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프레게의 뜻과 지시체 구분 본문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는 논증의 타당성이 그 논증을 구성하고 있는 문장들에 등장하는 표현들이 갖는 어떤 의미론적 속성semantic properties에 달려있다는 직관에서 출발해 어떤 표현이 등장하는 문장의 진리값을 결정하는 것을 그 표현의 의미론적 값semantic value(=지시체reference)로 정의한다. 어떤 문장의 의미론적 값은 그것이 등장하는 문장, 곧 자기 자신의 진리값을 결정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진리값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논리적 어휘들의 의미론적 값도 알 수 있다. 고유 명사proper names는 대상을, 술어predicates와 양화사quantifiers는 각각 1차와 2차 함수를, 논리적 연결사connectives는 진리 함수를 그 의미론적 값으로 삼는다. [논리적 어휘의 의미론적 값에 대한 프레게의 입장] 그런데 의미론적 값이 한 표현의 유일한 의미론적 속성일까? 프레게는 의미론적 값이 의미론적 속성의 전부라고 볼 때 설명할 수 없는 경우들을 검토하고 의미론적 값이 아닌 새로운 의미론적 속성을 도입한다. 그게 바로 뜻sense이다. 그렇다면 의미론적 값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우들은 무엇인가?
① 대상 없는 이름bearerless name의 문제
"셜록 홈즈의 왼쪽 새끼손가락에는 검푸른 점이 두 개 있다"라는 문장은 참인가? 거짓인가? 이 문장의 진리값을 결정하는 것은 이 문장에 등장하는 여러 표현들의 의미론적 값일 것이다. 그런데 "셜록 홈즈"라는 표현은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의미론적 값을 결여한다). 셜록 홈즈는 소설 속 인물이니까 말이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셜록 홈즈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 문장은 무의미meaningless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문장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셜록 홈즈"라는 표현은 지시체가 아닌 다른 의미론적 속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뜻이다.
② 믿음 문맥에서 동일한 의미론적 값을 지닌 표현들의 대체substitution into belief contexts에 관한 문제
미국인 데이비드는 한국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퇴계 이황 선생이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에 대해 달리 더 아는 것은 없다. 이 경우 "데이비드는 퇴계가 퇴계라고 생각한다"는 명제는 참이다. 그런데
어떤 문장의 구성 요소를 그것과 같은 의미론적 값을 지닌 다른 것으로 대체하더라도 문장의 의미론적 값(=진리값)은 바뀌지 않는다
는 프레게의 논제 3에 따라 위 문장에 등장하는 "퇴계"라는 표현 중 하나를 "이황"으로 바꿔도 그 진리값을 바뀌지 않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데이비드는 퇴계가 이황이라고 생각한다"는 명제는 참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문장은 참이라고 보기 힘들다. 데이비드는 퇴계가 이황의 호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지시체가 유일한 의미론적 속성이라면 우리는 논제 3을 버리거나
복합 표현의 의미론적 값은 그 표현의 부분들이 갖는 의미론적 값에 의해 결정된다
는 합성성의 원리principle of compositionality(=논제 2)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지시체 외의 다른 의미론적 속성의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나는 서울이 한국의 수도라고 생각한다I believe that Seoul is the capital city of South Korea"라는 문장과 "나는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고 생각한다I believe that light is faster than sound"라는 문장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이는 "서울이 한국의 수도다Seoul is the capital city of South Korea"라는 문장을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Light is faster than speed"라는 문장으로 대체한 경우다. 이들 두 문장은 같은 의미를 갖는가? 이들 두 문장은 모두 그 의미론적 값으로 참을 갖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대체하더라도 - 논제 2와 3에 의거하여 - 나의 믿음에 대한 두 문장의 진리값은 달라질 수 없다. 그런데 내가 과학에 무지한 사람이라면 첫 문장은 참이지만 두번째 문장은 얼마든지 거짓이 될 수 있다. 이번에도 프레게는 자신의 주요 논제들을 지키고자 하는 한 의미론적 값이 아닌 다른 의미론적 속성을 도입해야만 할 것이다. 1
③ 정보력informativeness의 문제
샛별morning star와 개밥바라기evening star는 모두 금성Venus과 동일한 것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샛별이 개밥바라기다"라는 문장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떤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 문장의 구성 요소를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하기에 그들이 이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또한 "샛별"과 "개밥바라기"라는 표현을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만약 지시체가 유일한 의미론적 속성이라면 그들이 이해한 것은 "샛별"과 "개밥바라기"라는 표현들의 지시체다. 그런데 이들 두 표현의 지시체는 동일하므로 "샛별이 개밥바라기다"라는 문장을 이해하는 사람은 곧 이 문장이 참이라는 것 역시 알아야 한다. 하지만 천문학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이 문장을 이해하면서도 이 문장이 참이라는 것은 모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기실 이해한 것은 이 문장의 (그리고 이 문장을 구성하는 표현들의) 의미론적 값이 아닌 다른 무엇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프레게는 뜻 개념을 도입한다.
논제 8: 어떤 표현의 뜻은 그 의미의 구성 성분으로서 그 의미론적 값을 결정하는 것이다.
가령 "개밥바라기"라는 표현의 뜻은 "저녁의 어떠어떠한 시간에 하늘의 어떠어떠한 방향에서 보이는 천체" 정도가 될 것이다. 금성이 바로 "개밥바라기"의 뜻이 기술하고 있는 조건을 충족시킨다. 그래서 "개밥바라기"의 의미론적 값은 금성이 된다. "개밥바라기"의 뜻이 그것의 의미론적 값을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표현의 뜻을 알면서도 그 표현의 지시체가 무엇인지는 모를 수 있다. 천문학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저녁의 어떠어떠한 시간에 하늘의 어떠어떠한 방향에서 보이는 천체"라는 말을 이해하면서도 해당 조건을 만족시키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 ③을 해결할 열쇠가 여기에 있다.
논제 9: 어떤 표현의 의미론적 값을 모르지만 그것의 뜻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천문학 바보도 "샛별은 개밥바라기다"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는 있다. 이때 그가 파악하는 것은 이 문장과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의 지시체가 아니라 뜻이기 때문이다.
논제 10: 어떤 표현의 뜻은 그것을 이해understand하는 누군가가 파악grasp하는 바로 그것이다.
논제 11: 어떤 복합 표현의 뜻은 그 표현의 부분들이 갖는 뜻에 의해 결정된다.
그가 "샛별"과 "개밥바라기"라는 표현 및 동일성 술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면 "샛별은 개밥바라기다"라는 문장의 뜻 역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 문장과 그 속에 등장하는 표현들의 지시체가 무엇인지는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천문학을 1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샛별은 샛별이다"라는 문장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또한 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논제 12: 누군가가 두 표현들의 뜻을 모두 파악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들 두 표현의 뜻이 동일하다면, 그는 이들 두 표현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뜻은 지시체를 결정하므로 뜻이 같음을 안다면 지시체가 같음을 모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뜻의 투명성transparency of sense 논제라고 부른다.
뜻 개념의 도입은 문제 ①을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 것 같다. 프레게에 따르면
논제 13: 어떤 표현은 설사 의미론적 값을 결여하더라도 뜻을 가질 수 있다.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천체"나 "가장 큰 자연수"라는 표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어떤 대상을 지시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이들 표현은 무의미하지 않다. 왜냐하면 뜻을 갖기 때문이다. 프레게의 이런 입장은 "셜록 홈즈의 왼쪽 새끼손가락에는 검푸른 점이 두 개 있다"라는 문장이 진리값을 가지지 못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이 문장의 진리값을 결정하는 것은 이 문장을 구성하는 표현들의 의미론적 값인데 "셜록 홈즈"라는 고유 명사가 의미론적 값(=지시체)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논제 14: 의미론적 값을 결여한 표현을 담고 있는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그럼에도 프레게는 뜻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우리가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음을 - 이 문장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 보일 수 있게 되었다.
문제 ②는 어떤가?
"데이비드는 퇴계가 퇴계라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은 참인 반면에 "데이비드는 퇴계가 이황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은 거짓이다. 프레게는 두번째 문장에서 등장하는 "퇴계"와 "이황"이 사실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적어도 믿음 문맥에서는 말이다.
논제 15: 믿음 문맥에서 고유 명사의 (간접적) 지시체는 그것의 관습적 뜻customary sense이다.
관습적 뜻은 다른 게 아니라 어떤 표현이 믿음 문맥 바깥에서 갖는 뜻이다. "퇴계"와 "이황"은 비록 갖은 대상을 지시하지만 대개 다른 뜻을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데이비드가 퇴계가 곧 이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퇴계"의 뜻은 A이고 "이황"은 뜻은 B인데 A=B라고 믿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서울이 한국의 수도라고 생각한다"와 "나는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고 생각한다"는 문장의 차이 역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내가 과학을 1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전자는 참이지만 후자는 거짓일 수 있다. 만약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와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가 위 두 문장 속에 있는 한에서 참이나 거짓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관습적 뜻을 가리킨다면 두 문장의 의미가 왜 다른지 - 그리고 왜 이들의 진리값 역시 다를 수 있는지 - 알 수 있다.
논제 16: 어떤 문장의 구성 요소를 그것과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것으로 대체하더라도 문장의 뜻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서울이 한국의 수도라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은 "나는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에 등장하는 어떤 표현을 그것과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표현으로 대체해서 얻은 문장이 아니다. 적어도 이들 문장의 문맥 속에서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와 "빛은 소리보다 빠르다" 두 문장의 지시체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른 관습적 뜻을 - 그러니까 믿음 문맥 바깥에서는 다른 뜻을 - 가지므로.
반면에 하지만 "나는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고 생각한다"와 "나는 소리가 빛보다 느리다고 생각한다" 두 문장은 논제 16에 의해 동일한 뜻(과 진리값)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빛은 소리보다 빠르다"라는 문장이나 "소리는 빛보다 느리다"라는 문장이나 같은 뜻 이니까. 다시 말해 이들 두 문장은 같은 생각thought을 표현한다. 2
논제 17: 문장의 뜻은 생각이다.
주의할 점은 이 생각이란 것이 심리적인psychological 혹은 주관적인subjective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생각은 오히려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의 참이 성립하기 위해 이 세계에 성립해야 하는 필요충분조건을 명시한다는 점에서 객관적objective이다. 때문에 문장의 뜻은 그 문장의 진리 조건truth condition이기도 하다.
여기서 혹자는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어떤 표현의 의미론적 값을 결정하는 것이 그것의 뜻(논제 8)이다. 그런데 이 뜻을 결정하는 것은 다시 그 표현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뜻(논제 11)이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문장의 의미론적 값을 결정하는 것은 그 문장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의미론적 값(논제 2)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장의 의미론적 값을 결정하는 것은 그 문장을 이루는 표현들의 뜻이면서 의미론적 값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문장의 진리값은 물론 그 문장을 구성하는 표현들의 의미론적 값에 의존한다. 또 이들 의미론적 값은 다시 해당 표현들의 뜻에 의존한다. 때문에 어떤 문장의 진리값은 그것을 구성하는 표현들의 뜻에 의존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들 표현의 의미론적 값과 뜻이 동일한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A가 B를 결정하고 B가 C를 결정한다는 말은 곧 A가 C를 결정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A와 B가 동일하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논제 18: 어떤 표현을 이해하는 사람도 그 표현의 의미론적 값은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표현을 이해할 때에 파악하는 것은 그 뜻이지 지시체가 아니다. "샛별"이란 고유 명사를 우리는 이해하지만 이것이 가리키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샛별이 개밥바라기다"라는 문장이 참이라고 배우는 순간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문장을 이해하는 와중에 또한 이 문장의 - 그리고 이 문장을 구성하는 표현들의 - 지시체를 파악한다면 이 문장이 참임을 알게 되더라도 새로운 정보를 얻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샛별이 샛별이다"라는 문장이 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때처럼 말이다.
리뷰 텍스트
Alexander Miller, Philosophy of Logic 2nd ed. (New York: Routledge, 200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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