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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비즘의 문제점

동경 TOKYO 2016. 10. 2. 08:03

에이어A. J. Ayer 등이 주창한 이모티비즘emotivism의 문제점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① 함축된 오류implied error의 문제

이모티비즘은 일종의 투사주의projectivism다. 우리는 "-는 그르다is wrong"이라는 술어를 마치 이것이 그름wrongness이라는 속성을 지칭하는 것처럼 사용하지만 사실 그냥 우리의 감성이나 감정을 세계에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게 이모티비즘의 내용아니던가?

우리는 마치 우리의 말이 기술describe하고, 우리가 추론의 대상을 삼을 수 있고, 우리의 잘못 이해할 수도 있는, 그런 사물의 속성이 있는 듯 말하고 생각하지만 그때  우리는 기술적descriptive이지 않은 태도attitude나 습관habit 혹은 다른 관심commitment을 세계에 투사한다. 투사는 흄Hume이 "우리의 내재적 감성internal sentiment에게서 빌려 온 색깔로 모든 자연적 대상을 꾸미고 더럽히는 것"이나 "자기 자신을 세계로 퍼트리는" 마음에 대해 말할 때 지칭하던 것이다.[각주:1]

문제는 이 투사가 실수mistake오류error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속성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우리가 정말 합리적인 존재라면 도덕적 진술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② 프레게-기치 문제The Frege-Geach Problem

이 문제는 피터 기치Peter Geach가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인데 그가 이 아이디어는 기실 프레게Gottlob Frege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프레게-기치 문제"라 불리게 되었다.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살인은 그르다"는 도덕적 진술이 주장assertion으로 사용되는 경우 그것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say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발화자의 호오를 표현express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진술이 그 맥락상 주장으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가령 이 진술이 조건문의 전건antecedent로 사용된다면 어떤가? "살인이 그르다면 누군가가 살인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도 그르다"는 말에서 "살인이 그르다"는 문장은 발화자의 호오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1) 살인은 그르다

(2) 살인이 그르다면 누군가가 살인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도 그르다

∴ 누군가가 살인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그르다

이 논증은 분명 타당valid해보인다. 그러나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살인은 그르다"는 문장이 전제 (1)에서 쓰였을 때와 전제 (2)에서 쓰였을 때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위 논증은

(1) 소주병에는 주둥이가 있다

(2) 어떤 것에 주둥이가 있다면 그것은 소화기관을 갖고 있다

∴ 소주병은 소화기관을 갖고 있다

이런 논증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주둥이가 있다"는 말은 전제 (1)과 (2)에서 다른 의미를 갖는다.

혹은 프레게-기치 문제를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살인 교사가 그르다는 결론을 가진 위 논증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진리표를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전제 (1)은 진리값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위 논증은 타당성도 검증할 수 없다. 그런데 누가 봐도 타당한 논증 아닌가? 만약 이모티비즘이 자신의 핵심 논제를 지키고자 한다면 이렇게나 직관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추론이 실은 타당하지 않다거나 적어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우겨야 한다.


③ 조현병的 태도schizoid attitude의 문제

이모티비즘을 주장하는 사람이 도덕적 판단에 따라 숙고하거나 행위한다면 그것은 조현병的 태도가 아닌가?

투사주의자가 책무니 의무니 (...) 하는 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이 외재적external이고 독립적independent이며 권위적authoritative 요구사항requirements를 표상한다는 것을 거부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말하자면 그의 도덕적 헌신moral commitments에 대해 조현병的 태도를 - 도덕적 헌신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런 도덕적 헌신의 근거가 없다는 생각도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 갖고 있는 게 틀림없지 않은가?[각주:2]


④ 정신 의존성mind-dependence의 문제

흄의 말처럼 옳음과 그름이 그저 "우리의 감성이 낳은 아이들"일 뿐이라면 결국 옳음과 그름은 우리의 감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감성이 바뀌는 즉시 옳음과 그름도 바뀔 것이고, 우리의 감성이 사라진다면 옳음과 그름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도덕이란 정말 이렇게 정신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인가?


⑤ 도덕적 진술이 표현하는 것은 대체 어떤 종류의 감정인가?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도덕적 진술은 어떤 것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비인지적인 감성이나 감정, 느낌 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성이나 감정, 느낌은 그냥 아무 감성이나 감정, 느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에이어도 다소 분명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행위가 그르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나는 그것[이 행위]에 대한 그 어떤 진술도 첨가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것에 대한 도덕적 반감moral disapproval을 표현할 따름이다. 그것 마치 내가 "당신은 그 돈을 훔쳤소"라고 말하되 독특한peculiar 혐오감이 서린 말투로 말하거나 혹은 그렇게 쓰되 특별한special 느낌표를 덧붙여 쓰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각주:3]

특별한 종류의 도덕적 반감이 바로 표현되는 느낌이다.[각주:4]

윤리적 상징들은 (…) 단순히 특정 유형의 행위나 상황에 대한 윤리적ethical 느낌을 표현하는 문장들에 나타난다.[각주:5]

[사람들이] 이모티비즘적 이론에서 말하는 종류의 도덕 판단을 할 때, 그들은 그저 자신의 도덕적 감성을 표현하며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공유하도록 부추길 뿐이다.[각주:6]

한마디로 이 감성이나 감정, 느낌이 도덕적 감성이나 감정, 느낌이란 것이다. 근데 그게 뭔데?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1) 이 감정이란 환원불가능한 방식으로irreducibly 도덕적 감정이라는 것이다. 분석불가능unanalyzable하고 독특한sui generis 도덕적 감정말이다. 혹은 (2) 도덕적이긴 하지만 비도덕적 감정으로 분석가능analyzable하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다. 밀러Alexander Miller는 어느 쪽으로 답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이고 말한다.


(1) 도덕적 진술은 환원불가능한 도덕적 감정을 표출한다?

당장 떠오르는 문제는 이것이다.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도덕적인 진술은 환원불가능한 도덕적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환원불가능한 도덕적 감정은 뭔가? 이것은 말 그대로 환원불가능하므로 다른 감정을 통해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도덕적 감정은 도덕적 진술에 의해 표출되는 것이다. 마법은 마법사가 부리는 것이고 마법사는 마법을 부리는 자다? 이거 완전 노답이다.

이것이 에이어 본인의 검증주의verificationism과도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진술은 오로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심적 상태mental states에 대한 진술도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가 없으면 그냥 어불성설nonsense이 되고 만다. 그래서 검증주의는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에 적용되어 행동주의behaviorism을 낳았다. 마음은 곧 행동이라는 것이다.

의식을 가진 인간과 의식이 없는 기계 사이의 구분은 다른 유형의 지각 가능한 행동 사이의 구분으로 드러난다. 의식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어떤 대상이 사실은 의식을 가진 존재자가 아니라 다만 정신을 결여한 생물dummy이나 기계일 뿐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면 그 근거는 바로 의식의 존재나 부재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험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점이 될 것이다. 만약 어떤 대상이 항상 의식적인 존재라면 그 정의상by definition 반드시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나는 곧 그 대상이 실제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셈이다. (...) 어떤 대상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다만 그 대상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검증을 들이대더라도 의식을 경험가능한 형태로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라는 주장일 뿐이다.

만약 독특한 도덕적 감정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느낄 때 드러나는 독특한 행동도 있을 것이다. 근데 그게 뭔가? 이에 대답하기란 정말 쉽지 않아 보인다.

또 다른 문제점은 우리가 도덕적 숙고의 경험을 반성해보더라도 도덕적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모티비즘은 도덕적 진술이나 판단은 도덕적 느낌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도덕적 진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건 도덕적 느낌을 표현하는 진술이야"라고 대답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진술에 의존하기 전에 이미 도덕적 느낌이 무엇인지를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 크리스핀 라이트Crispin Wright는 이 가능성을 의심한다.

순수하게 현상학적으로만 규명된, 그리고 우리가 다른 종류의 가치에 대해서 느끼는 것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양태의 도덕적인 정서적 관심moral emotional concern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 내가 보기에 고려할 가치가 없다. 덕virtue은 옳은 이유에서 옳은 대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때 충족되는 것이다. 이때 특정한 음색timbre의 관심을 느낄 필요는 없다. (...) "도덕적 경험moral experience"이라는 개념에게 어떤 중대한 역할을 맡기기에 충분한 수준한 수준의 날 느낌rawness를 도덕적 판단에서 찾을 수 있을지의 여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각주:7]

한마디로 도덕적 느낌이란 걸 현상적으로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걸 발견해야 도덕적 느낌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설명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도저히 도덕적 판단을 통하지 않고서 도덕적 느낌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아주 어린 아이들,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어린 아이들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등의 표정을 보고서 웃을 수 있으며, 이 아이들이 대상을 웃기는 것으로 여긴다고 묘사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 이와 유사하게 도덕적 가치를 전개념적pre-conceptional 방식으로 발견해내는 경우는 어떨까? 비슷한 나이의 아이가 말에게 채찍질을 하는 기수를 보고서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고 생각해보자. 이 감정을 도덕적 반감moral disapprobation의 원초적 감성으로 보아야 할까? 이 질문이 확정적으로 대답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이 아이는 말의 발굽 소리나, 기수가 쓰고 있는 가면에 겁을 먹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자신이 채찍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위협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각주:8]

반대로 다 큰 어른이 말을 잔인하게 채찍질하는 기수를 보고서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도덕적 반감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 다 큰 어른은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겠나?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모티비즘은 도덕적 판단을 도덕적 느낌을 통해 설명할 수 없게 된다.


(2) 도덕적 진술은 비도덕적인 감정으로 환원가능한 도덕적 감정을 표출한다?

도덕적 진술이 표출하는 도덕적 감정이란 것이 비도덕적인 성질의 것으로 환원가능하다는 입장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사실상 도덕적 판단이란 것을 제거해버리는 셈이 된다. 만약 도덕적 감정이 비도덕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이 감정은 기실 "아이유 신곡 쩔더라"라거나 "우리 학교 학생식당 밥은 핵노맛이다"와 같은 판단을 할 때 표현되는 감정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물론 도덕적 감정이 더 강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 정도의 차이가 유일하다. 그럼 도덕적 판단과 취향 판단도 질적으로 다르지 않게 된다. 사실상 도덕적 판단이라는 독특한 범주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건 이모티비즘이 취하는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도덕적 진술이 표출하는 감정은 그냥 아무 감정이어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이 문제를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도덕적 판단이 다름 아닌 도덕적 판단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표출하는 감성이 도덕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표출하는 이유reasons가 도덕적이라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대응도 이모티비즘을 내세우는 이들이 채택할 수 있는 대응은 아니다.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도덕에 관한 의견불일치disagreement을 조정할 만한 합리적 기반rational basis이 없다.

우리가 사실에 대한 물음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가치에 대한 순수한 물음을 다루게 될 때 논쟁argument는 실패하며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하찮은 싸움mere abuse을 하게 된다.[각주:9]

사실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있을 때는 논쟁이 가능하다. 사실을 확인하면 되니까. 하지만 가치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있을 때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도덕적 진술에 이유가 있다면 논쟁은 가능할 것이다. 서로에게 주장에 대한 이유를 묻고 그것을 기반으로 논쟁을 이어나가면 되니까. 하지만 이는 이모티비즘의 논제와 배치되지 않는가?

둘째, 열린 질문 논증에 두드려 맞게 된다. 이것은 그냥 두드려 맞는 게 아니라 믿는 도끼에 두드려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이어는 열린 질문 논증을 통해 자연주의적 인지주의를 비판한 바 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에 대한 에이어의 비판] 그럼 이모티비즘이 두드려 맞는 장면을 지켜보도록 하자.

(1) "누군가가 살인이 그르다고 판단했다"는 문장이 개념적 분석에 의해 "그 누군가는 살인에 대한 비인지주의적 반감의 감성을 표현했다"는 문장과 동치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2) 누군가가 살인은 그르다고 판단했다는 것은 곧 "그 누군가가 살인에 대한 비인지주의적 반감의 감성을 표현했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부분이 된다.

이렇게 보면,

(3) "누군가가 살인에 대한 비인지주의적 반감의 감성을 표현했는데 그럼 그 사람은 살인이 그르다고 판단한 것인가?"라고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개념적 혼동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4) "도덕적인 성격을 결여한common-or-garden" 비인지주의적 반감의 감성이 무엇이든 그 감성을 표현하는 행위가 곧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인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은 언제나 열린 질문open question이다. 말하자면 그 감성을 표현하는 사람이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인지, 미학적 판단을 하는 것인지, 타산적 판단을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열린 질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개념적 혼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5) "누군가가 살인이 그르다고 판단했다"는 문장과 "그 누군가는 살인에 대한 비인지주의적 반감의 감성을 표현했다"는 문장이 분석적으로 동치라는 것은 참이 아니다.

물론 열린 질문 논증에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에이어가 자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열린 질문 논증을 사용한다는 게 중요하다. 만약 에이어가 이 문제를 피해가기 위해서 열린 질문 논증의 문제점을 들춘다면 자연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도 똑같이 약화되고 말 것이다.

또 열린 질문 논증의 현대적 변형은 여전히 -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 도덕적 진술이 비도덕적으로 환원가능한 도덕적 감정을 표현한다는 생각을 버릴 일단의 근거는 마련하는 듯 보인다. 달왈-기바드-레일턴의 열린 질문 논증을 적용해보자.

(1) [a] 누군가가 x를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라 판단했다고 판단하는 것과 [b] 다른 조건이 같은 한 그 누군가가 x에 대한 자신의 비인지주의적 승인의 감성을 당신에게도 공유하라고 요구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 사이에는 개념적conceptual 연관이 있다. (수정된 내재주의modified internalism"어? 근혜가 x를 좋다고 생각하네? 그럼 근혜는 나도 x를 좋다고 생각하기를 원하겠지?"

(2)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반성적 영어 화자들은 사리가 분명한 (그리고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누군가가 x에 대한 승인의 감성을 표현한다고 판단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조건이 같은 한 그 누군가가 x에 대한 자신의 비인지주의적 승인의 감성을 당신에게도 공유하라고 요구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게 되리라 기대하지는 않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3) 누군가가 x에 대한 비인지적인 승인의 감성을 표현했다고 판단하는 것과 다른 조건이 같은 한 그 누군가가 x에 대한 자신의 비인지주의적 승인의 감성을 당신에게도 공유하라고 요구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 사이에 개념적 연관이 없다면, 우리는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반성적 영어 화자들이 (2)에서 언급된 확신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4) (2)에서 언급된 확신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이 없는 한, 우리는 누군가가 x에 대한 비인지주의적 승인의 감성을 표현했다고 판단하는 것과 바로 그 누군가가 자신의 비인지주의적 감성을 당신에게도 공유하라고 요구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 사이에 개념적 연관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이에 따라,

(5) (2)에서 언급된 확신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이 없는 한, 누군가가 x를 좋다고 판단했다는 판단이 누군가가 x에 대한 비인지주의적 승인의 감성을 표현했다는 판단과 동일하지 않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6) (2)에서 언급된 확신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이 없는 한, x가 좋다고 판단하는 것이 x에 대한 비인지주의적 승인의 감성 표현을 통해 분석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물론 이모티비즘은 "더 좋은 설명"을 제시함으로써 이 비판을 피해갈 수도 있다. 가령 x에 대한 승인의 감성을 표현하는 것과 그것을 다른 사람이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것 사이에 개념적 연관이 있는데 그걸 우리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든가… 하지만 이것은 논점 선취의 오류를 범할 뿐이다.

또 다른 탈출구가 하나 있다. 전제 (1)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x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했다고 판단하는 것과 그 누군가가 x에 대한 자신의 비인지주의적 태도를 당신에게도 공유하라고 요구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 사이에 개념적 연관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연관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외재적이고 우연적인 것일 뿐. "내가 보기에 근혜는 x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애. 응? 아니? 그렇다고 근혜가 나도 x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그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에이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모티비즘의 지지자 중 하나인 스티븐슨Charles L. Stevenson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도덕적 담론의 주요 기능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라고 본다. 다른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도록 동기부여하는 것이 도덕적 담론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키비Peter Kivy는 스티븐슨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윤리적 논쟁ethical argumentation의 직접적 목적은 도덕적 가치에 관한 용어가 훈계적인 계기를 갖는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스티븐슨은 후기에 이 계기를 "유사-명법quasi-imperative"이라 부른 바 있다. 이 용어들은 우리의 승인을 표출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태도를 다른 사람[도 갖기를] 촉구한다. "나는 이것을 승인한다. [그러니] 당신도 그렇게 하라"가 '좋다"에 대한 스티븐슨의 대략적인 분석이었다.[각주:10]


리뷰 텍스트

Alexander Miller, Contemporary Metaethics: An Introduction, 2nd ed. (Cambridge: Polity Press, 2013), §§3.5-3.6.

  1. Simon Blackburn, 『Spreading the Wor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pp. 170-71. [본문으로]
  2. Ibid., p. 197. [본문으로]
  3. A. J. Ayer, 『Language, Truth, and Logic』 2nd ed. (New York: Dover, 2014), p. 107; 강조 추가. [본문으로]
  4. Ibid.; 강조 추가. [본문으로]
  5. Ibid., p. 108. 강조 추가. [본문으로]
  6. A. J. Ayer, "Are There Objective Values?" in 『Freedom and Morality and Other Essays』 (Oxford: Oxford Unvinverssity Press, 1984). p. 30; 강조 추가. [본문으로]
  7. Crispin Wright, "Moral Values, Projection, and Secondary Qualities,"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Supplementary Volume 62 (1988): 1-26, pp. 11-12. [본문으로]
  8. Ibid. [본문으로]
  9. Ayer, op. cit., p. 111. [본문으로]
  10. Peter Kivy, "'Oh boy! You too!': Aesthetic Emotivism Reexamined" in Hans Hahn ed., 『The Philosophy of A. J. Ayer』 (La Salle, IL: Open Court, 1992), p. 3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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