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규범 이론의 구조: 행위자 중립성 vs. 행위자 중심성 본문
여럿은 거의 항상 어떤 식으로든 분류될 수 있다. 규범 이론normative theory 역시 몇 가지 방식으로 나뉠 수 있다. 한 가지 구분은 행위자 중립적agent-neutral 이론과 행위자 중심적agent-centered 이론이다. 행위자 중립적 이론은 모두에게 똑같은 목표를 부여한다. 다른 사람의 목표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곧 나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대표적인 예다.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을 증진하라고 말할 뿐, 특정한 누군가의 행복을 증진시키라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리주의에 따르면 나의 입장에서 상황이 나아지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도 상황은 반드시 나아진다. 반면 행위자 중심적 이론은 여러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것을 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론에 따라 내가 해야할 일이 다른 사람이 해야할 일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때 나의 목표는 오로지 상대방의 목표와 조화되기 어렵다. 여기에 해당하는 이론에는 나에게는 나의 좋음을 좇으라고 말하고, 너에게는 너의 좋음을 좇으라고 말하는 이기주의egoism가 있다. (그러나 이기주의가 남을 해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자신의 좋음을 확보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로운 경우에는 남을 도와주는 것도 얼마든지 허용되며 심지어는 요구되기까지 한다.)
다음으로 결과주의consequential 이론과 비결과주의non-consequential 이론 사이의 구분이 있다. 전자는 어떤 것이 산출하는 결과의 가치에 따라 그것을 평가하며, 후자는 결과 외의 다른 요소들도 고려한다. (아마도 이런 식의 구분이 더 널리 알려져 있을 것 같다.) 만약 두 행위의 결과가 같다면 결과주의 이론은 어떤 행위를 취하든 신경 안 쓴다. 하지만 비결과주의 이론은 아무리 결과가 같더라도 두 행위에 대해 다른 도덕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쾌락적 이기주의hedonistic egoism는 결과주의적 이론에 속한다. 행위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쾌락이 발생되었는지가 유일한 평가 척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행위자 중심적 이론에 속하기도 한다.) 비결과주의적 이론으로는 칸트的 의무론deontology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행위자 중심적 이론이기도 하다.)
행위자 중심적 |
행위자 중립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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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주의 |
쾌락주의적 이기주의 |
공리주의 |
비결과주의 |
칸트的 의무론 (?) |
? |
한편 행위자 중립적이면서 동시에 비결과주의적인 규범 이론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논문의 저자인 제임스 드라이어James Dreier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규범 이론이라도 "결과주의화consequentializing"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상당수의 비결과주의자들은 다섯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 특정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도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결과가 좋더라도 그 행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다섯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나쁜 결과다." 결과와는 독립적으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믿는 비결과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약속이 지켜지는 것이 곧 좋은 결과다." 사정이 이렇다면 칸트的 의무론과 같은 비결과주의 이론은 기실 결과주의 이론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된다. (참고로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자신의 저서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 1』에서 이런 결과주의화 전략이 교묘한 속임수라고 비판했다.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거다. 그런데 드라이어는 노직의 저서 중 정확히 어느 부분에 이러한 비판이 나타나는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결과주의화" 전략에 문제가 없다면 결과주의/비결과주의 구분은 사실상 허구가 된다. 때문에 드라이어는 결과주의/비결과주의 구분보다는 차라리 행위자 중립적/행위자 중심적 구분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2
그런데 드라이어가 보기에 지금까지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이들 두 가지 구분을 혼동해왔다. 가령 사무엘 셰플러Samuel Sheffler와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은 행위자 중립적 이론을 "결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드라이어는 (I) 이런 혼동이 별 문제 없는 단순한 말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중대한 철학적 문제라고 주장한다. 가령 그는 행위자 중립적 이론과 결과주의를 뒤섞게 되면서 결과주의를 옹호하는 논변에 지나치게 힘이 많이 실리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어서 (II) 여러 메타윤리 이론들이 어떻게 행위자 중립적 이론과 행위자 중심적 이론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I 오해
1명을 죽이면 5명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이다. 비결과주의자들은 그래도 1명을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이때 결과주의자들은 뭐라고 받아칠까? "나머지 5명의 목숨은 좋은 게 아니야?" 5명의 목숨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반대하기는 힘든 것 같다. 결과주의자들은 더욱 밀어붙힌다. "그렇지? 나머지 5명의 목숨도 좋은 거지? 그런데 좋음을 증진시키지 않아야 되는 경우가 있겠어?" 비결과주의들은 당연히 그런 경우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아무리 좋음을 증진시키더라도 해서는 안 될 행동 - 1명을 죽이는 것 - 이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대체 왜 그 1명을 죽이면 안 되는 거지? 좋음을 증진시키는 - 나머지 5명을 살리는 -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지점에서 비결과주의자들은 곤경에 처한다. 어떤 식으로 답하더라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왜냐하면 1명을 죽이지 않는 것이 좋은 결과니까!"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비결과주의자를 포기하고 결과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그 외에 가능한 대답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어!" 따위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근거를 보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대체 그 규칙을 왜 따라야 되는가? (스마트J. J. C. Smart는 이런 맥락에서 비결과주의자들이 규칙을 "숭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3
해결책은 무엇일까? 해결책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결책을 찾을 필요도 없다. 사실 비결과주의는 곤경에 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해결할 문제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문제처럼 보이는 것을 해소하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사실은 모든 이론이 결국은 결과주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결과주의 이론을 "결과주의화"하면 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은 결과주의 對 비결과주의의 싸움이 아니다. "결과주의화"가 가능하다면 양자 모두 결과주의 이론으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양자는 여전히 충돌한다. 이 논쟁은 기실 행위자 중립적 이론 對 행위자 중심적 이론의 싸움이다.
드라이어는 "객관성objectivity"의 두 가지 의미를 혼동하기 때문에 이 같은 오해를 하게 된다고 말한다. 어떤 것이 객관적이라는 말은 ① 그것이 주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지만 ②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 먼저 나머지 5명의 목숨은 ①의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좋은 것일까? 아무리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데 파리 목숨은 함부로 여겨도 되는 거야? - 즉 사람의 목숨이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나쁘다는 주관적 판단이 있을지라도 - 혹은 사람의 목숨이 갖는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세계에 없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의 목숨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다. 어떤가? 사람의 목숨이 ①의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좋은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나머지 5명의 목숨이 ①의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의 목숨이 ②의 의미에서까지 - 즉 행위자 중립적으로 - 객관적으로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의 목숨이 ①의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좋은 것이라면 철이의 목숨도 분명 좋은 것이다. 하지만 철이 엄마와 철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철이의 목숨을 똑같은 정도로 좋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위의 논쟁에서 결과주의자와 비결과주의자는 모두 사람의 목숨이 ①의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좋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런데 여기서 결과주의자는 사람의 목숨이 ②의 의미에서도 객관적으로 좋다는 주장으로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옹호한 것이다. 이에 대해 비결과주의자들은 결과주의자들이 객관성의 두 가지 의미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도 객관성의 두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주의자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식의 혼동은 헨리 시지윅Henry Sidgwick의 『윤리학의 방법Methods of Ethics』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기주의적 쾌락주의Egoistic Hedonism"(=이기주의)와 "보편주의적 쾌락주의Universalistic Henonism"(=공리주의)를 비교하며 후자를 옹호한다. "부분들이 전체 그리고 다른 부분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고려해볼 때, 어느 한 개인의 가치good도, (이를테면) 우주the Universe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다른 한 개인의 가치보다 더 많은 중요성을 갖지는 않는다는 자명한self-evident 원칙을 얻어낼 수 있다." (자명하다? 시지윅은 밀J. S. Mill과 마찬가지로 엄밀히 말하자면 공리주의가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지윅은 행복이나 쾌락이 객관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기주의자들이 "나는 나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말할 때 행복을 증진시킬 이유는 어디까지나 내 안에 있다. 그런데 시지윅을 비롯한 공리주의자들이 "나의 행복은 좋다My own happiness is good"고 말함으로써 행복의 가치는 객관화된다. 이기주의자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이 가치가 4①의 의미에서 객관적이라는 데에 비교적 용이하게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②의 의미에서는 아니다. 이기주의자가 보기에 가치는 행위자 중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곧 행위자 중립성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5
II 분류
이제 드라이어는 기존에 주목받지 못했던 행위자 중립적/행위자 중심적 구분을 통해 몇 가지 메타윤리 이론들의 분류를 시도한다.
이상적 관찰자 이론
이상적 관찰자Ideal Observer 메타윤리 이론은 "공평한 관망자impartial spectator" 이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바로 이 공평성impartiality 때문에 이 이론은 행위자 중립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공평하다는 것은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상적 관찰자 이론이 곧 행위자 중립적 도덕률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이상적 관찰자가 공평한 것은 맞지만, 그 공평성을 다른 방식으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 어떤 형태의 편애성partiality도 허용하지 않는 극단적인 공평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극단적으로 공평한 이상적 관찰자는 생면부지의 사람과 내 아들이 물에 빠진 경우에도 동전을 던져서 누구를 구조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무리 내 아들이라도 우선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소중한 존재이니까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이상적 관찰자 이론은 행위자 중립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공평성이 이렇게 극단적일 필요는 없다. 가령 편애성을 허용하되 그 편애성을 공평하게 발휘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어서 공평성을 좀 완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생면부지의 사람 A과 내 아들이 물에 빠지면 내 아들을 먼저 구해도 된다. 편애성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A의 아버지도 자신의 아들인 A를 먼저 구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나는 내 아들을 먼저 구해도 된다고 말하면서 A의 아버지에게는 동전 던지기를 하라고 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편애성을 발휘하는 건 괜찮지만 그걸 공평하게 해야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나에게는 나의 아들이, A의 아버지에게는 A가 더 소중하다. 이런 점에서 이상적 관찰자 이론은 행위자 중심적이 될 수도 있다.
계약 이론
계약contract 이론에도 여러 형태가 있지만 대체로 '특정한 조건 하에서 당사자들이 합의를 통해 모종의 규칙을 도출'하는 것이 계약 이론의 핵심적 내용이다. (일례로 스캔런T. M. Scanlon의 계약주의contractualism은 당사자들에 의해 합당하게 거절될 수 없는 도덕적 규칙을 채택하자고 제안한다.) 계약 당사자들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계약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계약 이론은 곧 행위자 중심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계약 이론 역시 행위자 중립적 이론과 행위자 중심적 이론으로 분류될 수 있다.
드라이어는 계약의 배경 조건에 따라 계약 이론을 크게 이상적ideal 계약주의 이론과 실용적pragmatic 계약주의 이론을 구분한다. 전자에서는 계약을 위한 협상이 이상적으로 설정된 조건 - 존 롤즈John Rawls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떠올리면 된다 - 하에서 이루어지지만, 후자에서는 당사자들이 실제로 갖고 있는 믿음에 근거하여 협상에 참여한다. 계약 당사자들이 어떤 이해관계를 갖고 있든 무지의 베일은 당사자들의 관점이 갖는 행위자 중심성을 제거한다. 협상에 참여한 당사자들이 모두 똑같은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롤즈의 이론은 행위자 중립적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롤즈의 이론에서 계약 당사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계약 당사자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에 관심이 있다. 다만 스스로에 대한 모든 우연적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계약을 이끌어 갈 수가 없을 뿐이다. 롤즈의 정의론에서 당사자들의 합의는 이미 행위자 중심성의 표현이다. 또 이렇게 도출된 원칙은 앞서 살펴본 온건한 편애주의moderate partialism처럼 모종의 편애성을 제한적인 방식으로나마 허용할 수 있다.) 셸리 케이건은 이렇게 설명한다.
협상에 참여한 합리적 구성원들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킬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규칙을 지지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사회에서 그들은 자신의 실제 지위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규칙을 선별해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저 그 사회 내의 평균적인 사람이 최대한 잘 살 수 있는 체제를 지지하는 것 밖에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의 이익이 충족되는 정도가 평균적으로 가능한 한 높은 체제를 옹호할 것이다. 6
이 설명에는 한계가 있다. 전체 사회의 이익(의 평균)을 높아지면 실제로 자기 자신이 얻게 될 이익도 높아질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개연성일 뿐이다. 당사자들은 전체 이익은 높지만 양극화가 심한 사회보다 전체 이익은 조금 낮더라도 가치의 분배가 비교적 평등하게 이루어진 사회를 선호할 수 있다. 가령 실제로 얻게 될 이익이 일정 수준 이하인 경우에 삶의 질이 극도로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덕 윤리
덕 윤리virtue ethics에 따르면 옳은 행위는 옳은 성품character을 가진 사람이 취한 행위다. 행위를 평가하기 위해 행위자의 덕을 참고하는 것이다. (공리주의가 덕을 규정하기 위해 행위를 참고하고 또 다시 옳은 행위를 규정하기 위해 행위의 결과를 참고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가령 덕 윤리의 대표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행복eudaimonia과 같은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 - 또는 잘 사는 것 - 이 행위나 선택이 지향해야 할 최고선the highest good이라고 보았다.) 덕 윤리 역시 행위자 중립적/행위자 중심적 구분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드라이어는 덕 윤리가 기본적으로 행위자 중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지적한다. 덕 윤리론에 따르면 각 행위자들은 자기 자신의 덕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 어째서 어떤 것이 덕이라는 사실이 나에게 그것에 따라 행위할 이유를 부여하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덕 윤리 이론가는] 덕스러운virtuous 어감이 좀 이상하네 삶은 나의 첫번째 책임responsibility이요, 나의 일반적 목표general goal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니까 덕 이론에 따르면, 도덕적 행위를 항 이유들은 덕스러운 인격체person으로서 살아가겠다는 일반적 목적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나에게 일차적인 중요성을 띠는 것은 나의 덕이다." (p. 35) 덕 윤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가 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또 덕스러운 삶을 살면 된다. 다른 사람이 덕을 갖추도록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덕을 갖추도록 돕는 성향이 내가 갖고 있는 특정한 종류의 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물론 다른 사람이 덕스러운 삶을 살도록 돕는 것도 덕 윤리에서 허용되거나 요구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덕을 증진시키는 것 그 자체가 나의 덕을 증진시키는 것 그 자체와 같은 정도의 규범적 이유를 나에게 제공한다고 볼 수는 없다.) 반면에 - 그 덕이 누구의 덕인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 덕 일반의 계발과 발휘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입장을 드라이어는 완벽주의perfectionism라고 부른다. 완벽주의에 따르면 생면부지의 사람의 덕보다 나의 덕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덕 윤리와 완벽주의는 덕이 내재적으로intrinsically 좋으며, 덕에 따라 사는 삶이 "주된 가치의 담지자primary bearer of value"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이런 점에서 드라이어는 완벽주의 역시 "아레테的areteic"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완벽주의는 덕스러운 삶 일반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덕 윤리와는 분명히 다르다.
드라이어는 완벽주의가 덕 윤리와 다르다고 - 즉 덕 윤리가 아니라고 - 보고, 전자는 행위자 중립적인 반면 후자는 행위자 중심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해가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나는 드라이어가 "덕 윤리"와 "완벽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행위자 중심덕 덕 윤리"와 "행위자 중립적 덕 윤리"로 이해할 여지도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이어는 계속해서 이상적 관찰자 이론과 계약 이론이 모두 행위자 중립적 혹은 행위자 중심적으로 나뉠 수 있다고 주장해왔는데, 덕 윤리가 본질적으로 행위자 중심적이라는 주장은 논조의 일관성을 해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덕 윤리라고 부른 이론을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의 틀 내에서 "주로 덕의 소유자possessor에게 이로운 덕"과 "공동체 혹은 인류 일반에게 이로운 덕"을 구분하고는 각각이 행위자 중심적 가치와 행위자 중립적 가치를 근거짓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완벽주의도 행위자 중립적인 것과 행위자 중심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여러 다른 사람들이 전자에 따라 취한 행위는 서로 충돌할 수도 있지만, 후자에 따라 취한 행위는 단일한 공통 목표single common goal을 위한 것이므로 충돌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자에 따른 행위들이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때 조화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에서의 조화가 아니라 상대방의 목표를 서로 저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조화다.)
드라이어의 구분대로라면 덕 윤리는 "주로 덕의 소유자에게 이로운 덕"(만)을 중점적으로 계발하고 발휘하라고 말하는 형태와 "공동체 혹은 인류 일반에게 이로운 덕"(만)을 중점적으로 계발하고 발휘하라고 말하는 형태로 나뉠 것이다. 이런 구분은 얼핏 이상해보이지만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다. 가령 니체Friedrich Nietzsche나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는 경우에 따라 자신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을 돕도록 하는 정의justice라는 덕은 기실 덕의 소유자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같은 덕을 추구할 규범적 이유가 없다고 - 혹은 이 같은 덕을 기피할 규범적 이유가 있다고 - 주장했다. 따라서 이들의 이론을 행위자 중심적 덕 윤리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타인들에게도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삶을 살만한 규범적 이유가 있다고 믿었던 소크라테스Socrates나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도덕 이론은 행위자 중립적 덕 윤리라 분류할 수 있겠다.
리뷰 논문
James Dreier, "Structures of Normative Theories," The Monist 76(1) (1993): 22-40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Shelly Kagan, "The Structure of Normative Ethics," Philosophical Perspectives 6 (1992): 223-242
Thomas Nagel, "Personal Rights and Public Space," Philosophy & Public Affairs 24(2) (1995): 83-107
Thomas Nagel, The View From Nowhe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 이 전략은 John Broome, 『Weighing Goods』 (New York: Blackwell, 1991), esp. ch. 1 그리고 Amartya Sen, "Evaluator Relativity and Consequential Evaluation,"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12 (1983): 113-132에서 구상되고 발전되었다. 행위의 특징들도 행위의 결과에 포함시켜 이해하려는 시도는 Lars Bergström, 『The Consequences of Action』 (Stockholm: Almqvist and Wiskell, 1966)에서 이루어진 바 있다. 본문의 약속과 관련된 예는 Peter Vallentyne, "Teleology, Consequentialism, and the Past," 『Journal of Value Inquiry』 22 (1988): 89-101에서 제시되었다. 발렌타인Vallentyne은 이른바 결과주의화 전략이 "교묘한 속임수gimmick"라는 비판에 대한 재반론을 "Gimmicky Representations of Moral Theories," 『Metaphilosophy』 19(3) (1988): 253-263에서 시도하기도 했다. 어떤 행위가 갖는 도덕적으로 유관한 특징을 결과에 포함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Charles Taylor, "The Diversity of Goods" in Amartya Sen & Bernard Williams, ed., 『Utilitarianism and Beyond』 (Cambridge, Eng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p. 144 그리고 J. J. C. Smart in J. J. C. Smart & Bernard Williams, 『Utilitarianism: For and Against』 (Cambridge, Eng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p. 27에서도 엿볼 수 있다. [본문으로]
- 나는 드라이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부분이 his 『Anarchy, State, and Utopia』 (New York: Basic Books, 1974), pp. 28-33, esp. 29-30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생각은 Thomas Nagel, 『The View From Nowhe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pp. 175-180 (Ch. IX, §4), esp. 176-177 등에서도 드러난다. [본문으로]
- 『Utilitarianism: For and Against』, p.6 [본문으로]
- (Indianapolis: Hackett, 1981), p. 382 [본문으로]
- 셸리 케이건도 객관성과 행위자 중립성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Limits of Moral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p. 61 참조. [본문으로]
- 『Limits of Morality』, pp. 41-42; 이와 관련해서 John C. Harsanyi, "Morality and the Theory of Rational Behavior," in 『Utilitarianism and Beyond』, pp. 39-62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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