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칸트 미학 II: 숭고의 분석론 본문
I 미와 숭고
아름다움beauty과 숭고sublimity는 물론 적잖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 자체로 쾌pleasure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한 가지다. 쾌락sensation이나 도덕적 옳음moral rightness을 통해 쾌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쾌적한 것들을 지향하는 감각sense의 판단이나 선good을 향하는 이성의 논리적이며 규정적인determinate 판단이 전제되지 않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렇지만 양자에 대한 판단이 개념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때 미와 숭고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비규정적indeterminate으로 남기에 명제적 지식을 불리는 데 기여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인식 일반cognition in general의 가능성을 위한 주관적 조건들 - 상상력imagination과 지성understanding - 이 (표상이 주체에게 주어졌을 때) 자유롭게 유희한다는 점에서 미의 판단이 단칭적이고 주관적인 것임에도 보편적 동의를 규범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주장의 선험적a priori 근거를 찾았다. 단칭성과 주관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보편성까지 갖추는 것은 숭고의 판단도 마찬가지다. (그 근거를 찾는 방식도 구조적으로는 유사하다. 하지만 분명한 내용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한계 속에서 존립하는 대상의 형식form에 관련된다. 반면에 숭고는 대상 혹은 대상의 자극 내에 무제한성limitlessness이 표상되는 동시에 그 대상이 하나의 총체성totality으로서 사유되는 한에서 몰형식적formless인 대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미는 지성의 비규정적 개념의 현시presentation로 간주되지만 숭고는 이성reason의 비규정적 개념의 현시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에서의 만족은 질quality의 표상과 연관되는 반면 숭고에서의 만족은 양quantity과 연관된다"(『판단력 비판』 §23 5:244). 칸트 책에 직접 인용을 해도 이해가 어느 정도되는 구절이 있다니… 미와 숭고가 전달해주는 쾌 역시 성질이 좀 다르다. 아름다움은 활력을 직접적으로 가져다주며 자극charms이나 유희하는 상상력과 양립가능하다. 그러나 숭고의 쾌는 순간적으로 활력이 감소되고 난 뒤에 나타나며 자극과도 양립불가능하다. 숭고의 감정은 어쩐지 엄숙한serious 것이 된다. 상상력은 유희한다기보다는 이성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름다운 대상에 우리는 매혹attract된다. 그런데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는 매혹될 뿐만 아니라 반감repel을 느끼기도 한다. 어째서 그럴까?
그 답으로 가는 단초는 이미 제시되었다. 하지만 "미와 숭고 사이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내재적인 차이"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 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아름다운 자연물들은 그 형식 내에 합목적성purposiveness을 갖는 것으로 표상된다. 덕분에 우리의 판단력power of judgment의 관점에서 대상들은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예정되어predetermined 있는 듯 보인다. 자연적 아름다움은 그래서 만족을 준다. 반면 숭고를 자아내는 대상은 그 형식 면에서 판단력에 대해 반목적적contrapurposive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현시 능력 - 상상력 - 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그러나 숭고의 판단이 합목적성의 표상을 전혀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해다. 숭고의 판단에서 주체는 대상의 형식에서 반목적성을 발견하지만 이제 더 고차원적인 합목적성higher purposiveness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고차원적 합목적성은 미적 판단에서의 합목적성과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대비된다. (1) 합목적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미적 판단 자체다. (2) 상상력이나 판단력이 아니라 이성의 관점에서 합목적적이다. 이들 차이점은 계속해서 살펴볼 양자의 다른 차이점들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파악된다.) 칸트는 이것을 더러 우리의 상상력이 "폭력violence" 아래에 놓인다고까지 표현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숭고의 판단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숭고는 몰형식적인 대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했던가? 숭고의 감정을 자아내는 것은 감각적 형식sensible form에 담길 수 없다. 그러니 상상력이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나서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개념을 통해 직관의 통일성을 구축하는 지성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상상력과 지성의 유희와 더불어 미의 판단이 있었다면 숭고의 판단은 상상력과 이성의 유희와 함께 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상상력 그리고 다름 아닌 이성의 유희, 이것은 미와 숭고 사이의 또 다른 두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설명해준다. 주체가 미의 판단을 내릴 때에 보편적 동의를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공통감각sensus communis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공통감각을 전제하기 위한 선험적 근거는 인식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들인 상상력과 지성의 유희에서 발견되었다. 숭고의 판단이 보편적일 수 있는 근거도 유사한 방식으로 마련된다고 했던가? 그렇다. 그 근거는 바로 도덕적 감정moral feeling의 보편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숭고 판단에서 상상력이 관계를 맺는 이성은 주지하듯 도덕적 감정의 보편성을 정초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미의 판단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취미taste를 결여하고 있다고 나무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숭고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감정feeling을 결여하고 있다고 나무랄 수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은 무엇일까? 칸트의 말이다. "(…) 숭고한 것은 (…) 오로지 이성의 관념들ideas에만 관련된다. (…) 그러므로 폭풍우에 요동치는 광활한 대양은 숭고하다고 불릴 수 없다"(『판단력 비판』 §23 5:245-246). 숭고한 것은 대상이 아니다. (물론 아름다움 역시 대상이 객관적으로 갖는 속성일 수는 없다. 그러나 대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은 무시무시한 대양의 얼굴을 마주한 자가 직관을 통해 얻는 감정이다. 그리고 이 감정을 갖기게 적절한 기분mood에 빠진다는 것은 곧 마음을 온갖 종류의 관념들로 가득채운다는 것을 말한다. 숭고는 "자연 내의 그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다. 오직 마음 안에만 있을 뿐이다"(『판단력 비판』 §28 5:264).
스탠포드 철학 사전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칸트의 미학과 목적론Kant's Aesthetics and Teleology" 항목은 미와 숭고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약간의 변형을 가해 싣는다.
미 |
숭고 |
공통점 |
|
① 대상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객관적 성질이 아니다. ② 판단에 대한 보편적 동의를 규범적으로 - 필연성을 가지기 때문에 - 요구할 수 있다. |
|
차이점 |
|
오직 쾌만을 동반 |
불쾌displeasure를 동반 |
대상의 형식에서 합목적성을 발견 |
대상의 형식에서 반목적성을 발견 |
보편적 타당성에 대한 요구가 인식 일반의 조건들의 보편적 타당성에 의존 | 보편적 타당성에 대한 요구가 도덕적 감정의 보편적 타당성에 의존 |
대상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이 가능 |
대상이 숭고하다고 말할 수 없음 숭고는 이성의 이념으로서 마음에 내재 |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관계 |
상상력과 이성 사이의 관계 |
II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
칸트의 숭고를 이해하는 데 미와의 비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우리는 숭고만을 두고 논의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숭고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칸트는 숭고를 다시 수학적mathematical 숭고와 역학적dynamical 숭고로 나눈다. 수학적 숭고의 감정은 너무나도 커서 그것을 파악하려는 우리의 상상력을 압도해버리는 대상이 주어졌을 때 일어난다. 반면 역학적 숭고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물리적인physical) 무력함powerlessness을 자각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고 두려운 대상을 마주했을 때 발생할 수 있다. 엄청난 크기와 힘, 그것이 숭고의 감정의 발단이 된다. 상상력이 압도당하거나 스스로의 무력함을 느끼는 일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숭고가 불쾌를 동반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하지만 이 불쾌는 쾌로 반전된다. 칸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마음의 움직임은 (…) 진동 - 그러니까 하나의 같은 대상에 대한 반감에서 매혹으로의 재빠른 전환 - 에 빗댈 수도 있을 것이다"(『판단력 비판』 §27 5:258). 그러나 이 불쾌는 단순히 쾌로 반전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숭고는 "오로지 불쾌를 통해서만 가능한 쾌"이다(『판단력 비판』 §27 5:260). 그러므로 그것은 "부정적 호감negative liking"이다. 그런데 이 반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먼저 아주 커다란 규모의 것이 경험적으로 주어진다. 절대적 총체성을 요구하는 이성은 이때 상상력에게 그 대상을 파악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상상력이 무한the infinite으로 나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 엄청난 크기에 상상력이 압도당하고 말았을 때 초감각적 능력supersensible faculty인 이성이 나선다. 우리는 이성은 마침내 전체로서의 무한을 사유할 수 있다. 수학적 숭고에서 불쾌의 쾌로의 반전은 이렇게 일어난다. 상상력을 마비시킬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대상은 대개가 인공물이라기보다는 자연물들일 것이다. (칸트的 숭고의 감정이 자연물을 대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예술 작품도 숭고의 감정을 자아낼 수 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칸트는 수학적 숭고를 논하면서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나 로마에 있는 聖 베드로의 바실리카를 함께 언급하지만 이것들이 곧 수학적 숭고를 일어키는 대상들의 예로 제시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아주 높은 산과 창대한 바다는 수학적 숭고의 예로 적합하다. (미의 판단과 마찬가지로 숭고의 판단 역시 대상의 목적을 표상할 수 없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동물들은 숭고의 감정을 일으킬 수 없다. 칸트는 동물들의 존재 목적을 표상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역학적 숭고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과 천둥을 몰고오는 구름, 화산과 태풍과 같이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들이 몰고 오는 위험에 처해있다면 숭고의 감정은 불가능하다.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숭고의 감정은 개뿔… 그것은 오직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이 안전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 그래서 사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 가능하다. "[자연의] 불가항력은 자연적 존재로서 간주되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물리적인 무력함을 자각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판단을 내릴 능력과 자연에 대한 우월성[을 우리가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 인간이 [자연의] 지배에 굴복함에도 우리 인격 내의 존엄성은 떨어지지 않는다"(『판단력 비판』 §87 5:261-262).
인간의 다른 능력이 감당할 수 없었던 크기와 힘이 불쾌를 일으킬 때도 이성은 여전히 그 크기와 힘이란 것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불쾌는 쾌로 반전된다. 이것이 숭고다. 결국 숭고란 감정은 이성의 (자연에 대한) 우월성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것이다. 자연물이 아무리 커다랗고 강력하더라도 이성을 넘어설 수는 없다. 이성은 무한으로 나아갈 수 있을뿐만 아니라 기실 자연을 넘어선 무엇이니까 말이다.
리뷰 텍스트
Immanuel Kant, Critique of the Power of Judgment, ed. Paul Guyer, trans. Paul Guyer and Eric Matthew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p. 128-159 (Analytic of the Sublime)
Hannah Ginsbord, "Kant's Aesthetics and Teleolog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4 Eidition), ed., Edward N. Zalta, URL = <http://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14/entries/kant-aesthetics/>
박지용 「칸트의 숭고에 관하여: 미판단과 숭고판단의 연속성을 중심으로」『시대와 철학』 제22집 제2권 (2009): 15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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