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칸트 미학 I: 미의 분석론 본문
『순수 이성 비판』이 교조주의적인 합리론도 회의주의적인 경험론도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철학적 기획이었듯 『판단력 비판』역시 합리주의적 미학과 경험주의적 미학의 구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다. 합리주의적 미학에 따르면 아름다움beauty은 대상의 기하학적 속성들에 의해 결정되는 대상 자체의 성질이다. 때문에 어떤 대상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도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칸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명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컨대 장미가 아름답다는 판단은 모종의 원칙들을 따라 나온 것이 아니다. 한편 경험주의적 미학은 아름다움이 주관적 만족gratification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칸트의 생각은 다르다. 어떤 표상이 아름답다는 판단은 주체의 평가를 반영하는 것으로 단순히 판단 주체가 느낀 쾌락sensation에 대해 보고하기 위한 게 아니다.
칸트가 보기에 미적 판단은 주관적subjective이면서도 보편적universal이어야 한다. 먼저 이 주관성이란 어떤 대상이 아름답다는 판단이 인지적cognitive하지 않다는 점에서 성립한다. 대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개념concept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미적 판단은 보편적 동의를 요구한다. 미적 판단은 경험주의 미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보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senses은 쾌적한agreeable 것에 관심을 갖고, 이성reason은 도덕적으로 옳은morally right 것 - 선good - 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보니 쾌적함을 좇는 경향심inclination이나 도덕적 옳음을 좇는 존경심respect은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어디까지나 감각과 이성의 관심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미taste는 감각이나 이성과 달리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서 그것을 좇도록 부추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취미 판단은 자유롭다. 이론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관심에서 벗어난 취미 판단은 그래서 관조적contemplative 태도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종류의 쾌pleasure가 호의favor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어떻게 주관적이라는 취미 판단이 동시에 보편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그 근거가 없다면 주관적 취미 판단은 보편성을 담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근거란 것이 개념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 순간 취미 판단은 주관성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것을 "인식 일반cognition in general의 가능성을 위한 주관적 조건들의 유희interplay"에서 찾는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일단 지식은 보편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의 성립 가능하기 위해 만족되어야 할 인지적 조건들 - 직관intuition에 주어진 것들을 조합하는 능력인 상상력imagination과 그것을 다시 개념을 통해 조합하는 능력인 지성understanding - 역시 보편적으로 소통가능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미적 판단을 내릴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표상은 다름 아닌 이들 인식 일반의 조건 - 상상력과 지성 - 사이의 유희를 일으킨다. (물론 여기에 개념을 동원하는 특정한 인지적 판단은 없다.) 보편적으로 소통가능한 느낌 - 공통감각sensus communis - 을 전제presuppose하기 위한 선험적a priori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근거에 도달한 것은 물론 경험적 관찰empirical observation을 통한 것이 아니다. 선험적 논증transcendental argument에 의한 연역deduction이다. 여기서 미적 판단이 어떻게 필연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공통감각을 전제할 때 우리는 우연적 사실들의 관찰에 의존하지 않는다. 공통감각을 전제할 합당한 이유는 인식 일반의 보편적 소통 가능성이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 보편적 소통 가능성의 조건이 필연적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물론 이 필연성은 개념으로부터 도출해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칸트는 미적 판단이 "논리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apodictic" 것이 아니며 "보편적 규칙의 일례example"로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만 실례적exemplary이라 불릴 수 있다." 더욱이 공통감각은 우리가 전제한 비규정적 규범으로써 다만 우리가 미적 판단을 내릴 때 의존하는 어떤 가정presumption이 이것을 증명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공통감각이 내포하는 것은 당위이다. "(…) 우리의 판단이 모든 사람들과 일치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합치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 따라서 공통감은 (…) 단지 하나의 순전한 이상적 규범이다."
Fine art must be free art in a double sense: it must be free in the sense of not being a mercenary occupation and hence a kind of labor, whose magnitude can be judged, exacted or paid for according to a certain standard; but fine art must also be free in the sense that, though the mind is occupying itself, yet it feels satisfied and aroused (independently of any pay) without looking to some other purpose.
칸트의 미학은 대상에 대한 미적 판단뿐만 아니라 예술 창작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만약에 예술 창작을 규정하는 규칙이 없다면 어떻게 창작 행위를 쾌적함을 좇는 행위나 도덕적 옳음을 좇는 행위와 구별할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칸트 자신도 "아름다움에 관한 학science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창작품에 선행하는 규칙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예술이라고 볼 수 없다"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천재성genius에 대한 논의가 등장한다. 천재성이란 간단히 말해 창작을 하기 위한 재능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느 재능과는 달라서 천재는 그 어떤 규칙에 의해서도 규제받지 않으며 스스로 창작을 위한 규칙을 세운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의 창작을 위한 규칙은 천재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미학이 천재를 밀어내고서 그 규칙을 세우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싸구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나라 이름 200개 외우고 이런 건 천재가 아니다.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 규칙을 스스로 세우는 천재들이라면 예술의 기능은 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외에 (이 규칙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도 하는걸까? 칸트는 이른바 순수 예술과 참여 예술 사이의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다. 다만 그는 우리가 대상의 목적purpose을 표상하지 않은 채로 그것을 지각할 때 바로 그 대상의 합목적성의 형식form of purposiveness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망치를 지각할 때 곧장 그것의 목적을 표상하게 된다. 무엇을 위하여 망치가 만들어졌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때문에 망치가 아름답다는 판단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가 들판에 떼로 피어 있는 장미를 볼 때 우리는 도무지 그 장미의 목적을 표상할 수가 없다. 왜 하필이면 장미들이 이곳에 이렇게 많이 피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왜 하필 빨간색인지, 왜 이런 달콤한 향을 풍기는지를 표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as if 이 장미들의 배후에 어떤 목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목적의 내용은 여전히 표상할 수 없다. 우리가 장미에게서 합목적성의 형식만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먼저 이 초월적 주체에 대해서 한마디 해야 한다. 시간과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주체말이다. 이 주체가 갖는다는 공통감각이란 것도 결국 미적 판단의 가능성의 조건들이라는 무시간적인 불변자들timeless invariants에 근거해 전제된 것이었다. 우연적 욕망으로부터 미적 판단을 분리시켜 놓은 것은 어찌보면 칸트 미학의 기여라면 기여이지만, 미적 판단과 창작의 가능성의 조건들이 항상 이런 것들이었고 또 이런 것들일 것이라는 식의 생각에 문제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가령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미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은 판단을 내리는 현실의 개인들과 판단의 대상이 되는 지금의 표상들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본다. 시간과 역사 속의 이 개인들이 없는 한 미적 판단은 고사하고 그 어떤 종류의 판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판단 주체와 표상들의 역사성은 판단의 가능성의 조건들이 결코 불변적인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생각이다. (사실 이런 식의 비판은 헤겔이 앞서 제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칸트는 주체로 미학의 객관성을 대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아있는 객관성이란 것도 기실 주체를 통해 근거지어진 것이었다. 아도르노는 칸트 미학의 탈역사성만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기실 그가 칸트 미학에서 발견한 문제는 '초월적' 주체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초월적 '주체'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예술 작품을 "오로지 작품을 관조하거나 창작하는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바라보았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칸트는 예술 작품이 그 자체 내에 진리 내용truth-content을 품고 있을 가능성을 간과했다. 어쩌면 칸트는 그 자신이 비판했던 경험주의적 미학이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도르노는 예술 작품에 내재하는 인지적 요소가 결코 창작자의 의도나 관객의 감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칸트는 바로 이 인지적 요소를 철학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합리주의 미학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름다움을 순전히 객관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아도르노에게 예술 작품이란 그저 주체에 의해 평가되고 인식되는 무기력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 작품은 그 자체 내에 주관적 계기를 품고 있다. 바로 작품이 인식을 시도하는 것이다.)
리뷰 텍스트
Immanuel Kant, Critique of the Power of Judgment, ed. Paul Guyer, trans. Paul Guyer and Eric Matthew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p. 89-127 (Analytic of the Beautiful)
Simon Jarvis, "Art, Truth and Ideology," in Adorno: A Critical Introduction (New York: Routledge, 1998): 90-123 (Chapte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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