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자유의지의 문제 III: 울프의 온전한 정신을 갖춘 심층적 자아 본문
수잔 울프Susan Wolf의 온전한 정신을 갖춘 심층적 자아Sane Deep-Self
자유의지는 대개 도덕적 책임과의 연관성 속에서 논의된다. 울프의 논문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온전한 정신을 갖추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덕적 책임을 안 또는 덜 묻는다. 그때 우리가 도덕적 책임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 사람은 책임을 지기에 충분히 성숙하거나 정보를 갖추었거나 온전한 정신을 갖추었는가? (…) 혹시 그는 최면 상태나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약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마디로 우리는 온전한 정신를 갖추지 않거나 덜 갖춘 사람에게는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거나 덜 묻는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의 구분에는 당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의 관심은 대체로 도덕적 책임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가능한지의 여부에만 쏠려 있는 것이다. 울프는 "온전한 정신sanity이 책임의 조건이라는 평범한 인식이 생각외로 책임이라는 이슈를 둘러싼 난해하고 다소 형이상학적인 문제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I 심층적 자아deep-self 견해에 대한 비판
어떤 행위자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이 만족되어야 할까? 그의 행위가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철이는 절대 소세지를 훔치고 싶지 않았는데 민수가 훔쳐오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한 경우 우리는 철이를 나무랄 수 없다. 철이의 도난 행위는 철이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이의 행위가 자발적 행위voluntary act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약 철이가 자발적으로 소세지를 훔쳤다고 하더라도 이 의지가 또한 철이의 심층적 자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여전히 철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가령 미친 신경생리학자가 철이의 뇌를 조종해서 소세지를 훔치겠다는 의지를 갖게 만들었다면 철이를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 않겠나? 철이를 비난할 수 있으려면 소세지를 훔치겠다는 의지가 단순히 철이 내부에in 있는 심리적 상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from 비롯된 것이거나 그에 의해by 승인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지의 원천이 되거나 의지를 승인하는 '그'가 바로 철이의 심층적 자아다.
심층적 자아 견해는 단일한 이론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이론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령 해리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의 계층적 양립가능론은 "행위자가 행위의 자유와 의지의 자유 모두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1차적 욕망에 따라 행위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2차적 욕망에 따라 1차적 욕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스로의 욕망들 중 일부는 그저 자신이 "푹 빠져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단순 욕구appetites나 조건 반사conditioned responses에 지나지 않지만, 다른 것들은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들이 좋은 것이라는 스스로가 내린 판단의 표현"이라는 개리 왓슨Gary Watson의 언급도 빼놓을 수 없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역시 비슷한 견해를 제시한다. "우리의 자유와 책임은 우리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고, 스스로를 비판하고, 스스로를 수정revise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이들은 모두 2차적 욕망을 갖고, 판단을 내리고, 스스로를 반성과 비판과 수정의 대상으로 삼는 심층적 자아를 인정하고 있다.
심층적 자아를 상정하는 이들은 모두 양립가능론을 내세운다. 우리의 행위는 무언가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바로 그 '무언가'는 우리의 심층적 자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정론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 심층적 자아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 혹은 누구인가?" 프랭크퍼트와 테일러도 이미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심각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심층적 자아를 결정하는 제2의 심층적 자아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제2의 심층적 자아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나에게 준 가치관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서 이 가치관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자문할 수는 있겠지만, 바로 이 한 발 물러서는 "나"는 내가 의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산물이다." 결국 심층적 자아 견해는 결정론에 대한 두려움을 잠재울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이 결정론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다만 인과적 연쇄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울프가 보기에 심층적 자아 견해는 이 인과적 연쇄를 이루는 고리를 하나 더 추가했을 뿐이다. 상황은 나아지기보다 도리어 더 복잡해졌다.
의견을 덧붙인다. 나는 심층적 자아 견해가 모색해볼 만한 해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적일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만약 심층적 자아를 결정하는 것이 제2의 심층적 자아가 아니라 제1의 심층적 자아가 외재화externalize 혹은 객관화objectify된 자아라고 보면 어떨까? 심층적 자아의 배후에 있는 것이 더 깊은 곳에 자리한 또 다른 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바깥에 있는 또 다른 자아라고 해보자는 것이다. 가령 왓슨이 말한 판단과 테일러가 말한 반성·비판·수정은 모종의 "가치 체계system of value" 혹은 "가치의 어휘vocabulary of worth"를 근거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 바탕이 자아의 육화된 형태embodiment라면 심층적 자아는 무한소급infinite regress의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헤겔的 해법은 물론 (헤겔의 철학이 그렇듯) 모든 것을 자아에 우겨넣으려는 무리한 시도가 아니냐는 비판에 부딪힐 수 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스스로를 폐쇄된 체계closed-system으로 내세우는 자아? 물론 헤겔과 제시된 헤겔的 해법이 그렇게 간단하게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별도의 복잡한 논의를 요구하므로 여기서는 넘어가기로 한다. (이런 해법은 수잔 울프의 이론과 유사하다. 울프가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로서 제시한 '온전한 정신'이란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와 자아가 연결될 때에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짚어본 헤겔的 해법이 울프의 이론과 얼마나 유사한지에 대한 평가는 양자에 대한 보다 철저한 검토를 요청한다. 다만 여기서는 울프가 세계를 객관화된 자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만을 언급해두기로 한다.)
II 온전한 정신을 갖춘 심층적 자아
심층적 자아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은 도대체 결정론을 두려워 할 이유가 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자유의지를 갖는다는 형이상학적 상태가 어떤 좋음good을 가져다주냐는 것이다. '우리의 심층적 자아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더라도 어찌됐든 우리 인간은 동물과 달리 표층적 자아를 통제하는 심층적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이 심층적 자아가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층적 자아가 제2의 심층적 자아에 의해, 다시 제2의 심층적 자아는 제3의 심층적 자아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므로 무한소급의 문제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심층적 자아가 자유롭지 않다면 어떤 의미에서? 울프는 심층적 자아가 온전한 정신을 갖추지 않은 경우를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극악무도한 독재자 A는 휘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는 아들 B를 후계자로 앉히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A가 공포정치를 펴나가는 것을 지켜보게 한다. 그러다보니 B는 자연히 아버지 A를 롤 모델로 삼게 된다. B는 자라서 A가 했던대로 독재를 이어나간다. 저항하는 사람은 죽여버리고, 기분이 내키는대로 아무나 끌고와 고문을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미 아버지 A는 세상을 떠났고 누가 B더러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B에게 "너는 정말로 지금의 네 모습이 좋니?"라고 물어보면 그는 "응"이라고 대답한다. 말하자면 그는 악랄한 독재체제를 이어나가려는 욕망을 욕망한다. 그의 심층적 자아도 그의 무자비함을 승인하는 것이다. 이때 B가 온전한 정신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B의 심층적 자아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광기에 사로잡힌 폭군을 승인하는 심층적 자아는 B 스스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릴 때부터 그를 둘러싼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심층적 자아 견해는 B가 여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직관에 반한다. (그렇다면 김정은 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독재자가 B의 현실적 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는 물론 일상적인 의미에서 멀쩡한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울프가 말하는 온전한 정신은 갖추고 있을 수도 있다. 뇌가 있으면 일말의 도덕적 사고능력은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무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좀 의심스럽긴 하지만…)
B는 분명 자신의 심층적 자아를 창조create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경험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심층적 자아는 여러 우연적 사실들과 완전히 추상되어서 형성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심층적 자아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도덕적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 심층적 자아를 스스로 창조할 수 없는 것은 B뿐만 아니다. 우리도 우리의 심층적 자아를 스스로 창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행위자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기 위한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온전한 정신이다. 자아는 어떤 식으로든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세계에 의해 모종의 통제를 받는다. 그건 B나 우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B의 자아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은 뭔가 좀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는 B를 더러 온정한 정신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온전한 정신을 갖추기 위해서는 (1) 자신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2)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옳은지 혹은 그른지를 알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지적으로cognitively 그리고 규범적으로normatively 인식하고 인정appreciate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 그것이 곧 온전한 정신을 갖추는 것이다.
결국 울프가 제시하는 온전한 정신을 갖춘 심층적 자아 견해란 기존의 심층적 자아가 온전한 정신을 갖출 것으 추가적으로 주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행위자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위할 수 있고, 자신의 심층적 자아에 따라 욕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심층적 자아가 온전한 정신을 갖추는 것이 그게에 도덕적 책임을 묻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우리가 B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심층적 자아가 불가피하게unavoidably 형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mistakenly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층적 자아도 불가피하게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심층적 자아는 온전한 정신을 갖추고 있어서 스스로를 교정correct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 우리 스스로의 심층적 자아에 대해 - 형이상학적으로는 책임이 없다. 그건 우리가 창조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적으로는 책임을 진다. 우리는 우리의 심층적 자아를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III 자기 창조·자기 수정·자기 교정
심층적 자아 견해를 제시한 프랭크퍼트와 왓슨, 테일러는 자기 수정self-revision 능력이 도덕적 주체로서 갖추어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스스로의 심층적 자아에 맞게끔 우리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으면 도덕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수정 작업의 기준이 2차적 욕망이나 가치 체계를 가진 심층적 자아가 된다.
그런데 B도 자기 수정 능력은 갖추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심층적 자아가 갖는 2차적 욕망이나 가치 체계를 참고하여 자신의 욕망과 행위들을 승인한다. 그런데 이 2차적 욕망과 가치 체계란 것이 좀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잘못된 - 온전한 정신을 결여한 - 심층적 자아를 갖게 된 것은 B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창조self-creation 능력을 도덕적 책임을 묻기 위한 근거로 삼아야 할까? 그건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사회나 관습으로부터 외따로 떨어져서 자신의 심층적 자아를 구성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이제 울프는 도덕적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유를 자기 교정self-correction 능력에서 찾는다. 자기 교정 능력은 "(1) 스스로를 분별있게sensibly 그리고 정확하게accurately 평가하는 능력과 (2) 그러한 평가의 결과에 따라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포함한다. 후자는 심층적 자아 견해에서도 제안했던 능력이고, 전자는 앞서 언급했던 인지적이고 규범적인 인식의 능력 - 온전한 정신 - 에 다름 아니다. 온전한 정신을 결여한 B가 자신의 성품character을 교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옳고 그름조차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악랄한 폭군 B의 예를 들었기 때문에 온전한 정신을 갖추는 것이 규범적 인식 능력과 동일한 것처럼 여겨지기 쉬운데 그렇지는 않다. 앞서 밝혔듯 온전한 정신은 규범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지적인 인식 능력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규범적 인식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당면한 상황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는 경우에도 온전한 정신이 결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온전한 정신을 갖추었다'는 말은 일상에서 사용되는 '정상이다'이나 '멀쩡하다' 같은 말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IV 예상되는 두 가지 반론 그리고 그에 대한 재반박
[반론 ①] 우리의 정신이 B같은 인간들의 정신보다 더 온전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지나친 확신over-confidence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가?
울프는 솔직히 "광범위한 상호주관적 동의widespread intersubjective agreement와 이 세계를 살아가고 우리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상당한 수준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 외에는 달리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겸손한 답변이지만 궁색한 것 같지는 않다. 울프의 말이다. "(…)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인지적·규범적 세계관이 맹점을 드러낼 것이라는 기대는 (…) 합당한reasonable 듯하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의 세계관에 오류가 있음이 들어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책임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오직 여기서, 우리가 가진 능력들을 가능한 한 잘 그리고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발전시킬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s와 가치관values을 근거로 해서만 가능하다."
[반론 ②]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지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이해understand하고 인정하는 능력이 곧 온전한 정신이라는 것이 울프의 견해다. 그렇다면 세계에 대한 거짓된 믿음false beliefs을 갖거나 그른 행위을 행하는 순간 그 사람은 온전한 정신을 갖추지 못한 것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학 시험에서 점수가 적게 나오면 수험자가 바보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수험자가 꼭 바보일 것이란 보장은 없다. 다른 과목에 대해 걱정하느라 시험에 집중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를 하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사람이 온전한 정신을 결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가 그의 행위에 대해 숙고하기를 귀찮아 했다거나 욕심이 너무 지나쳤던 것이 이유일 수도 있다. 온전한 정신은 인지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능력ability이다. 그리고 이 능력을 갖는 것과 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나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위 반론에 대해 대응해보려 한다. 온전한 정신을 갖추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지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능력이다. 여기에 행위하는 능력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위 반론은 그른 행위가 곧 온전한 정신의 결여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다.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능력이 온전한 정신을 구성한다고 잘못 이해한 것이다.
또 나는 울프가 거짓된 믿음을 갖는 경우 온전한 정신을 결여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 '그렇다'는 대답해야 했어야 한다고 본다. 오히려 울프에게 불리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문제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온전한 정신' 개념에 대한 오해를 차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 그럴까? 'sanity'든 '온전한 정신'이든 일상적으로는 어떤 사람의 정신적 능력이 결함을 안고 있는 경우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그것이 생물학적인지 아닌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울프가 제시하는 '온전한 정신'은 이런 일상적 의미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의미specialized sense"를 지닌다. 그는 (1) 자신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2)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옳은지 혹은 그른지를 아는 능력이 곧 온전한 정신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온전한 정신'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거짓된 믿음을 갖는 경우에는 온전한 정신을 결여한 것이 맞다. 가령 철이는 영희에게 커피를 가져다 주려고 한다. 그런데 평소 영희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던 민수가 커피에 청산가리를 탄다. 물론 철이는 이걸 전혀 모르고 있다. 철이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철이가 가져다 준 커피를 마신 영희가 죽게 되더라도 우리는 철이를 비난할 수 없다. 철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철이는 "온전한 정신"을 순간적으로나마 결여한 것이다. 그렇다고 철이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신병자나 광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울프는 위 반론을 재반박하면서 이 점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도 나의 이러한 대응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책임을 지기에 충분히 정보를 갖추었[는가?]" 이 질문에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행위자는 도덕적 책임을 덜 지거나 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울프는 물론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직관이다. 이 직관이 형이상학의 문제에서도 비중있게 다루어져야 한다며 논문을 시작한 것이 울프 아니었던가?
리뷰 논문
Susan Wolf, "Sanity and the Metaphysics of Freedom," [1987] in Ferdinand Schoeman, ed., Responsibility, Character and the Emotions: New Essays in Moral Psych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46-62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안건훈 "자유의지와 결정론: 양립가능론자와 양립불가능론자의 논쟁," 김성재, 정인재 편, 『논쟁과 철학』,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 353-374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Freedom and Responsibility," in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ed.,Beginning Metaphysics: An Introductory Text with Readings (Blackwell Publishers, 1998): 358-374
Michael L. Rowe, "Two Concepts of Freedom," Proceedings and Addresse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Association 61(1) (1987): 43-64
C. A. Campbell, "Has the Self "Free Will"?," [1967] in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ed., Beginning Metaphysics: An Introductory Text with Readings (Blackwell Publishers, 1998): 376-389
Harry G. Frankfurt, "Freedom of the Will and the Concept of a Person," The Journal of Philosophy 68(1) (1971):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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