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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 실재론 II [실재론 내부의 논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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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 실재론 II [실재론 내부의 논쟁]

동경 TOKYO 2017. 1. 16. 13:32

여느 이론과 마찬가지로 실재론realism도 단일한 입장은 아니다. 실재론자들도 서로 논쟁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쟁점은 여러가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론의 일반성generality에 관한 것이다. 실재론에 따르면 속성 일치 현상은 보편자 덕택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경우에 그런가? 또 그들은 술어와 같은 일반적 용어가 추상 단칭 용어가 보편자를 외연으로 갖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용어에 해당하는 말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실재론은 극단적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재론자들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실재론에 얼마간의 제한이 가해져야 할 것이다. 어떤 제한?


예화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는다does not exemplify itself"는 술어를 생각해보자. 이 술어는 고유 명사proper noun 등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을 지칭하는 이름에 적용되면 참이다. 가령 박근혜는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는다. 개별자 박근혜가 예화할 수 있는 보편자 박근혜란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박근혜다"라는 말은 두 대상이 동일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지, 어떤 대상이 어떤 함수의 인자argument[각주:1]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논리적 어휘의 의미론적 값] 하지만 이 술어가 비물질성the property of being incorporeal에 적용되면 거짓이다. 왜냐하면 비물질성은 그 자체로 비물질성이라는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물질성을 예화한다. 속성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술어는 보편자를 가질 수 없는 듯 보인다.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음non-selfexemplifying이라는 속성은 자기 자신을 예화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이 속성이 스스로를 예화하는 순간,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러면 이 속성은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는가?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이 속성이 스스로를 예화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는다는 속성을 갖게 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것. 그래서 대부분의 실재론자들은 적어도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음의 속성 만큼은 보편자를 그 지시체로 갖지 않는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런데 실재론에 대한 제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화한다"는 술어도 배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있는 것. 사실 이런 문제 제기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기본적인 생각은 이렇다. "예화한다"는 술어에 대응하는 보편자가 있다면 실재론자들은 무한 퇴행infinite regress의 문제에 빠지게 된다는 것. 이 문제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① 사물들이 F하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실재론자들은 그것들이 F-ness라는 보편자를 예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설명을 하는 순간 실재론자들은 이 사물들이 F-ness를 예화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현상을 설명하라는 요구에 직면한다. 이걸 설명하자면 그들은 F-ness를 예화함이라는 보편자를 끌어들여야 한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니다. 그들은 다시 이 사물들이 F-ness를 예화함을 예화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현상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망했어요.

토마토랑 소방차는 왜 비슷해?

둘 다 빨강을 예화하거든.

왜 둘 다 빨강을 예화해?

둘 다 빨강에 대한 예화를 예화하거든.

왜 둘다 빨강을 예화함을 예화해?

둘 다 빨강에 대한 예화의 예화를 예화하거든.

이제 그만해.

② 문장 "aF다"가 참이 되려면 "F다"에 대응하는 보편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 실재론자의 주장이다. "a"의 지시체가 "F"가 표현하는 보편자를 예화하기 때문에 비로소 이 문장이 참이 되다는 것. 그래서 이 문장을 "aF-ness를 예화한다"고 고쳐 쓸 수도 있다. 근데 이 문장의 참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F-ness를 예화한다"는 술어에 대응하는 보편자가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 이 술어가 표현하는 F-ness에 대한 예화라는 보편자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장을 다시 "aF-ness에 대한 예화를 예화한다"고 고쳐 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문장이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또 다른 술어를 들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망했어요.

유명론자들은 신이 난다. 이런 문제가 실재론을 거부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몇몇 실재론자들은 쫄아서 ①에 대해서는 모든 다른 형태의 속성 일치 현상이 저마다 별개의 보편자의 존재를 요청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②에 대해서는 의미론적으로 다른 모든 일반적 용어가 저마다 별개의 보편자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경우에 따라 해당 사례가 요청하는 듯 보이는 보편자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간이 큰 또 다른 실재론자들은 무한 퇴행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①에 대해서 특정 사물들이 F-ness를 예화하기 때문에 F하다는 점에서 유사한 것이라고 말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말한다. 이 설명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꼭 두 번째 속성 일치 현상 - 특정 사물들이 F-ness를 예화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 을 설명해야만 첫 번째 설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들은 ②에 대해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aF다"의 참을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aF-ness를 예화한다"의 참까지 같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한 퇴행이 속성 일치 현상이나 주어-술어 문장의 참을 설명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많은 실재론자들은 이 무한 퇴행을 반기지는 않을 것이다. 무한히 많은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존재론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이 실재론자들 역시도 실재론에 상당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무한 퇴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대응도 가능하다. 속성 일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새로이 설명되어야 할 현상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거나 "aF다"와 "aF-ness를 예화한다"는 문장은 구문론적으로나 문법적으로는 달라도 의미론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

하지만 ①과 ②의 무한 퇴행을 제쳐두더라도 대다수의 실재론자들이 두려워 하는 또 다른 무한 퇴행이 남아 있으니…

aF이기 위해서는 개별자 a와 보편자 F-ness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이걸로는 불충분하다. aF-ness를 예화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aF-ness)가 ~를 예화함exemplifying이라는 관계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화 관계 역시도 하나의 보편자다. 그렇다면 (a, F-ness)는 예화 관계를 예화해야 한다. (aF-ness)가 예화 관계 1에 참여하자면 다시 그것을 예화한다. 곧 예화 관계 2에도 참여해야 하는 것. 곧 예화 관계 2를 예화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러면 다시 예화 관계 3에 참여해야 한다. 망했어요.

이건 좀 심각해 보인다. 이 무한 퇴행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aF-ness를 예화하는 것 자체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상당수의 실재론자들은 실재론적 입장을 예화 개념 자체에 적용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예화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관계는 두 대상에 의해 예화됨으로써 두 대상을 엮게 된다. 하지만 예화는 예화되지 않고도 두 대상을 엮을 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중개자를 거치지 않는 연결자unmediated linker"라는 것이다. 많은 실재론자는 이것이 예화 개념의 가장 기초적 특징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개별자와 보편자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것은 비관계적nonrelational이다. 그 연결은 흔히 "결합tie" 혹은 "연계nexus"라 불린다.

물론 모든 실재론자가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화 개념에 대응하는 보편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실재론에 이론적 보탬이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실재론자들은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는다"는 술어에 대응하는 보편자를 배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왜? 그냥 그걸 인정하면 문제가 생기니까? 이런 대답은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는 속성이 일으키는 역설을 방지하려는 임시 방편적ad hoc 반응처럼 보이기 쉽다. 하지만 예화 개념에 대응하는 보편자가 없다는 입장을 합당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는 속성에 대응하는 보편자가 없다는 주장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는다"는 술어가 이미 "예화한다"는 술어에서 파생된 것 아니겠는가? 예화가 애초에 보편자로서의 관계가 아니라면 스스로를 예화하지 않는 속성도 보편자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게 된다.


정의된 술어, 정의되지 않은 술어

"제임스는 총각이다James is a bachelor." 실재론자들은 이 문장의 술어에 대응하는 보편자 총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 같다. 그런데 총각임being a bachelor이라는 속성은 (1) 인간임being a human being, (2) 수컷남자임being a male, 그리고 (3) 미혼임being unmarried라는 세 가지 속성을 가질 때, 오직 그 때에만, 갖게 되는 속성이다. 전자가 후자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실재론자라면 인간임, 수컷임, 그리고 미혼임이라는 보편자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총각임이라는 보편자도 따로 존재하는가? 애초에 실재론을 옹호하는 논변은 보편자를 상정함으로써 잘 설명할 수 있는 현상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제4의 보편자를 끌어들일 필요는가 있을까? 누군가가 인간이고, 남자이고, 미혼이라면 그때 - 그가 총각이라는 보편자를 예화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 그를 총각이라 부를 수 있다고 말하면 안 되나? 비슷한 문제 의식은 미혼임이라는 속성에도 적용할 수 있다. 실재론에 따르면 기혼임being married라는 보편자도 존재할 것인데 굳이 미혼임이라는 보편자까지 상정할 필요가 있을까? 기혼임이라는 보편자를 예화하지 않은 개별자를 더러 - 그것이 미혼임이라는 보편자를 예화한 것은 아니더라도 - 그를 미혼자라 부를 수 있다고 말하면 안 되나? 실재론자들은 이 질문에 각기 다른 답을 내놓는다.

실재론자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의미론적으로 동일하지 않은 술어들은 죄다 별개의 보편자와 대응한다는 생각에 난색을 표한다. 오직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술어들만이 별개의 보편자와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술어를 정의된defined 것과 정의되지 않은undefined 것으로 나누고, 후자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된 술어와 그렇지 않은 술어의 구분은 자의적arbitrary이라는 지적이 있다. 어떤 언어에서는 정의되지 않은 술어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언어에서는 정의된 술어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언어 체계를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정의되지 않은 술어들에 대응하는 보편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정당화를 내놓기도 한다. 정의되지 않은, 곧 기초적basic 혹은 원초적primitive 술어란 경험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인식론적으로 기초적이거나 원초적인 특징을 표현하는 술어라는 것이다. 색, 소리, 냄새, 단순 형태와 같은 것들을 묘사하는 술어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주장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감각적sensory 혹은 지각적perceptual 속성으로만 분석될 수는 없는 술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과학과 도덕 혹은 윤리와 관련된 술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술어들을 순전히 감각 혹은 지각과 관련된 용어로만 분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의된 술어와 정의되지 않은 술어 사이의 구분을 고수하는 이들은 이 술어들이 기실 기술적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하게 된다. 과학의 이론적 술어들은 단순히 감각적 혹은 지각적 술어들만을 포함한 일련의 진술들로부터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진술들로 나아가게끔 하는 도구일 뿐이며, 도덕적 혹은 윤리적 술어들은 행위자나 행위, 삶의 방식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한 환원주의자들도 그들에게 하는 실재론자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모든 술어가 기초적 술어로 분석된다는 주장에 반대할 이유는 그것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으로 이어진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실은 "총각"처럼 쉬이 기초적 술어들로 분석될 수 있는 술어가 거의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게임game"이라는 술어를 예로 든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게임"이라 부르는 것들을 생각해보라. 보드 게임, 카드 게임, 올림픽 게임 같은 것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부탁한다. 제발 이렇게 말하지는 말자. "당연히 공통점이 있겠지. 전부 '게임'이라고 불리니까." 그러지 말고 이 모든 게임의 공통점이 정말로 있는지 눈여겨보자. 제대로 눈여겨 본다면 그것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갖는 것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게 있다면 그것은 그것들 사이의 유사성, 관계, 그것들의 연속들 뿐.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생각하지 말고 보라! 가령 보드 게임들, 그것들 사이의 다채로운 관계들을 보라. 이제, 카드 게임을 보라. [보드 게임들]과 대응하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드 게임들 사이의] 공통점 상당수는 빠질 것이고, 또 [보드 게임 집단과 카드 게임 집단 사이의] 다른 [공통점]들이 등장할 것이다. 공을 다루는 게임으로 넘어가면, 공통점 상당 부분이 유지될 것이지만, 또 상당 부분은 사라질 것이다. 이 모든 [게임]들이 다 "즐거움을 준다"고? 노우츠 앤 크로시스Noughts and Crosses 게임과 비교해보라. [지루한 게임이 아닌가?]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거나 게이머들 사이에 경쟁이 있다고? [혼자 하는 카드 게임] 페이션스patience를 생각해보라. 공을 다루는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가 공을 벽에 던지고 돌아오는 공을 잡을 때, 이 특징은 사라진다. 기술과 운이 작용하는 부분들을 보라. 체스에서 필요한 기술과 테니스에서 필요한 기술들의 차이도. 이제 [아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인] ring-a-ring-a-roses와 같은 게임을 생각해보라. 여기에는 분명 즐거움의 요소가 있다. 하지만 다른 특징들이 얼마나 많이 사라졌는가! 우리는 더욱 더 많은 게임들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유사성이 나타나고 또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2]

비트겐슈타인은 대부분의 술어가 "게임"과 같다고 말한다. 오늘날 정의되지 않은 술어와 정의된 술어 사이의 구분이 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생각이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럼 "총각"은? 적어도 이 술어에 대응하는 별개의 보편자는 존재하나?

환원주의적 입장의 대척점에 선 총체주의자들holists은 보편자를 다른 것으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총각"이나 "미혼"이나 각각 별개의 술어이며, 각각에 대응하는 별도의 보편자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에 동의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과 달리 그들은 술어의 분석불가능성이 실재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이라는 술어를 분석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총체주의적 입장을 채택하는 실재론자들은 그저 게임임being a game이라는 별도의 속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문제가 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술어를 기초적인 것과 비기초적인 것으로 나누는 실재론자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경험론적 견해를 채택하지 않고도 이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고 본다. 경험론에 기대어 둘을 구분하고 자 한 이들은 (1) 단순히 지각적 혹은 관찰적 술어들만이 존재론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과 (2) 기초적 술어와 비기초적 술어 사이의 관계가 오직 정의definition 혹은 번역translation 밖에 없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실패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가 반드시 환원으로만 설명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가 곧 기초적 술어와 비기초적 술어 사이의 구분 또한 붕괴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1) 비록 지각할 수는 없더라도 물리학과 같은 경험 과학의 도움을 받아 탐구할 수 있는 존재자가 있다고 말한다. "과학적 실재론자scientific realists"라 불리는 그들에 따르면 기초적 술어란 완벽한 물리 이론을 구성하는 데에 필수적인 술어들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응하는 보편자의 존재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 밝혀낼 수 있다. 이들은 총체주의자들이 선험주의apriorism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그냥 이미 주어진 술어들을 가지고서 어떤 보편자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공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2) 반드시 비기초적 술어가 기초적 술어에 의해 정의되거나 기초적 술어들의 묶음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보편자가 반드시 다른 보편자로 환원된다고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기초적 술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응하는 보편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 지점에서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제시된다. 어떤 이들은 (a) 비록 물리 이론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술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응하는 보편자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보편자들은 기초적 술어에 대응하는 보편자에 우선하지 않는다. 물론 보다 근본적인 보편자로 환원되거나 분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물리적 보편자는 물리적 보편자에 수반supervenience된다.[각주:3] (b) 이보다 극단적인 견해도 있다. 제거주의eliminativism라 불리는 이 입장은 물리 이론에서 참고되는 보편자들로 분석될 수 없는 보편자들은 아예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일상 언어 - 그것은 물리 이론에서 사용되지 않는 술어들을 많이 포함하는데 - 는 모두 물리적 세계에 대한 성숙하지 못한 표현일 뿐이며, 모두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술어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는 존재하는가?

예화되지 않은 보편자는 존재하는가? 물론 존재한다. 공룡은 멸망했다. 따라서 공룡이라는 종으로서의 보편자는 그 어떤 개별자도 예화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연히 예화되지 않은 것이다. 보다 까다로운 질문은 필연적으로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가 있냐는 것이다. 일군의 실재론자들은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이런 입장이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을 플라톤주의자Platonists라 부른다.

반면에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Aristotelians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이 이런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예화되지 않은 보편자(=순수 형상Pure Form)의 존재를 부정하는가? 만약 속성과 종, 관계가 시공간에 예화될 필요가 없다면 여러 형이상학적·인식론적 문제가 나타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① 도대체 어떻게 시공간을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는 것과 시공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사이에 연결이 있을 수 있는가? ② 도대체 어떻게 시공간을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는 것에 대해 인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가? 우리와 보편자 사이에는 인과적 관계가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보편자에 대한 지식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본류적 지식에 대해 회의적인 철학자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에 대한 지식과 보편자에 대한 지식이 별개로 습득된다고 보지 않았다. 우리가 개별자를 파악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의 속성과, 그것이 속하는 종과, 그것이 참여하는 관계를 파악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보편자를 파악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예화하는 개별자와 접촉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무어라 답하는가? 실재론자들은 주어-술어 문장에서 술어는 지시체를 갖는다고 본다. 이것은 그 문장이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a는 F다"라는 문장에서 술어는 F-ness를 외연으로 갖는다. 이는 실제로 aF-ness를 예화할 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이 문장의 진리값에 따라 그 문장을 구성하는 표현들의 지시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aF다"라는 문장이 거짓일 때도 이 문장의 술어는 F-ness를 외연으로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은 다시 이 문장의 거짓이 필연적인지 우연적인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이들이 보기에 보편자는 필연적 존재자다. 예화되지 않을 수도는 있어도, 없을 수는 없다는 것.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오히려 반직관적인 존재론을 받아들인다고 비판한다. 보편자의 존재가 개별자의 존재에 의존하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보편자는 개별자들 사이의 속성 일치 현상 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서, 그것을 예화하는 개별자들보다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의 관계를 전도시키지 않는가?

그들은 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말하는 형이상학적·인식론적 문제란 것도 과장되어 있다고 말한다. "두 세계two-worlds" 존재론이 꼭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① 보편자와 개별자를 잇는 것은 예화라는 결합 혹은 연계다. 예화는 존재론적으로 기초적이거나 원초적이어서 더 이상 설명하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예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로 사용하는 것 아닌가?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예화 개념을 설명하기가 수월해지는 건 아니다. ②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에 대한 지식은 예화된 보편자에 대한 지식에 근거한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갖가지 보편자를 예화한 개별자를 접하고, 이를 통해 보편자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이어서 이를 바탕으로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에 대한 지식까지도 얻을 수 있다. 물론 예화된 보편자들과 별다른 관계가 없는 보편자에 대한 지식은 얻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주의자들이 이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예화되지 않는 보편자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얻느냐에 대한 답이 궁색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플라톤주의자는 이 점을 인정한다.

  1. 논증이 아니다. [본문으로]
  2.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G. E. M. Anscombe (London: Macmillan, 1953), p. 66. [본문으로]
  3. A가 B에 수반된다는 말은 A의 변화는 반드시 B의 변화를 필요로 함을 의미한다. B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A에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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