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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 유명론 I [문제 의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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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 유명론 I [문제 의식]

동경 TOKYO 2017. 1. 20. 17:39

보편자universals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명론nominalism의 입장이다. 그들은 왜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가?

① 여러 개별자가 하나의 동일한 보편자를 예화할 수 있는가? 개별자는 저마다 다른 공간을 차지한다. 때문에 개별자들이 하나의 보편자를 예화한다면 단 하나의 보편자가 겹치지 않는 여러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보편자는 애초에 공간을 점유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것을 예화하는 개별자가 차지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도 이에 동의한다. ~의 북쪽에 있음being north of과 같은 보편자가 북쪽에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북쪽north of'이라는 관계를 찾을 수 있는 (…) 곳은 없다. 그것은 런던London에 없고 에딘버러Edinburgh에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도시를 관계짓는 것이며 따라서 두 도시 사이에서 중립적인 것이다."[각주:1] 물론 모든 실재론자가 러셀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러셀과 같은 실재론자가 있는 한 모든 실재론자들이 첫 번째 반론에 무너지지도 않는다.

설사 보편자가 위치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한 시점에 연속적인 하나의 위치만을 점유해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각주:2] 보편자는 그 특성상 그것을 예화하는 개별자가 차지하는 불연속적인 복수의 공간들을 동시에 점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② 실재론은 보편자의 동일성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두 보편자가 동일한지 동일하지 않은지를 판단할 기준도 마련하지 못하고 보편자의 범주를 존재론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무리이지 않은가? 혹자는 보편자의 동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을 예화하는 개별자들을 끌어들일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같은 개별자들에 의해서 예화되는 보편자들을 동일한 것으로 보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인간임being a human being이라는 보편자를 예화하는 개별자들 - 인간들 - 은 죄다 깃털 없는 두발 짐승임being a featherless biped라는 보편자를 예화한다. 두 보편자를 예화하는 개별자는 정확하게 겹친다. 하지만 두 보편자가 동일한가? 그들은 같은 내용contents를 갖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실재론자는 처음부터 이것을 반론으로 여기지 않는다. 보편자의 동일성 조건을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지만 - 그것이 곧 보편자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일성 조건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은 유명론자다.

③ 상당수의 실재론자들은 예화가 관계가 아니라 결합tie 혹은 연계nexus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화를 관계라는 보편자로 볼 때 발생하는 문제를 막기 위한 임시방편적ad hoc 대처가 아닌가? ④ 도대체 보편자와 같은 추상적 존재자에 어떻게 인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가?

하지만 위 문제 의식에 동의하더라도 그것은 실재론 중에서도 일부에 대한 공격으로만 기능할 수 있을 뿐이다.

위 반론들은 모두 실재론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명론자들이 유명론을 내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실재론자들은 보편자를 상정함으로써 비로소 속성 일치attribute agreement 현상이나 주어-술어 문장과 추상 단칭 용어를 사용하는 문장의 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유명론자들은 보편자를 상정하지 않고도 이런 현상들을 충분히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설명력이 뒤처지지는 않는다는 것.

그런 다음에야 실재론자보다 더 적은 종류의 존재자를 상정하는 유명론이 더 우수한 이론이 아니겠는가? 이론적 단순성simplicity 측면에서 앞선다는 것. 이는 중세 유명론자 옥캄William of Ockham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설명에서 단순성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이론적 미덕이라고 말한다. 이 단순성의 원칙은 오늘날 흔히 "옥캄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라 불린다. 필요 없는 것은 다 잘라내야 한다는 의미. 보편자가 바로 그 면도날로 잘라내야 할 무엇이다.


  1. Bertrand Russell, 『The Problems of Philosoph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12), p. 98. [본문으로]
  2. Alan Donagan, "Universals and Metaphysical Realism," 『The Monist』 47(2) (1963): 211-246, p. 13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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