이는 유효한 욕망 - 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자유의지free will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담배를 끊으려는 1차적 욕망이 강해져서 철이가 담배를 끊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철이가 자신의 의지가 되기를 (2차적으로) 욕망하는 바로 그 1차적 욕망이 실제로 그의 의지가 된다면 말이다. 물론 이때 그는 자유의지를 갖는다.
오로지 2차적 의욕을 가진 인격체만이 자유의지를 누리거나 결여할 수 있다.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격체들뿐이다. 반면 방종체에게 자유의지란 애초에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1차적 욕망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자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그의 의지는 필연적으로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방종체인 민수는 담배를 피우려는 욕망과 끊으려는 욕망 중에 무엇이 자신을 움직이든 신경쓰지 않는다. "아무 욕망이나 나를 집어 삼켜라! 무슨 욕망이든지 상관없다! 그냥 욕망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민수를 인격체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민수가 이들 두 1차적 욕망에 대해 중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민수가 이들 1차적 욕망에 대해 똑같은 정도의 2차적 의욕을 갖는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1차적 욕망들 중에 어떤 것이 그로 하여금 행위를 취하도록 만들 것인지에 대해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방종체는 2차적 의욕을 가질 수조차 없다.
III 행위의 자유가 아닌 의지의 자유
그렇다보니 프랭크퍼트가 더욱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행위의 자유가 아니라 의지의 자유다. 철이도 행위의 자유는 가지고 있다. (민수 역시 마찬가지다.) 누가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라이터를 빼앗아 간다거나 담배를 낚아채지는 않으니 말이다.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욕망이 담배를 끊고자 하는 욕망보다 강한 경우라면 그는 언제든 담배를 피울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의지의 자유는 없다. 그는 담배를 끊으려는 욕망이 그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기를 바라는데 정작 그를 움직이는 것은 담배를 피우려는 욕망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자유는 의지의 자유를 갖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행위의 자유가 의지의 자유를 갖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령 담배를 피우려는 1차적 욕망이 담배를 끊으려는 1차적 욕망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철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담배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곧 철이가 2차적으로 의욕하던 바라면 어떨까? 그가 '중독을 반기는 중독자willing addict'라면 말이다. 이때 그는 자유의지를 갖는 것이 된다. 하지만 엄마가 철이 몰래 집 안에 있는 담배란 담배는 모조리 내다 버린 상황이라면 철이는 자신의 1차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이는 행위의 자유를 갖고 있지는 않다. 행위의 자유는 강요나 방해만 부재한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의지의 자유는 인격체의 2차적 의욕과 1차적 욕망이 합치될 때 성립할 수 있다.
IV 고차적 욕망이론higher-order desire theory에 문제는 없는가?
물론 2차적 욕망들 사이에도 충돌이 있을 수 있다. 기말고사를 앞둔 학생은 공부를 하고자 하는 1차적 욕망과 놀고자 하는 1차적 욕망을 갖는다. 하지만 그는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성실히 노력하는 학생이기에 공부를 하고자 하는 욕망을 잃고 싶지는 않다. 이것이 2차적 욕망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짓을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나도 생각없이 살면서 쓰레기같은 삼류드라마나 대중가요에서 쾌락을 얻는 그런 인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생은 왠지 놀고자 하는 욕망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 역시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3차적 욕망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3차적 욕망끼리 충돌한다면? 4차적 욕망끼리는?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물론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기우임에 분명하다. '나는 X를 하기를 원하기를 원하기를 원하기를 원하기를 원하기를 원하기를 원하기를 (…) 원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 두뇌를 8개 가진 옥타코어도 아니고 말이지… 그러나 프랭크퍼트는 이러한 생물학적인 근거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인격체가 어떤 1차적 욕망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decisively" 규정짓는다면 바로 그 1차적 욕망이 다른 고차적 욕망들과 "공명resound"한다는 것이다. 학생은 한편으로 이 모든 것을 접고 산으로 들어가 안빈낙도하는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 결국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라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 학생이 이렇게 공부를 하고자 하는 1차적 욕망을 통해 그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면 굳이 3차적 욕망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1차적 욕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규정짓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은 어떤가? 이런 상황이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가?) 1
V 프랭크퍼트의 이론은 어떤 강점을 갖는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학자들은 자유의지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도대체 자유의지가 있는 게 뭐가 좋다고 그렇게 자유의지에 집착하느냐는 자조 섞인 말들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프랭크퍼트의 이론은 자유의지가 왜 좋은 것인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의지의 자유를 갖는 것은 곧 2차적 (혹은 고차적) 욕망이 충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랭크퍼트는 다른 이론들이 이 점을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령 인과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유라는 건 오직 신만이 가지는 특권과도 같다는 로데릭 치솜Roderick Chisholm의 이론은 2 인간의 자유라는 기적이 대체 왜 좋은 것인지 설명해주지 못한다. 왜 실제로 행위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위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좋은가? 또 그의 이론은 자유를 인간에게 귀속시키는 사람들 중 다수가 왜 동시에 동물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다면 동물 역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VI 계층적 양립가능론
'중독을 반기는 중독자' 철이는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1차적 욕망이 담배를 끊고자 하는 1차적 욕망을 누르고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기를 2차적으로 욕망한다. 그런데 전자가 후자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그가 이들 1차적 욕망 중에 무엇을 2차적으로 원하는 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 그러니까 그가 설령 '중독을 꺼리는 중독자'였다고 할지라도 - 그는 담배를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철이는 어떠한 경우라도 그가 담배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담배를 피우는 게 반드시 비난받을 만한 일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논의를 위해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가족에게 약속했다고 가정한다.) 그렇지 않다. 프랭크퍼트의 이론에서는 (자신의 1차적 욕망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지가 자유롭지 않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바로 그가 '중독을 반기는 중독자'라는 데 있다. 철이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프랭크퍼트는 이것을 "[his] will is not free"라고 표현한다.) 그의 2차적 욕망이 무엇이든 간에 어차피 담배를 피우려는 1차적 욕망이 그를 움직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나 저러나 '중독자'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담배를 피운다. (프랭크퍼트는 이것을 "[smokes] freely and of his own free will"이라고 표현한다.) 담배를 피우려는 1차적 욕망이 그를 움직이기를 2차적으로 바라고 있기다는 - 중독을 반기고 있다는 - 말이다. 철이를 나무랄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내가 담배를 끊으려는 1차적 욕망을 2차적으로 원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나는 담배를 피우게 됐을 거야. 그러니까 담배를 피운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따위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받아칠 수 있다. "닥쳐. 어찌됐든 너는 담배를 피우려는 1차적 욕망이 너의 행동을 결정해주기를 - 너의 의지가 되기를 - 바랐잖아? 어쩔 수 없이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반가웠지? 응?" [도덕적 책임에 대한 프랭크퍼트의 또 다른 논문]
프랭크퍼트의 자유관은 따라서 결정론과 양립가능하다. 1차적 욕망들의 내용과 강도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1차적 욕망에 대한 2차적 욕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철이는 '중독을 반기는 중독자'와 '중독을 꺼리는 중독자'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어찌됐든 '중독자'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중독을 반기는지 꺼리는지에 따라 그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철이가 중독을 반겼다면 그는 자유의지를 갖는 것이 된다. 자신이 2차적으로 욕망에 1차적 욕망들이 따라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철이가 중독을 꺼려하며 어떻게든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금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는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그런 그에게 도덕적 비난을 가하기는 어렵다. (이 내용은 이른바 "리드的 자유"에 대한 윌리엄 로위William L. Rowe의 설명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계층적 양립가능론'이란 용어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차적 욕망은 결정되어 있더라도 우리의 자아self는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고차적 욕망을 가지므로 자유의지는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프랭크퍼트에 따르면 자유의지와 양립가능한 것은 결정론뿐만이 아니다. 1차적 욕망들이 순전히 우연chance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고차적 욕망이 어떤 1차적 욕망들을 향하는 지에 따라 자유의지는 여전히 가능하다.)
VII 비판
2차적 욕망을 비롯한 고차적 욕망들 - 가령 철이가 중독을 반길 것인지 꺼릴 것인지의 여부 - 역시 인과적으로 결정된 것임을 고려하더라도 프랭크퍼트의 이론은 여전히 설득력을 지니는가? 2차적 의욕이 이미 외부의 요인에 의해 결정된 경우에도 (혹은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경우에도) 그는 자유롭다고 볼 수 있는가? (수잔 울프Susan Wolf는 이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서 시작해 자신의 이론을 구축한다.) 가령 우리가 철이의 뇌에 전극을 꽂아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1차적 욕망뿐만 아니라 그 욕망이 의지가 되기를 바라는 2차적 의욕까지도 생겨나게 한다고 하더라도 철이는 자유롭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우리는 그를 중독자로 만드는 동시에 중독을 반기는 자로 만들기도 했다. 프랭크퍼트의 견해를 일관되게 따르자면 철이는 (그가 실제로 담배를 피우게 된다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담배를 피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가?
만약 프랭크퍼트가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2차적 욕망 혹은 의욕이 자유롭다 - 그 자신의 표현대로 "second-order desires or volitions are free" - 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이렇게 3 인과적 연쇄로부터 벗어난 "심층적 자아deeper self"를 인정한다면 2차적 욕망 혹은 의욕으로 그 정체성이 규정되는 인격체란 캠벨C. A. Campbell이 말한 '자아self'의 그저 조금 다른 형태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자아가 1차적 욕망들에 대해서도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 캠벨의 생각이라면 프랭크퍼트는 오직 2차 이상의 욕망들만이 그 통제 아래에 있다고 보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프랭크퍼트가 캠벨을 더러 자아의 독립성과 추상성을 맹신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그의 인격체는 무엇이 그렇게 다른가? 다만 1차적 욕망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않는 것이 그렇게 큰 차이일까? 여전히 그는 고차적 욕망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지 않는가? 이렇게 본다면 프랭크퍼트의 자아는 그저 캠벨의 자아를 한 발짝 물린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이러한 해결책을 취하는 일은 곧 프랭크퍼트 스스로 그의 의지론에서 가장 도드라진 특징으로 꼽는 결정론과의 양립가능성을 포기하는 일이 된다. 인과율이 1차적 욕망에만 미칠 - 그러나 2차 이상의 욕망들에는 미치지 않을 - 하등의 이유가 없다. 따라서 결정론이 참이라면 "심층적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 프랭크퍼트의 의지론은 결국 결정론의 거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프랭크퍼트는 자유의지의 성립 근거를 "인격체가 갖는 의지의 구조the structure of a person's will"(p. 6)에서 찾는다. 그러나 정말 1차적 욕망과 2차적 의욕이 합치되는 것만으로 자유의지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는가? 자유는 정말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규정하는 욕망(=2차적 의욕)의 충족에 불과한가? 진정한 자유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와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닌지? 개인은 언제나 세계 속의 개인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세계와 단절된 개인, 세계와 함께 호흡하지 않는 개인을 두고서 자유를 논하는 일은 과연 적절한 일인가?
리뷰 논문
Harry G. Frankfurt, "Freedom of the Will and the Concept of a Person," The Journal of Philosophy 68(1) (1971): 5-20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Harry G. Frankfurt, "Alternate Possibilities and Moral Responsibility," The Journal of Philosophy 66(23) (1969): 829-839
Harry G. Frankfurt, "The Importance of What We Care About," Synthese 52 (1982): 257-272
Harry G. Frankfurt, "What We are Morally Responsible for" [1983] in The Importance of What We Care Abou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95-103
안건훈 "자유의지와 결정론: 양립가능론자와 양립불가능론자의 논쟁," 김성재, 정인재 편, 『논쟁과 철학』,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 353-374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Freedom and Responsibility," in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ed.,Beginning Metaphysics: An Introductory Text with Readings (Blackwell Publishers, 1998): 358-374
William L. Rowe, "Two Concepts of Freedom," Proceedings and Addresse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Association 61(1) (1987): 43-64
C. A. Campbell, "Has the Self "Free Will"?," [1967] in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ed., Beginning Metaphysics: An Introductory Text with Readings (Blackwell Publishers, 1998): 376-389
Susan Wolf, "Sanity and the Metaphysics of Freedom," [1987] in Ferdinand Schoeman, ed., Responsibility, Character and the Emotions: New Essays in Moral Psych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46-62
- 프랭크퍼트 본인도 "Identification and Wholeheartedness" [1987] in his 『The Importance of What We Care Abou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159-76, p. 167에서 자신의 이 같은 해결책이 "불분명"하고 "심각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개리 왓슨Gary Watson이 그의 논문 "Free Agency," 『Journal of Philosophy』 72 (1975):205-20, p. 에서 이 점에 대해 비판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크퍼트는 이 문제가 자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해결책은 "Identification and Wholeheartedness," pp. 167-9에 제시된다. [본문으로]
- 치솜이 말하는 행위자agent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the unmoved mover를 떠올리게 한다. 치솜은 "prime mover unmoved"라는 표현을 쓴다. [본문으로]
- "What We are Morally Responsible for" in 『The Importance of What We Care Abou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95-103, p. 103에서 프랭크퍼트는 그가 이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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