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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형이상학사

동경 TOKYO 2017. 1. 5. 21:57

형이상학이 무엇인지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 형이상학의 역사가 길다는, 그래서 여러 주제가 여러 방법론을 통해 다루어져 왔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면 대체 왜? 이 질문에 답하자면 형이상학적 탐구의 유래를 잠깐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형이상학metaphysics"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어떤 작업이 이루어지는가?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은 이 책에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후대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을 정리하면서 자연학physics 다음에 오는 책이라는 의미로 "metaphysics"라는 이름을 붙인 것. 그래서 어원학적 접근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에서 무엇을 다루는가? 그는 이 책이 "제1철학first philosophy"에 관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문제는 이 "제1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대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철학은 곧 제1 원인first causes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이라 말한다. 이렇게 보면 형이상학은 다른 학문의 탐구 대상과는 구분되는 별도의 탐구 대상을 가진 학문처럼 보인다. 이 제1원인이란 비물질적 실체, 아마도 신God 혹은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에 준하는 무엇일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형이상학이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지점 중 하나는 바로 형이상학은 그 탐구 대상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학이나 물리학은 수와 물질이 있다고 가정한 후, 그것에 대해 연구한다.[각주:1] 그러나 형이상학은 제1원인이 도대체 존재하는지를 물으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또 다른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철학의 모습을 조금 달리 묘사하는 듯 보인다. 형이상학이 바로 "존재로서의 존재being qua being"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형이상학은 다른 학문의 탐구 대상과는 구분되는 자신만의 탐구 대상을 갖는 학문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탐구하는 보편적 학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형이상학 다른 학문과 무엇이 다른가? 바로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형이상학은 존재를 다른 무엇이 아닌 존재하는 것으로서 바라본다. 사물들 혹은 존재자들이 다만 존재함으로써 갖게 되는 속성이나 특징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속성과 특징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형이상학자들은 존재하는 것들을 여러 범주categories - 사물들이 속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혹은 가장 넓은 종류 - 로 분류하고자 한다. 그들은 어떤 범주들이 있는지, 각 범주들의 고유한 특징들은 무엇인지, 각 범주들은 서로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 연구한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것들의 구조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형이상학은 어떤 것인가? 다른 학문이 다루지 않는 무언가를 다루는 학문인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루는 학문인가? 아리스토렐레스는 형이상학에 대한 이들 두 가지 관점이 긴장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제1원인을 연구하는 것은 곧 사물의 주된 특징들을 낳는 원인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물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1원인을 연구하는 것은 곧 존재하는 것들을 다만 존재하는 것으로 연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형이상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인 이상 제1원인으로서의 신도 그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제1원인에 대한 탐구로서의 형이상학과 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한 탐구로서의 형이상학은 조화될 수 있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형이상학에 대한 이같은 "중첩적dual" 이해는 중세 시대까지도 이어진다.


17-18세기 합리론의 형이상학

그런데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형이상학의 범위를 훨씬 넓게 잡았다. 그들은 여전히 사물이 속한 가장 일반적인 종류들에 대한 탐구가 형이상학의 핵심된 부분이며, 이 탐구에서 신적 실체Divine Substance, 즉 제1원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의 범위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까지도 형이상학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수학과 자연과학이 발달했는데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에서 다룬 것들 중 이들 학문이 다룰 수 없는 것들을 자연학을 넘어선 것meta-physics, 곧 형이상학적 탐구의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이제 심신 관계나 자유의지에 대한 탐구도 모두 형이상학적 탐구로 여겨지게 된다. (실제로 이런 관점은 현대에서도 널리 통용되는 것이다.)

뭐야, 이거 짬뽕아냐? 합리론자들은 물론 하나로 묶기 힘든 대상을 모두 형이상학의 탐구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모르지 않았다. 형이상학은 존재에 대한 학문이다. 그런데 존재자들은 여러 관점에서 탐구될 수 있다. 그것을 다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연구하는 것을 그들은 일반 형이상학general metaphysics라 불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한 탐구라고 말한 그것과 같다.

그러나 존재자들은 다른 관점에서도 해석될 수 있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조금 더 구체적인 특징을 가진 것으로서 간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존재자들을 이렇게 바라보는 형이상학을 그들은 특수 형이상학special metaphysics라 불렀다. 변화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자들을 연구하는 우주론cosmology, 인간과 같이 합리적 존재로서의 존재자들을 연구하는 이성 심리학rational psychology, 신적인 것으로서의 존재자들을 연구하는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 등이 특수 형이상학의 분과들에 속한다. (자연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1원인에 대한 탐구로서 정의한 형이상학과 같다.)

특수 형이상학이 일반 형이상학과 구분되는 것은 단순히 그 탐구 대상이 다르다는 것만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적 논의가 철학 이전의 소박한 믿음과 조화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합리론의 형이상학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이어서, 매우 사변적인 성격을 띤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을 보라…

그러다보니 경험론자들에게 두드려 맞는다. 감각 경험을 통한 정당화 없이 사변적 체계를 전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에 부딪히는 것이다. 본 적 있어? 있냐고? 감각 내용을 통해 설명되거나 분석될 수 없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비판 앞에서 합리론자들은 많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적어도 칸트는 그렇게 봤다.


칸트의 비판 형이상학

우리가 갖는 지식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과 감각 경험으로부터 주어지는 날 경험의 종합이다. 감각 경험이 없이 우리의 지식은 내용을 갖출 수 없다. 개념 없이 우리의 지식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합리론과 경험론은 각각 이 점을 간과했다. 칸트는 우리에게 내재한 개념적 틀을 감각 기관을 통해 주어지는 자료에 적용함으로써 지식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이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이러한 절차를 거쳐 얻게 된 것이지, 외부 세계에 대한 것은 아니다. 물자체로서의 외부 세계에 우리는 접근할 수 없다.

칸트가 보기에 기존의 형이상학은 인간의 지식이 담을 수 있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담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도대체가 실재를 알 수 없다면 실재에 대한 지식도 불가능하며, 따라서 인간 지식의 범위를 넘어선 대상에 대한 초험적 형이상학transcendent metaphysics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기획이다. 하지만 그가 형이상학 싸그리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초험적 형이상학과 비판 형이상학critical metaphysics를 대비시킨다. 전자가 우리의 감각 경험을 넘어서는 실재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우리 인간의 사고와 지식이 갖는 가장 일반적인 특성에 대한 탐구다. 우리가 세계를 표상할 때 작용하는 개념들이 무엇이며, 그 개념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지 등을 연구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 비판 형이상학만큼은 엄연히 철학의 한 분과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형이상학의 탐구 대상이 개념적 도식 혹은 틀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그것의 성격에 대해서는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칸트는 이 개념이 불변하는 것이라고 보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동적으로 변화한다고 보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개념 너머에 물자체가 있다고 말하지만, 다른 이들은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형이상학의 대상이 세계 그 자체일 수는 없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넓게 볼 때 칸트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 형이상학과 분명히 구분된다.


전통 형이상학은 불가능한가?

칸트의 형이상학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외부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앎, 곧 전통적 형이상학이 불가능한 까닭은 오로지 개념적 틀을 통해서만 그것을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칸트의 논지다. 그러나 개념적 틀에 대한 앎도 마찬가지로 개념을 통해서만 사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전통적 형이상학에게 적용되는 문제는 칸트的 형이상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 아닌가?

둘째, 도대체 개념을 통해 사유되는 것은 그저 사유될 뿐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그렇게 사유된 개념적 틀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칸트의 주장은 자가당착에 빠진다.

셋째, 개념은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한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 주장은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초험적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형이상학적 실재론[각주:2]자들의 입장은 이렇다.


왜 일반 형이상학인가?

우리가 도대체 일반 형이상학을 공부해야 한다면 그것은 왜 그런가? 첫째, 특수 형이상학의 주제들은 기실 철학의 다른 분과 학문의 주제들로 여겨진다. 심신 관계는 심리철학의 핵심 주제고, 자유의지는 행위철학philosophy of action의 핵심 주제이며, 신은 종교철학의 핵심 주제다. 우리가 형이상학에 고유한 주제가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심신 관계와 자유의지와 신이 각각 형이상학이 아닌 다른 철학의 분과 학문에서 다루어도 무방하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형이상학은 존재로서의 존재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심리철학을 하면서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탐구와 더불어 인식론적인 탐구도 할 수 있다. 가령 정신mind이 실체로서 존재하는지 혹은 부수현상epiphenomena로서만 존재하는지를 묻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정신에 대해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은 인식론적 질문이다. 행위철학과 종교철학도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질문과 인식론적 질문들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특정 질문들의 형이상학적 성격은 그 질문이 무엇에 대한 것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질문이 어떤 관점에서 던져진 것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취하는 관점에 의해 정의된다고 보는 편이 오늘날 우리가 "형이상학"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과 정합적이다.


리뷰 텍스트

Michael J. Loux, Metaphysics: A Contemporary Introduction, 3rd ed. (New York: Routledge, 2006), pp. 1-11.

  1. 이것은 물론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그 연구 대상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 역시 수나 물질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 탐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탐구는 수학적이나 물리학적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이다. [본문으로]
  2. 보편자 실재론과는 다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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