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평등주의의 갈래들: 목적론적·의무론적·비내재적 평등주의 본문
I 목적론적 평등주의와 의무론적 평등주의
데렉 파핏Derek Parfit은 그의 논문 "Equality or Priority?"에서 목적론적 평등주의telic egalitarianism와 의무론적 평등주의deontic egalitarianism를 구분한다. 1
목적론적 평등주의 |
의무론적 평등주의 |
|
I [평등 추구의 이유] |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적게 가지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쁘다 |
더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도덕적 이유 |
II [불평등의 속성] |
불평등은 나쁜bad 것이다 |
불평등은 부정의한unjust 것이다 |
III [적용 범위] |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이 관련된 모든 불평등의 경우 |
부정의injustice 혹은 그른 행동wrongdoing에서 비롯된 불평등의 경우로 한정 |
(I) 목적론적 평등주의자들은 평등 그 자체equality per se를 목표로 삼는다. 평등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왜 평등이 좋냐고 묻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다. 애초에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평등은 그냥 평등이니까 좋은 거다. (II) 그렇다면 불평등은 그 자체로 나쁜 - 그래서 기피해야 할 - 사태state of affairs가 된다. (III)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목적론적 평등주의는 문자 그대로 모든 불평등을 문제 삼는다. 가령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제3세계의 한 소년이 나보다 부유하지 않은 이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심지어는 과거의 사람들과 오늘날의 사람들이 동일한 정도로 부유하지 않다는 것마저 문제가 된다. 마야 문명 사람들보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더 잘 산다. 이러한 불평등의 사태마저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우리가 석기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2
(I) 반면 의무론적 평등주의자들은 평등이 좋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도덕적인moral 이유가 말이다. 그 이유란 것이 바로 부정의 혹은 그른 행동이다. 의무론적 평등주의자들에게 사태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II) 혹 그들이 불평등을 문제 삼는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불평등이 부정의한 방식으로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좋거나 나쁜 게 아니다. 불평등을 평가한다면 다만 그것이 정의에 부합하느냐 마느냐를 따질 수 있을 뿐이다. (III) 그래서인지 의무론적 평등주의자들은 오로지 자연에 의해 비롯된 불평등 - 가령 선천적인 신체적·정신적 장애 - 을 시정하는 데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단순히 운이 안 좋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굳이 나서서 재분배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틴 오닐Martin O'Neill은 파핏의 이러한 구분이 어느 정도 유용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자칫 평등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목적론적 평등주의도와 의무론적 평등주의가 평등주의의 전부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제3의 평등주의는 없을까? 오닐이 제시하는 이 새로운 종류의 평등주의가 바로 비내재적 평등주의non-intrinsic egalitarianism다.
II 비내재적 평등주의
비내재적 평등주의는 "불평등은 나쁜 것"이라는 불평등의 속성에 대한 목적론적 평등주의의 논제를 제외한 모든 논제를 거부한다. 거부한다? 그렇다. 비내재적 평등주의는 오닐이 목적론적 견해와 의무론적 견해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제시한 "중간적 입장middle position"이기 때문이다.
방금 언급했듯 오닐은 불평등이 나쁜 것이라는 견해를 분명히 밝힌다. 불평등이 그저 부정의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평등이 그 자체로 - 내재적으로intrinsically - 나쁜 것은 아니다. ('비내재적 평등주의'라는 이름은 여기에 기인한다.) 불평등이 나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목적론적 평등주의는 도대체 평등이 왜 좋은 것이냐는 질문 앞에서 그저 쭈삣거릴 수밖에 없다. "그… 그냥 좋은 거야…" 반면 비내재적 평등주의는 자신있게 그 이유를 읊을 수 있다. 그러나 의무론적 평등주의가 말하듯 그 이유가 도덕적인 이유가 될 필요는 없다. 불평등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해 줄 도덕 외적인amoral 이유 - 비도덕적인immoral(=도덕적으로 나쁜) 이유가 아니다 - 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도덕적 이유가 배제된다는 말이 아니라 도덕 외적인 이유도 추가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왜 불평등이 나쁜 것일까? 먼저 불평등은 ① 낙인 효과stigmatizing effect를 일으킨다. 경제적 불평등이 종국에는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으로까지 이어져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타인들은 물론이고 스스로에 의해서도 열등한inferior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② 그러다보면 자연히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굴종적servile이거나 지나치게 순종적인too deferential 행동을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③ 수용하기 힘든 형태의 지배로 이어지기 쉽다. 가령 부자들이 빈자들에 대해 경제적인 형태 외의 힘까지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④ 부를 거머쥐지 못한 사람들의 자존감self-respect이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마지막으로 이런 효과들이 나타나는 사회에서 ⑤ 계층 간에 건전하고 화목한 사회적 관계와 태도가 자리잡기는 당연히 어렵다.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빈자들의 고통과 박탈감을 줄일 수 있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 평등주의적이라기보다는 - 인도주의적humanitarian인 성격을 짙게 띠고 있으며 우연적 사실contingent fact에 따라 평등을 추구할 이유로서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때문에 오직 "약한weak" 의미에서만 평등주의적이다. 때문에 오닐은 비내재적 평등주의가 이 이유에 호소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3 4
기실 이들 이유 - 편의상 앞으로 "비내재적 이유"라고 칭한다 - 는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잘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오닐은 이런 점에서 "지위에 따른 낙인 효과에 대한 반대라는 [이유 ①]을 분배적 불평등에 반대하기 위해 비내재적 평등주의가 호소할 만한 이유들의 전체 집합이 갖는 평등주의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지름길로 간주"한다(p. 128). 그러나 이들 이유가 모두 이유 ①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5
위 다섯 가지 이유를 고려해본다면 우리는 평등이 해당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좋은 사태가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목적론적 평등주의자는 평등을 "단순히 산술적merely arithmetic"으로만 이해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숫자뿐이다. 여기에는 사람이 없다. 평등하거나 불평등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말이다. 그래서 목적론적 평등주의가 그 목표를 추구하는 동기에 공감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수학책에 '2+8'라는 식과 '5+5'라는 식이 있는데 굳이 후자를 좋아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목적론적 평등주의는 이렇게나 구체적인 사회와 개인들로부터 추상되어 있다. 사람들은 무시하고 그냥 숫자 놀이하는 것 같다는 얘기다. 평등에의 추구를 논하면서도 실재하는 세계의 모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 사는 사람과 파푸아뉴기니에 사는 사람 사이의 평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석기 시대 사람과 21세기를 사는 사람 사이의 평등까지도 추구할 이유가 있다는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꼭 그 이유가 결정적decisive일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반면에 의무론적 평등주의는 평등을 추구할 이유가 반드시 도덕적인 이유여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자연 재해에 의해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게 된 사람들을 그냥 무시해버려도 좋은가? 부정의한 체제나 그른 행동에 의한 불평등이 아니니까? "뭐? 내가 돈을 왜 내? 내가 지진 일으켰어?"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되는가? 그냥 운이 안 좋아서 그런 거니까? "내가 때려서 그렇게 된 거야? 내가 왜 도와줘?" 의무론적 평등주의는 이 질문에 대해 그냥 쌩까도 된다는 반직관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비내재적 평등주의는 앞서 언급한 이유들을 토대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 해야된다는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평등 그 자체가 아니며 평등을 추구할 이유는 도덕적인 것에만 한정되어 있지도 않다.
평등을 추구해야 할 비내재적 이유들은 그러나 지극히 평등주의적인 관심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다. 굴종이나 착취, 지배, 지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나쁨에 대한 관심말이다. 때문에 비내재적 평등주의도 넓은 의미에서는 목적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파핏의 목적론적 평등주의 - 오닐은 이것을 "'순수한pure' 목적론적 평등주의"라고 부른다 - 와는 다르다. 순수한 목적론적 견해에 따르면 분배적 정의는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며 따라서 평등이 좋은 이유 따위는 없다. 그런가하면 비내재적 평등주의는 동시에 의무론적 견해와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비내재적 이유들이 행위의 지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III 적용과 확장
오닐은 (1) 불평등의 감소는 거의 언제나 비내재적 이유들과 관련해 사태를 개선하며 (2) 그러한 개선은 일반적으로 오로지 불평등이 감소되어서 분배적 평등이 더 잘 이루어진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심오한 사회적 사실deep social fact'이 성립하는 한 비내재적 평등주의는 조건의 불평등의 제거를 명령mandate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이 옳다면 불평등의 제거는 비내재적 이유들을 산출한 평등주의적 가치를 증진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분배의 문제
때문에 비내재적 평등주의는 평등에 관한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와 "국가주의statism"를 모두 거부한다. 세계시민주의는 평등의 범위를 이 세계 전체로 설정한다. 세계 내의 사람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혹은 관계가 있기나 한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에 따르면 나는 태평양의 섬에 사는 생면부지의 원주민에게도 돈을 송금해야 할 이유를 갖는다. 오닐은 이러한 견해를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상호작용이 없는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평등을 논할 필요는 없다. 그 경우에 비내재적 이유들에 호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디에 사는지는 커녕 이 세계에 존재하는지의 여부조차 모르는 누군가가 나보다 훨씬 더 부유하다는 사실 때문에 사회적 위화감이 조성되는가? 나의 자존감이 떨어지겠는가? 그렇지 않다. 반대로 평등의 범위는 오로지 국경선을 기준으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국가주의도 문제가 된다.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이 단순히 같은 국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두 사람 사이의 평등을 추구해야 할 이유가 생긴다니? 정부로 대표되는 제도에 함께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식의 이유는 그 자체로 전혀 평등주의적이지도 않다. 다른 한편으로 평등의 범위는 국경선을 넘어설 수도 있다. 비내재적 이유들에 호소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무리 국경 너머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과의 불평등이 감소되었을 때 비내재적 이유들과 관련한 가치가 증진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평등을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처럼 세계화globalization가 고도로 이루어진 시대에 이런 경우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향 평준화 반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모두가 똑같이 못 살게 되는 상황이 단순히 더 평등하다는 이유만으로 바람직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향 평준화leveling down가 일어나는데도? 하향 평준화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추구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이른바 하향 평준화 반론의 요지다.
파핏은 목적론적 평등주의만이 하향 평준화 반론에 부딪힌다고 말한다. 이 반론은 어디까지나 하향 평준화된 사태가 바람직하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의무론적 평등주의자에게 사태 자체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므로 하향 평준화 반론에 직면하지 않는다고 파핏은 진단한다. 하지만 오닐의 생각은 다르다. 의무론적 평등주의와 비내재적 평등주의 역시 하향 평준화 반론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하향 평준화 반론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주기만 하면 된다. 가령 '하향 평준화를 일으키는 한이 있더라도 평등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스꽝스럽다'고 말하면 어떤가? 오닐은 의무론적 평등주의 역시 이런 지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비내재적 평등주의자들에게도 평등을 추구할 만한 비내재적 이유들만 충족되면 언제든 하향 평준화를 향해 나아가도 되느냐고 따질 수 있다. 6
물론 역풍이 분다고 배가 뒤로 가는 건 아니다. 어떤 이론이 반론에 직면한다는 게 곧 그 반론에 의해 논박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파핏이 제시한 바 있는 "다원주의적 대응Pluralistic Response"에 따르면 평등은 유일한 가치가 아니라 그저 여러 가치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하향 평준화된 공동체를 선호할 이유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 이유가 반드시 그런 공동체를 선택하겠다는 최종적인 결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평등은 분명 추구할 만한 것이지만 다른 가치들을 모두 압도해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향 평준화 반론은 평등주의자들이 결론적으로는 하향 평준화가 일어나는 사태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성립한다. 하향 평준화가 일어난 사태가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도 반직관적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비내재적 평등주의 역시 하향 평준화 반론에 치명타를 입지 않는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오닐은 3가지 다른 하향 평준화의 경우에 대해 비내재적 평등주의가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지를 살펴본다. (1) 아무리 하향 평준화가 일어나더라도 불평등이 감소되면 사람들의 자존감이 향상된다거나 굴종과 지배의 관계가 근절되는 등 비내재적 이유들과 관련된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에 하향 평준화된 공동체를 지향할 이유가 없지는 않다. 물론 최종적인 결정은 다른 요인들을 함께 고려해 결정될 것이다. (2) 이러한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떨까? 7 이런 경우에는 하향 평준화된 공동체를 지향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오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내재적 이유들을 산출하는 가치는 개인의 복지welfare에 미치는 효과로 환원할 수 없는 비인격적impersonal 가치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등을 추구할 비내재적 이유들은 특정 개인들을 위한for particular individuals 가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개인들이 실제로는 평등에서 비롯된 자존감의 향상이나 굴종으로부터의 해방 덕분에 더 많은 복지를 전혀 누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존엄성dignity과 인간으로서의 지위standing of human agents를 고려해 볼 때 충분히 모종의 가치가 증진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도 여전히 비내재적 평등주의자들은 하향 평준화된 공동체를 지향할 만한 이유를 가질 수 있다. (3) 그런데 하향 평준화가 이루어졌을 때 이런 비인격적 가치마저 얻을 수 없다면? 오닐은 최소한 이 경우에서 만큼은 - 혹시나 이런 경우가 가능이나 하다면 - 비내재적 평등주의가 하향 평준화 반론에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8
우선주의와 비내재적 평등주의의 양립가능성
파핏은 평등주의자의 "다원주의적 대응"은 하향 평준화 반론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하며 평등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우선주의prioritarianism 혹은 우선성 입장Priority View을 제시한다. 9 이 입장에 따르면 평등은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다. 다만 타인을 도울 때 -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 더 낮은 삶의 질을 누리는 사람들the worse-off에게 우선성을 부여할 뿐이다. 물론 이때 평등은 부수적 결과로서 기대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할수록 그 사람을 돕는 것이 더 큰 중요성을 띤다고 보는 우선주의를 따르자면 당연히 부자보다는 빈자를 도와야 할 것이다. 파핏이 하향 평준화 반론를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우선주의를 도입한 탓인지 우선주의는 의무론적 원칙으로 간주되어 왔다. 불평등이라는 사태 자체를 회피해야 할 것으로 보는 목적론적 입장은 아무래도 하향 평준화 반론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닐에 따르면 우선성 입장은 목적론적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어떻게? "한 개인의 복지가 증가함에 따라 그 개인에 의해 향유되는 이득의 좋음은 감소한다." 10배고플 때 먹는 빵 한 조각과 배부를 때 먹는 빵 한 조각이 주는 만족감은 다르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는 배고픈 사람이 빵을 먹는 사태를 지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이다. 부자보다는 빈자를 도와줄 때 더 큰 가치를 증진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평등을 추구할 만한 또 다른 비내재적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내재적 평등주의는 이렇게 목적론적으로 해석된 우선성 입장을 포섭한다. 11파핏이 평등주의와 우선주의는 선택의 문제라고 - Equality or Priority? - 보았다면 오닐은 양자가 양립할 수 있다고 - Equality and Priority! - 본 것이다.
IV 비판
오닐은 목적론적 평등주의가 "너무 추상적이며 동기를 부여할 힘이 부족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평등이 좋고 불평등이 나쁜 이유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그가 제시한 비내재적 평등주의는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평등이 좋은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이유들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가령 낙인 찍히지 않는 것은 왜 좋은가? 계층간의 관계가 조화롭게 되는 것은 왜 좋은가? 어쩐지 비내재적 평등주의는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피하려고 그저 한 걸음 물러선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무서워서 도망가도 소용없다. 이 질문은 끝내 쫓아오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도대체 비내재적 이유들의 근거가 되는 가치들은 왜 좋은 것인가? 물론 나는 비내재적 평등주의가 마주한 이 상황이 목적론적 평등주의가 직면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것이 비내재적 이유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비내재적 평등주의에 따르면 평등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추구해야 할 이상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오닐의 견해에 따르면 평등이 비내재적으로 가져다 주는 가치에는 인격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비인격적 가치도 포함한다는 점이다. 나는 오닐이 괜히 비인격적 가치에 대한 논의를 도입해서 스스로를 곤란에 빠뜨리고 있다고 본다. 분명 인격적 가치는 실제로 우리에게 좋음을 가져다 준다. (물론 인격적 가치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던져볼 수 있다.) 그렇지만 비인격적 가치는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논의 대상이 되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좋음도 가져다 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좋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가령 자존감의 향상이 정작 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된 당사자에게는 전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좋을 수 있다는 것이 당췌 말이나 되느냐는 것이다. 비내재적 이유를 산출하는 비인격적인 가치에 대한 주장은 '평등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좋은 것'이라는 목적론적 평등주의의 논제만큼이나 궁색한 것이 아닐까?
오닐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는 '평등주의자들은 비내재적 평등주의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비내재적 평등주의가 호소하고 있는 이유들의 근거를 제시할 수도 없으면서 비내재적 평등주의를 믿어야 한다니? 믿어도 된다거나 믿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오닐의 논문 제목이 다름 아닌 "What Should Egalitarians Believe?" - "평등주의자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 이다.) 내가 보기에 오닐은 평등주의자들이 믿어서는 안 될 것 - What Egalitarians Should Not Believe - 에 대해서는 설득력있게 논의를 전개해 나간 것 같다. 파핏이 제시한 목적론적 평등주의와 의무론적 평등주의를 한계를 적절히 지적한 것은 분명 오닐의 공적이다. 그러나 평등주의자가 믿어야 할 것 - What Egalitarians Should Believe - 에 대한 그의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평등주의자들이 비내재적 평등주의를 따르게 하고 싶다면 오닐은 비내재적 이유들이 딛고 설 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리뷰 논문
Martin O'Neill, "What Should Egalitarians Believe?," Philosophy & Public Affairs 36(2) (2008): 119-156
더 읽어보면 좋은 텍스트
Derek Parfit, "Equality or Priority?" in Matthew Clayton & Andrew Williams, eds., The Ideal of Equality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0): 81-125
- Derek Parfit, "Equality or Priority?" in Matthew Clayton & Andrew Williams, eds., 『The Ideal of Equality』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0): 81-125 [본문으로]
- 사실 '부유하다'는 표현은 여기서 적확하지 않다. 이 맥락에서 논의되는 평등과 불평이 단순히 재산에만 관련된 것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분배의 대상이 되는 가치는 이를테면 건강과 명예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본문으로]
- 이 이유는 평등/불평등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각자가 충분한sufficient 양을 가지면 된다는 해리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이 주장은 "Equality as a moral ideal," 『Ethics』 98(1) (1987): 21-43, later reprinted in 『The Importance of What We Care About: Philosophical Essay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134-158 (ch. 11); "Equality and Respect," 『Social Research』 64 (1997): 3-15; "The Moral Irrelevance of Equality," 『Public Affairs Quarterly』 14(2) (2000): 87-103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문으로]
- 사실 이들 이유의 순서는 내가 논의를 위해 뒤바꾼 것이다. 오닐은 논문에서 인도주의적 이유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이어서 ①-③-④-②-⑤ 순서로 이유를 제시한다. [본문으로]
- 만약 다른 이유들이 이유 ①로 환원될 수 있다면 비본래적 평등주의는 의무론적 평등주의와 굉장히 가까워지거나 심지어는 동일한 것이 된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이유 ①이 부정의 혹은 그른 행동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유 ①이 의무론적 평등주의에서 말하는 "도덕적 이유"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아마도 불평등이 낙인 효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배경 조건background condition - 가령 가치관의 다원주의 결핍 등 - 에 대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본문으로]
-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의무론적 평등주의자들이 하향 평준화를 승인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정의를 바로 잡는 길이기 때문이다. 부정의를 바로 잡는 일이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추구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의무론적 평등주의가 하향 평준화 반론에 취약하다는 생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오닐은 의무론적 평등주의가 평등을 추구하는 동기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 같다. [본문으로]
- 오닐은 이런 경우를 상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비본래적 이유들을 고려해 볼 때 불평등의 감소는 (거의) 언제나 최소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오닐은 위 3가지 경우에 각각 "Weaker", "Starker", "Starkest"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본문으로]
- "약자우선주의"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나는 적절치 못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우선주의자가 우선성을 부여하는 대상은 삶의 질이 더 낮은 사람들the worse-off이지 약자가 아니다. 물론 혹자는 현재의 맥락에서 '약자'가 곧 '삶의 질이 더 낮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해볼 수는 있겠지만 - 약하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지는지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대응은 가능하다 - '약자'라는 어휘가 일상에서 갖는 용법을 고려할 때 이는 그다지 매력적인 대응이 아닌 것 같다. [본문으로]
- 오닐의 진술은 마치 파핏이 이 점을 간과했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파핏은 op. cit., pp. 101에서 우선성 입장이 의무론적 형태와 목적론적 형태를 모두 취할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 오닐은 여기서 말하는 '좋음'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 이것은 인격적인 가치와 비인격적인 가치를 모두 포함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만을 포함하는 것인가? 이 경우 어느 것이 포함되거나 배제되는가? ⓑ 좋음의 정도는 오로지 그것을 향유하는 개인이 갖는 복지의 정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복지의 정도에서 파생되는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일례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르면 평등은 사회 전체의 공리를 증가를 가져온다.) 혹은 양자 모두인가? 나는 ⓐ 평등이 가져다 주는 비본래적 가치들이 인격적 가치와 비인격적 가치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 비본래적 평등주의가 호소하는 이유들이 지극히 평등주의적인 관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좋음이 인격적 가치와 비인격적 가치를 모두 포함하되 파생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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