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도덕의 계보에 녹아든 오류의 역사: 니체 『도덕의 계보』 제1논문 &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 본문
I 생리학적 작용으로서의 도덕 활동
생리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노예 도덕]이 일반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 -노예 도덕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반작용이다. 고귀한 가치 평가 방식에서 사정은 정반대다 : 그것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한다.
「도덕의 계보」 제1논문 10절 中
니체는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에서 기독교와 기존의 도덕률 (그리고 그것들을 근거 짓는 서구의 오랜 형이상학적 전통)이 근본적인 수준에서 심각한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첫 번째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오류다. 니체는 장수의 비결로 소식을 제안하는 사람을 언급하며 "[그는] 자신의 식단이 그의 긴 수명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신진대사metabolism가 유난히 느리다는 점, 그래서 아주 조금만 섭취한다는 점, 이 장수의 전제 조건들이 곧 그의 간소한 식단의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에게 조금 또는 많이 먹을 수 있는 자유란 없었다. 그의 단출함은 "자유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신진대사는 우리가 통제하거나 의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장수하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장수한다는 말이다. 비결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종교와 도덕률에서도 마찬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모든 종교와 도덕률을 정초하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공식은 이런 것이다. "이것과 저것을 하라, 이것과 저것은 하지 말라, 그러면 너는 행복해질 것이다! 만약 이 말을 따르지 않으면 …"" 한마디로 덕virtue을 갖추면 행복happiness이 따라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덕은 행복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그런데 이 행복이란 것도 신진대사와 마찬가지로 어찌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 "행복한 자"는 틀림없이 어떤 행위들은 행하고 또 어떤 행위들은 본능적으로instinctively 기피할 것이다. 그가 다른 인간들 및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그가 생리학적으로physiologically 표상represent하는 질서를 말이다." 행복한 자가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다만 본능에 의한 생리학적 현상이다. 바로 이런 생리학적 작용으로서의 도덕 활동이 칭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비난받는 행위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와 도덕률은 말한다. "한 세대, 한 민족은 방종과 사치에 의해 파멸한다." [그러나] 나의 회복된 이성은 말한다. 한 민족이 파멸에 다가갈 때, 그 민족이 생리학적으로 쇠락해질 때, 그때 방종과 사치가 따라 나온다고 말이다." 1
II 주체는 없다
일정량의 힘이란 곧 그와 같은 양의 충동이요, 의지요, 행위다. 기실 이것들은 충동 작용, 의지 작용, 행위 작용 자체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오로지 언어의 유혹(과 그 속에서 화석화된 이성의 근본적인 오류들) 때문에, 모든 작용들은 행위능력agency, 즉 '주체subject'에 의존하고 있다는 해석과 오해가 생겨나게 되고, 그것[힘은 다름 아닌 작용 그 자체라는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번개를 섬광에서 분리하고서는 후자를 번개라 불리는 어떤 주체에 의한 활동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도덕도 마치 강자의 배후에 강함을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을 자유가 있는 일종의 중립적인 기체가 있는 것처럼, 강함를 강함의 표현으로부터 분리해낸다. 그러나 그러한 기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활동, 작용, 생성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활동하는 자'는 활동에 덧붙여 단순히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활동이 모든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의 활동을 이중적으로 이해한다. 번개가 치면 그것으로부터 또 어떤 활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는 같은 사건을 한 번은 원인으로 또 한 번은 결과로 간주한다. 2
「도덕의 계보」 제1논문 13절 中
원인과 결과의 자리를 뒤바꾸었으니 원인과 결과가 정확히 무엇인지 짚어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가령 주체와 행위 사이의 인과적 연결고리가 참임을 내세우자면 주체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원인의 자리에 올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인과율이 성립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니체가 보기에 주체는 없다. 따라서 주체와 행위간의 인과율은 거짓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위 작용들의 전건antecedent 혹은 원인cause이 되는 주체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두 번째 거짓된 인과율false causality의 오류다.
이 오류의 원인으로 니체가「도덕의 계보」에서 주목하는 것은 "언어의 유혹seduction of language"이다. 문장은 - 생략되는 경우도 있지만 - 주어와 술어를 갖는다. 이런 문장 구조에 익숙한 우리들은 자연히 주어에 대응하는 주체와 술어에 대응하는 행위 작용이 별개로 있다고 믿게 된다. 가령 "엄마는 곰국을 끓였다"라는 문장은 곰국를 끓이는 독립적 주체로서의 엄마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언어가 실재를 오롯이 반영한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그저 "언어의 유혹"에 휘말리고 있는게 아닐까? 이성이 언어에 갇혀 화석화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보다 앞선 작품인 「도덕 외적인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 」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그것이 초래하게 될 결과[현상]와는 독립된 순수한 진리인) '물자체'는 언어의 창조자에게는 과연 불가해하며 추구할 가치라고는 없는 무엇과도 같다. (…) 우리가 나무와, 색, 눈, 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 대상들 자체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소유한 것은 그저 그 대상들에 대한 은유metaphor에 불과하다. 본래의 실체original entities와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대응correspond하지 않는 은유말이다. (…) 그러므로 언어의 탄생은 결코 [물자체에 대해]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 모든 개념은 비동일적인 것들의 동일화equation of unequal things에서 비롯된다. (…) '잎'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개별적 [잎들의] 차이를 자의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그리고 [개개의 잎들을] 구분해주는 측면들을 망각함으로써 형성된다. 이것은 [개별적인] 잎들과는 별도로 그 '잎'이란 것이 자연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에 따르면 이 오류는 인과율의 법칙에 대한 믿음에도 기인한다. 모든 행위의 배후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얼핏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행위가 어떤 것의 결과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부터 "내면적 사실들inward facts"- 의지will, 정신spirit, 자아ego - 을 상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니체의 말대로 이 "내면적 사실들"이라는 게 정말로 사실임을 증명한 이는 아무도 없다. ""내면적 세계inner world"라는 것은 유령들과 허깨비들로 가득하다. 의지 역시 그것들에 속한다. [의지는] 그저 사건들events에 수반될 뿐이다. (…) 이른바 동기motive 역시 또 다른 오류다. 그저 의식의 표면적 평상에 불과한 (…) 그리고 자아ego! 그건 동화요 허구요 말장난이 되어버렸다." 물리적 행동을 일으키는 심적 원인mental cause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자들은 그 누구도 입증하지 못한 이 "내면적 사실들"의 존재를 "경험적empirical 증거"라고까지 칭하면서 인과율이 지배하는, "원인들의 세계로서의 (…) 이 세계를 창조했다created." 쇼펜하우어의 의지, 헤겔의 정신, 칸트의 자아(와 3데카르트의 주체)는 물론 기계론적 입장을 취하는 과학자들의 원자atom까지, 이 모든 물자체들은 결국은 우리가 창조해 낸 "원인들의 세계"에서 싹튼 오류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현실의 척도로 만들고! 그것들을 신God이라 불렀지!" 4
III 발생론적 방법과 정당화 이론의 교란
여러 가지 언어로 표현된 '좋음'이라는 명칭이 어원학적인 관점에서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었다 : 여기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이 동일한 개념 변화에 기인함을 발견했다. -즉 어느 언어에서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이 기본 개념이며,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정신적으로 고귀한', '귀족적인', '정신적으로 고귀한 기질의', '정신적으로 특권을 지닌'이라는 의미를 지닌 '좋음'이 발전해 나오는 것이다 : 언제나 저 다른 발전과 평행해 진행되는 또 하나의 발전이 있는데, 이는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이라는 개념을 결국 '나쁨'이라는 개념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 후자에 대한 가장 웅변적인 예는 '슐레히트schlecht[나쁨]'라는 독일어 단어 자체이다 : 이는 '슐리히트schlicht[단순한]'와 같은 말이다 - '슐레히트 벡schlechtweg[단지]', '슐레히터딩스schlechterdings[오로지]'와 비교해보라-그것은 본래 오로지 귀족과 대립해 있을 뿐인 아무런 의심의 곁눈길도 하지 않는 단순한 사람, 평범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대략 30년 전쟁 무렵, 즉 훨씬 후에 이르러, 이 의미는 오늘날 사용하는 의미로 바뀌었다.-이것은 나에게는 도덕 계보학에 관한 본질적인 통찰로 보인다.
「도덕의 계보」 제1논문 4절 中
칸트는 인과율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성understanding의 범주를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인과율의 범주를 매개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걸까? 니체는 원인이 그저 - 지성이 아니라 -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원인이란 것은 그저 "사후적으로ex post facto" 삽입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들은 그것을 망각하고 있다. 세 번째 가상적 원인imaginary causes의 오류는 어쩌면 이 망각 자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원인들을 만들어내는가? 니체는 이른바 "심리학적psychological 설명"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런 식 혹은 저런 식의 느낌 - 나쁜 느낌이나 좋은 느낌 - 을 얻는 이유를 원한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이런 식 혹은 저런 식으로 느낀다는 사실을 진술하기만 하는 데에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로지 어떤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 - 비로소 이러한 사실을 의식한다." 인간은 고통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고통보다 더 두려운 건 고통을 받으면서도 왜 고통을 받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설명을 찾아내려고 한다. 찾다가 안 되면 만들어내려고 한다. 가령 힌두교 문화권의 카스트 제도는 어떤가? 하층민들이 고통 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전생에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이제 하층민들은 내생에서 귀족으로 태어나기를 염원하며 열심히 그리고 순종적으로 살아간다. (카스트 제도가 장구한 세월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니체는 이런 맥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귀결은 이런 것이다. 원인들을 설정하는 한 가지 방식이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하다가, 하나의 체계로 응집되고, 종국에는 지배적인dominant, 그러니까 다른 원인들이나 설명들은 손쉽게 배제해버리는 것으로서 떠오르게 된다.") 이 설명이 실제로 참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 "그 어떤 설명이라도 아무 설명도 없는 것보단 낫다. (…) 알 수 없는 것들을 익숙한 것인양 설명해줄 수 있는 표상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것을 "참된true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생리학적 불편함discomfort에는 죄sin의 감정이, 소화가 잘 되는 등 편안한 생리학적 상태에는 양심conscience의 감정이 그 원인으로서 삽입된다. 인간은 항상 왜 자신이 불편하거나 편안한 상태에 있는지를 - 그 이유를 -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이유란 이미 언급했듯이 발견discover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발명invent한다. "기억은 우리 몰래 그러한 경우에 일어난 행위 작용 속으로 밀려 들어와서는 앞서 발생했던 똑같은 종류의 상태들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그러한 상태들에 대한 인과적 해석들causal interpretations이 - 그것들의 진짜 원인들real causes이 아니라 - 함께 일어난다." 인과적 해석이라니? 기계론적 세계관 아래에서 이 말은 이미 형용 모순이다. 인과 관계는 어디까지나 사실의 문제니까. 우리는 엄연히 존재하는 그 사실을 - 어떤 사건의 원인을 -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니체에게 인과 관계는 해석의 문제가 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사건들을 하릴없이 떠올리게 된다. 이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의 사건의 원인이라는 보장은 물론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과거의 사건들이 혹은 그것들의 일부가 현재의 사건의 원인이라는 해석에 이른다. 카스트 사회의 노예들이 스스로 겪는 고통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결국 전생의 업보를 들먹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모든 해석은 나름의 근거를 필요로 한다. 여러 가능한 해석 중에서 왜 이 해석이 채택되어야 하는가? 그래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지목하는 것은 곧 그것이 정말로 그 사건의 원인이라는 논증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지점에서 발생론적 방법genetic method과 정당화 이론justification theory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먼저 각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발생론적 방법은 어떤 것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 가령 어떻게 최초로 발견되거나 사유되었는지 - 를 파악하고자 하는 탐구 방법이다. 즉 이 방법론은 인과 관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반면 정당화 이론이 시도하는 작업은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만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캐묻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논증의 올바름에 관한 문제와 연결된다. 그리하여 발생론적 방법에서 중요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어떻게 발견했는가? 나무 밑에 앉아 있다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5 하지만 정당화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어떻게 정당화했는가? 천문학적 관찰과 물리학적 계산 등을 통해서! 그리고 발생론적 방법과 정당화 이론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오늘날의 논리학에서는 어떤 것의 발생 원인이 곧 그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라고 착각하는 것을 '발생적 오류genetic fallacy'라고 부른다. 가령 누군가가 꿈에서 영감을 언어 특정한 이론을 고안했고 그것을 증명했는데 "그 이론은 꿈에서 나온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론을 틀렸다!"라고 말하면 발생적 오류를 범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꿈속에 있었던 것은 그 이론의 발생 원인이지 정당화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오히려 어떤 것의 발생 원인은 오로지 그것의 발생 원인이기만 할 뿐 결코 그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오류다. 발생적 오류를 범했다고 잔소리를 듣던 사람은 도리어 니체에게 칭찬을 받게 생겼다.
그러니까 행위의 원인으로서의 주체를 운운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발생론적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믿지만 알고 보면 모두 정당화의 과정에 뛰어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발생론적 방법이란 기실 존재치 않으며 오로지 정당화 작업만이 있을 뿐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인가? 아니다. 거꾸로 우리가 정당화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발견의 문제일 수 있으니까. 가령 도덕률의 뿌리를 파헤치는 일은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되어 왔는지를 되짚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그것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우리가 마주치게 될 것은 논증들의 연속이 아니라 인과적 연결 고리들의 연속이다. 도덕률은 근거에 의해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덕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채택해야 할 것은 발생론적 방법이다. 발생론적 방법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어원학적 접근법etymological approach 아니겠는가? '좋음'과 '나쁨'의 개념은 다만 다른 개념들의 결과일 뿐이다. 그것들은 정당화된 적이 없다. 그런데 인과 관계는 다시 해석의 산물이요 정당화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던가? 이제 발생론적 방법과 정당화 작업은 상호 침투하고 뒤섞인다. 교란된다.
IV 니체의 진리
처음부터 이 사상들은 내 안에서 개별적으로 제멋대로 산발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통된 하나의 뿌리에서, 즉 정신의 심층에서 명령하고 더욱 명확하게 이야기하며 더욱 확고한 것을 갈망하는 인식의 근본 의지에서 나타난 것이었으리라. 다시 말해 오직 그렇게 하는 것만이 어떤 철학자에게는 어울린다. 우리는 어떤 일에서도 개별적으로individually 있을 권리가 없다 : 우리는 개별적으로 잘못을 저질러도, 개별적으로 진리를 파악해서도 안 될 것이다. 오히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는 필연성으로, 우리의 사상과 가치, 우리의 긍정과 부정, 가정(假定)과 의문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다-모두 서로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하나의 의지, 하나의 건강, 하나의 토양, 하나의 태양을 증언하고 있다.-이러한 우리의 열매들이 그대들의 입맛에 맞을는지?-그러나 이것이 나무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와, 우리 철학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도덕의 계보」 서문 2절 中
이런 식의 교란은 우리의 눈을 생리학적 사실에 대한 심리학적 대응, 그러니까 자유의지 개념을 향하게 한다.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의 종착점은 자유의지의 오류다. "이제 우리에게 "자유의지" 개념에 대한 연민 따위는 없다." 한편으로 자유롭게 의지하는 행위는 "내면적 사실들"중 하나인 자아를 그 발생론적 기원 - 인과적 원인 - 으로 삼는다. 물론 이것은 해석과 정당화를 거친 거짓된 인과 관계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의지 개념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정당성을 획득한 것 같지만 실은 인류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판결을 내리고 벌을 주고자 하는, 죄책감을 심어주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교수형 집행인의 형이상학이다Christianity is a metaphysics of the hangman." 물론 이런 목적으로 의지의 이념을 만들어 낸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본능을 따랐을 뿐이다. 신진대사의 빠르고 느림에 따라 먹는 양을 조절하는 장수자처럼……. 그러나 그들은 니체的 의미에서 진정으로 강한 자와 달리 자유의지가 실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그리고 너의, 개별적인 의지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의지"다. 물론 이 "근본 의지"가 쇼펜하우어의 그것처럼 표상의 배후에 있는 물자체는 아닐 것이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토양, 하나의 태양"만이 있을 뿐이니까. 일원론적monist 세계, 그 곳에서는 우리를 이끄는 것도 우리의 바깥 혹은 이 세계의 바깥에 있는 무엇일 수 없다. 그것은 숙명fatality에 따라 때가 되면 가지 끝에 열매를 맺는 나무의, 단 "하나의 건강"일 테니까. 정말로 그렇다. 우리에게는 "어떤 일에서도 개별적으로 있을 권리가 없"어서 "인간은 필연이고, 운명fatefulness의 조각이며, 전체whole에 속하고, 전체 안에 있다. 우리의 존재를 앞에 두고 판결을 내리고, 측정하고, 비교하고, 선고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곧 전체를 앞에 두고 판결을 내리고, 측정하고, 비교하고, 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을 테니 말이다. 전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6
칸트가 -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이미 플라톤이 - 인간은 스스로에게 스스로의 성질을 스스로 부여할 수 있다는 헛소리를 해댔지만 "그 누구도 한 인간에게 그의 성질qualities을 부여하지 않는다. 신도, 사회도, 그의 부모와 조상도, 그 자신도." 그러므로 이제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이는 없다. 우리의 존재 양태는 어떤 제1원인causa prima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헤겔의 생각처럼 세계가 마음sensorium 혹은 "정신"으로서의 통일체unity를 이루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기억하는가? 우리는 이것들을 신이라 불렀었다. 이제 "우리는 신을 거부한다. 신이 부여한 책임을 거부한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이에게는 "위대한 해방great liberation"의 때가 온다. 지금은
"정오,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 오랜 오류의 끝, 인류의 정점, 차라투스트라의 시작이다"
「어떻게 '참된 세계'는 마침내 우화가 되었는가」 中
리뷰 텍스트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김정현 역, 「도덕의 계보 - 하나의 논박서Zur Genealogie der Moral - Eine Streitschrift」『니체 전집 14(KGW VI 2)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pp. 335-391 (서문 및 제1논문)
Friedrich Nietzsche, "The Four Great Errors," in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ed., Beginning Metaphysics: An Introductory Text with Readings (Blackwell Publishers, 1998): 462-467
Friedrich Nietzsche, "On Truth and Lie in an Extra-Moral Sense," translated by Daniel Breazeale in Clive Cazeaux, ed., The Continental Aesthetics Reader (New York: Routledge, 2000): 53-62
Friedrich Nietzsche, "How the 'Real World' at last Became a Myth," in R. J. Hollingdale, trans., and Michael Tanner, intro. and ed., The Twilight of the Idols and the Anti-Christ: or How to Philosophize with a Hammer (Penguin Classic) (London: Penguin Books, 1990): 50-51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Brian Leiter, "Nietzsche's Theory of the Will," Philosophers' Imprint 7 (2007): 1-15
C. A. Campbell "Has the Self "Free Will"?," [1967] in Heimir Geirsson & Michael Losonsky, ed., Beginning Metaphysics: An Introductory Text with Readings (Blackwell Publishers, 1998): 376-389
김창래 「유일하게 옳은 해석은 있는가?: 해석의 기준에 관하여」 『해석학 연구』 제22집 (2008): 99-136
김동규 「니체 철학에서의 고통과 비극: 문화철학의 관점에서」 『철학탐구』 제26집 (2009): 139-168
김정현 「칸트의 자유의지 개념에 대한 니체의 비판」 『철학연구』 제15집 제1권 (1991): 203-228
- "틀림없이 … 할 것이다"라는 표현은 영역본의 "must"를 번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 전반적으로 국역본을 따르되 영역본(Keith Ansell-Pearson, ed. and Carol Diethe, trans.,『Genealogy of Moral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을 참고하여 글을 조금 다듬었다. 국역이 매끄럽지 못하여 이해가 어려울뿐만 아니라 오역 -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 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자유의지와 그것의 담지자로서의 자아self의 존재를 옹호하려했던 캠벨C. A. Campbell의 이른바 "현상학적 분석phenomenological analysis"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본문으로]
- 이 문장을 통해 니체的 의미의 '신' 개념이 - 많은 사람들의 통념과는 달리 - 단순히 기독교의 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넓은 외연을 갖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본문으로]
-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본문으로]
- 건강health은 어디까지나 몸의 내적 상태이지 초월적인 목적인final cause이 아니다. 니체 철학에서 목적론적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거부된다. 또, 건강은 인과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발휘하는 -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와 같은 - 것일 수도 없다. 따라서 건강이 자유의지의 담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문으로]
'논문과 원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의 질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0) | 2015.04.13 |
---|---|
권리,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0) | 2015.02.01 |
평등주의의 갈래들: 목적론적·의무론적·비내재적 평등주의 (0) | 2015.01.16 |
규범 이론의 구조: 행위자 중립성 vs. 행위자 중심성 (0) | 2015.01.12 |
칸트 미학 II: 숭고의 분석론 (2) | 2014.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