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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어의 이모티비즘

동경 TOKYO 2016. 8. 29. 14:23

I 이모티비즘

논리 실증주의자 에이어A. J. Ayer는 『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각주:1]에서 오로지 그 진리값을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문장만이 유의미한 문장이라는 검증주의적 의미론verificational theory of meaning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입장은 "가치에 대한 진술statements of value"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미학적 진술이나 도덕적 진술은 경험적 관찰을 통해 그 진리값을 검증할 수 없다.

이러한 반론을 두고서 우리가 할 일은 그 자체로도 만족스러우며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주의적 원칙들과도 일관된 방식으로 "가치에 대한 판단"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치에 대한 진술이 유의미하다면 그것은 일상적인 "과학적" 진술임을, 반대로 그것들이 과학적이지 않다면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다만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감정의 표현일 뿐임을 보이는 일일 것이다.[각주:2]

그의 이모티비즘emotivism[각주:3]이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이모티비즘은 도덕적 판단이 믿음beliefs이 아닌 다른 것을 표현한다는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의 일종이다. 믿음 대신 표현되는 것이 무어냐에 따라 비인지주의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이모티비즘은 도덕적 표현이 호오approval/disapproval의 감정emotions 혹은 감성sentiments를 표현한다고 본다. 감정은 당연히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다. 애초에 세계를 표상represent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믿음은 아이들이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이 성립하면 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일으키는 혐오감 등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그 돈을 훔치다니 당신 그릇된 행동을 한 거요"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그 돈을 훔쳤소"라고 말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진술하는 게 아니다. 이 행위가 그르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나는 그것[이 행위]에 대한 그 어떤 진술도 첨가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것에 대한 도덕적 반감moral disapproval을 표현할 따름이다. 그것 마치 내가 "당신은 그 돈을 훔쳤소"라고 말하되 독특한 혐오감이 서린 말투로 말하거나 혹은 그렇게 쓰되 특별한 느낌표를 덧붙여 쓰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 말투나 느낌표는 기실 이 문장의 문자적 의미literal meaning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는다. 그저 그 문장의 표현이 화자가 겪는 특정한 느낌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내가 만약 이전의 진술을 일반화하여 "돈을 훔치는 것을 그릅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사실적 의미factual meaning를 결여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 즉,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명제를 표현하는 것이다.[각주:4]

도덕에 관한 의견의 불일치disagreements는 모순된 믿음contradictory beliefs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의 충돌clash of feelings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II 왜 이모티비즘인가? 왜 인지주의가 아닌가?

에이어는 어떻게 이모티비즘을 옹호하는가? 그는 먼저 여러 형태의 인지주의 - 자연주의적인 것과 비자연주의적인 것 모두 - 를 검토하고 그것들이 모두 그럴듯하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 기존의 인지주의가 모두 실패한다는 점을 지적한 후, 그는 도덕적 판단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비인지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그는 무어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연주의적 인지주의를 비판한다.

쾌락을 주는 것들이 좋지 않다고 말하거나 나쁜 것들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을 범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x는 좋다"라는 문장이 "x는 쾌락을 준다" 혹은 "x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문장과 동치일 수 없다.[각주:5]


그렇다고 에이어가 무어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는 무어의 비자연주의도 비판한다. 어쨌든 도덕적 판단은 믿음을 표현한다고 보는 인지주의니까.

에이어가 내세운 검증주의적 의미론에 따르면 유의미한 문장은 모두 분석적이거나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무어는 도덕적 판단이 분석적일 수 없다고 본다. 에이어는 따라서 무어가 도덕적 판단이 유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몰아 붙인다.

규범적 윤리 개념이 경험적 개념으로 환원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윤리학에서의 "절대주의적absolutist" 견해의 손을 들어주는 듯 하다. 가치에 대한 진술들은 평범한 경험적 명제들처럼 관찰observation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며, 오로지 신비로운 "지적 직관intellectual intuition"에 의해서만 통제된다는 견해 말이다. 이 이론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가치에 대한 진술들을 검증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직관적으로 분명해 보이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의심스레 혹은 심지어 거짓으로까지 보일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상충하는 두 직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 이상, 단순히 직관에 의존하는 것은 명제의 타당성validity[각주:6]에 대한 검토로서 그 가치가 없다. 그런데 도덕적 판단의 경우, 이러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도덕철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도덕적 판단이 올바르다는 것을 "안다"며 논쟁을 종결하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그저 순수한 심리적 관심의 대상일 뿐이며, 도덕적 판단의 타당성을 증명해낼 여유가 다만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이들에 반대하는 도덕철학자들 역시도 그들의 윤리적 견해가 올바르다는 것을 "안다"고 주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 확실성subjective certainty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한, 양자 중 어느 쪽이 옳은지 선택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각주:7]

결론은 간단하다. 도덕적 판단은 그저 헛소리에 불과하다.


몇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비자연주의에 대한 에이어의 비판은 그의 검증주의적 의미론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이 의미론은 정말 받아들일 만한 것일까? 마이클 스미스Michael Smith는 "빅뱅 이전에 우주의 모든 물체는 하나의 점에 수렴해있었다"는 문장을 예로 들면서 분석적이지도 않고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지도 않지만 여전히 유의미한 문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검증주의적 의미론에 대한 반례가 된다는 것. 또 검증주의적 의미론은 "이데아는 존재한다"와 같은 문장들도 경험적으로 유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직관적인 귀결에 빠지기도 한다. [II 참고: 논리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

하지만 의미론을 문제 삼지 않더라도 여전히 이모티비즘에 대한 그의 입장을 문제 삼는 것은 가능하다. 그의 의미론에 따르면 도덕적 진술들은 모두 문자적 의미literal sense를 갖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윤리적 개념은 "그저 사이비 개념pseudo-concepts에 불과하다."[각주:8] 윤리학은 헛소리라는 것. 에이어는 형이상학적 진술들도 이렇게 헛소리에 불과하다며 따라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닌 게 아니라 『언어, 진리, 논리』의 제1장 제목이 "형이상학의 제거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다. 그렇다면 윤리학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 게 아닐까? 왜 제6장의 제목은 "윤리학의 제거"가 아닌가? 이런 점에서 에이어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다소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검증의 원칙을 의미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중에서도, 나는 "의미"라는 단어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으려 하며, 또한 의미의 어떤 뜻에 따르면 진술이 분석적이지도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지도 않지만 여전히 유의미하다meaningful고 말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도 않으려 한다.[각주:9]

이 지점에서 에이어는 도덕적 진술이 비록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지는 않더라도 또 다른 종류의 의미 - 정서적 의미emotive significance - 는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한 가지 문제는 정서적 의미를 지니는 판단과 그런 의미조차 가지지 않는 (따라서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제거되어야 할) 판단을 나누는 기준이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이 판단 혹은 저 판단은 정서적 의미를 지니는가? 그렇지 않은가? 왜?" 또 다른 문제는 윤리적 판단에는 정서적 의미를 부여하되 형이상학자들의 추정적 판단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할 수는 있는지의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 "정서적 의미는 대체 언제 부여할 수 있는가? 왜 형이상학적 명제에는 부여하지 않는 정서적 의미가 윤리학적 명제에는 부여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비자연주의에 대한 보다 나은 - 검증주의적 의미론에 의존하지 않는 - 비판은 없는가? 있다. 없을리가?

① 도덕적 속성이 자연적 속성에 수반된다supervene는 점 - 만약 두 존재자가 동일한 자연적 속성을 갖는다면 그것들은 또한 동일한 도덕적 속성을 가질 것이라는 점 - 은 선험적으로a priori 분명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자연적 속성의 측면에서 완전히 동일한 두 행위나 사건을 두고서 다른 도덕적 평가를 내놓는 사람은 개념적 혹은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고 보는 것이 마땅해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비자연주의는 이런 선험적 수반 관계를 적절히 설명해내지 못한다.

비자연주의는 강한 인지주의strong cognitivism의 일종으로 도덕적 판단이 도덕적 사실에 대한 인지적 접근의 결과라고 본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도덕적 사실을 인지하더라도 동일한 자연적 속성을 가진 행위라면 반드시 동일한 도덕적 속성을 갖게 된다는 일반적 결론에 이를 수는 없다. 내가 직접 인지한 것들 중 어떤 자연적 속성 N을 가진 행위는 죄다 도덕적 속성 M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M이 N이 수반된다는 것이 참이라는 연역적 주장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귀납적 논증을 제시하는 데에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비자연주의자들은 도덕적 속성이 자연적 속성에 수반한다는 점은 오직 후험적a posteriori 참으로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비자연주의는 자연적 속성에 대한 도덕적 속성의 선험적 수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이것은 사실 비자연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은 아니다. 도덕적 사실들을 하나 하나 인지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선험적 수반 관계를 설명해낼 수 있다는 답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자연주의자가 그 방법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 한 - 그리고 자연적 속성에 대한 도덕적 속성의 선험적 수반 관계를 부인하지 않는 한 - 그들은 여전히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② 우리는 정말 도덕적 사실을 "지각perceive"하는가?

지각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언급은 많은 문제에 봉착한다. 그 중 한 가지 문제는 바로 윤리적인 것들은 굉장히 많은 경우에, 그리고 선택에 지침을 제공하는 기능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흔히, 지각된perceived 상황이 아니라 상상된imagined 혹은 기술된described 상황에 관여한다. 우리는 일반적 기준general standards에 의거하여 기술된 행위자나 행위의 행동the behaviour of the described agents or actions[각주:10]에 대한 윤리적 평결verdicts에 도달한다. 이들 기준이 지속적으로 지각된다고 보는 건 사실을 왜곡하는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ingratitude이 비천base하다는 것은 꼭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의 예를 보아야만 아는가? 내가 직접 보지 않은 예시의 일반화에 대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각주:11] 

꼭 우리가 지각을 해야만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 반론도 비자연주의를 박살내지는 못한다. 만약 우리의 도덕적 숙고moral deliberation 과정에서 지각이 불필요한 것이라면 - 그저 "일반적 기준general standards"을 참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 우리가 도덕적 속성을 지각함으로써 도덕적 판단을 내리게 된다고 보는 비자연주의자들은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이다. 대체 지각이 하는 일은 무엇이고? 지각이 할 일이 남아 있다면 "일반적 기준"의 역할은 어디까지로 제한되는가? 이 반론은 자연주의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③ 비자연주의적 속성은 어떻게 동기부여의 힘을 가질 수 있는가?

[열린 질문] 논증은 결국 자신에게 먹이를 준 사람의 손을 깨물게 되는 격이다 (...). "자연주의적 속성 R"을 "독특하고sui generis 단순한simple 비자연주의적 속성 Q"로 대체한다고 한들 어떻게 동기부여 혹은 행위까지 이어지는 적절한 연결 고리link를 논리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다만 조금이라도 쉬워지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각주:12]

"비자연주의적 속성 Q를 지닌 X는 또한 좋은가?"라는 질문도 여전히 열린 질문일 수 있다는 것. 자연주의에 들이댄 칼날이 자기에게도 날아오는 것이다.

④ 도덕적 속성은 대체 어떻게 인지하는가? 비자연주의에 따르면 도덕적 속성은 비자연적인 것이므로 인과적 질서의 한 부분도 아니며 감각으로 탐지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내 앞에 놓인 컴퓨터가 가진 자연적 속성은 인과적 질서의 부분이기도 하고 감각으로 탐지해낼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걸 대체 어떻게 인지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 "빛이 컴퓨터에 부딪히면 일정 파장의 빛이 다시 반사되어 나의 망막에 들어오게 되고…" 그런데 비자연적 속성은 어떻게? 비자연주의는 강한 인지주의의 한 형태이므로 도덕적 판단이 도덕적 사실에 대한 인지적 접근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대체 우리가 사용하는 인지 능력은 무엇인가? 또 어떤 과정을 통해 이 인지가 이루어지는가?

혹자는 "직관intuition"을 통해 인지가 이루어진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대체 직관이 뭔가?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하는 능력? 그럼 비자연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뭐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도덕적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어. 왜냐고?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사용하니까!" 이렇게? 혹자는 직관이 감각적 지각 능력과 어떤 측면에서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다른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다. 이걸 누가 모르나? 문제는 이게 대체 어떤 측면에서 어떻게 비슷하고 또 어떤 측면에서 어떻게 다르길래 도덕적 사실에 대한 인지가 가능하느냐는 것이다. 결국 비자연주의자는 "인식론적 파산"(32)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각주:13]


III 의의

에이어는 애초에 도덕적 사실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니 도덕적 판단의 역할은 사실을 진술하는 게 아니다. 덕분에 에이어는 무어가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비자연주의는 대체 우리가 도덕적 사실의 본성에 대한, 그리고 도덕적 사실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을 진다. 이른바 "형이상학적 채무"와 "인식론적 채무"(33)를 지지않는다는 것.


IV 오해

① 이모티비즘은 주관주의subjectivism과는 다르다. 주관주의에 따르면 도덕적 판단은 판단 주체 혹은 판단 주체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 상당 수의 감정 혹은 감성에 대한 기술description 혹은 보고reports다. "살인은 그르다"는 말은 곧 "나는 (혹은 내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 상당수는) 살인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모티비즘은 도덕적 판단이 그 어떤 것에 대한 기술이나 보고도 아니라고 본다. 그러니 감정이나 감정에 대한 기술이나 보고는 더더욱 아니다.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살인이 그르다는 판단은 그저 판단 주체의 특정한 감정을 표현express하거나 발현evince하는 것이지 무언가에 대해 말say하는 것이 아니다. (비인지주의에 속하는 이론들 일부가 "표현주의expressivism"이라 불리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실수로 레고 블럭을 밟았을 때 "으아아아아악!"이라고 소리를 지르면 이게 나의 감정에 대한 말인가? 그냥 내 감정의 표현이다.

② 몇몇 학자들은 이모티비즘이 "언어-행위 오류speech-act fallacy"를 범한다고 주장해왔다. 어떤 문장이 태도를 표현한다는 사실로부터 곧 그 문장이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도 전자에서 후자를 추론했다는 것이다. 문장은 태도를 표현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판단을 표현한 문장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보는 이모티비즘에 문제가 있다는 것.

"언어-행위 오류"는 분명 오류가 맞다. 하지만 이모티비즘이 이 오류를 범하는 건 아니다. 사이먼 블랙번Simon Blackburn에 따르면

[이모티비즘에] '이 말들[도덕적 진술들]은 이 태도를 표현한다. 따라서 진리 조건truth-conditions을 갖지 않는다'와 같은 형식의 추론이 없다. 그저 '이 말들은 이 태도를 표현한다. 우리가 만약 이 말이 진리 조건을 갖지 않는 것으로 본다면 [가령 인지주의가 지니는 형이상학적·인식론적 채무를 지지 않아도 되므로] 철학적 발전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말을 기술적인descriptive 것이 아니라 표현적인expressive 것으로 보자'와 같은 형식의 추론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오류는 없다. 두 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사실 어떤 발화utterance가 표현적이면서 동시에 기술적이기도 한 것인지의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표현적인 것은 그 발화가 가진 독특한distinctive 의미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알 수 있다. 용어가 기술적인 동시에 평가적이게 되는 것은 바로 추가적 도입extra import 때문이며, 바로 이렇게 새로이 도입되는 것이 표현적 역할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에 따른 추가적 진리 조건이 없다면 가치에 대한 표현주의는 건사할 것이다.

간단하게 줄이면 이렇다. (1) 도덕적 진술이 사실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이모티비즘의 주장은 그것이 태도를 표현한다는 사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도덕적 진술이 사실을 기술하지 않는다고 볼 때 형이상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철학적 난제들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에 도덕적 진술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더 낫다고 볼 뿐이다.

(2) 이모티비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그 돈을 훔치다니 당신 그릇된 행동을 한 거요"라는 말이 표현적인 동시에 기술적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기실 이 문장이 "표현적이면서 동시에 기술적이기도 한 것인지의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문장은 "당신"이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의 표현적 성격은 이러한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 이 문장이 표현적인 까닭은 그것이 - 위 사실을 기술하는지의 여부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 그러한 사실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적 기능은 바로 이를테면 "당신은 그 돈을 훔쳤소"라는 문장에 "추가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이 문장이 "독특한 의미"를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이모티비즘이 주장하는 바는 다만 "독특한 의미"가 추가되더라도 이 문장의 진리 조건까지 함께 불어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또 다른 진리 조건이 추가가 된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나? (에이어가 그 존재를 부정하는) 도덕적 사실의 성립이 아니겠는가?


리뷰 텍스트

Alexander Miller, Contemporary Metaethics: An Introduction, 2nd ed. (Cambridge: Polity Press, 2013), §§3.1-3.4.

  1. 한국에서는 송하석의 번역본이 『언어, 논리, 진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번역을 왜 이렇게 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본문으로]
  2. A. J. Ayer, 『Language, Truth, and Logic』 2nd ed. (New York: Dover, 2014), pp. 102-03. [본문으로]
  3. "정서주의"로 번역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4. Ibid., p. 107. [본문으로]
  5. Ibid., p. 105. [본문으로]
  6. 진리값을 의미하는 것 같다. 타당성은 명제들의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7. Ibid., p. 106. [본문으로]
  8. Ibid., p. 107. [본문으로]
  9. Ibid., p. 15. [본문으로]
  10. "기술된 행위자나 행위described agents of actions"라고 쓸 것을 잘못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11. Simon Blackburn, 『Essays in Quasi-Real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p. 170. [본문으로]
  12. Stephen Darwall, Alan Gibbard, and Peter Railton, "Toward Fin de Siècle Ethics: Some Trends," 『Philosophical Review』 101 (1992): 115-89, p. 117. "Fin de Siècle"은 "한 세기의 끝"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로 논문 제목에서는 이탤릭체로 표기되어 있다. [본문으로]
  13. 반론 ①과 ④는 오직 비자연주의에게만 적용가능한 것이다. 반면 반론 ②와 ③은 자연주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듯 보인다. 그러나 알렉산더 밀러Alexander Miller는 이 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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