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사 예정] 철학, 끄적끄적
보편자 유명론 V [허구주의] 본문
극단적 유명론austere nominalism과 메타언어적 유명론metalinguistic nominalism, 트롭 이론trope theory은 모두 얼핏 보편자의 존재를 암시하는 듯한 표현들을 담은 문장을 그렇지 않은 문장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이 문장들이 왜 참일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최근 이들과는 구분되는 또 다른 유명론적 입장이 대두되고 있다. 바로 허구주의fictionalism다. 1
허구주의는
(1) 용기는 도덕적 덕이다Courage is a moral virtue.
(2) 빨강은 색상이다Red is a color.
등의 문장들은 문자 그대로literally 볼 때 거짓이라고 말한다. 보편자를 상정하지 않고도 이것들이 참이라는 걸 보이기 위해 복잡한 번역을 거칠 필요도 없다. 이 문장들은 그저
(3) 셜록 홈즈는 탐정이다Sherlock Holmes is a detective.
와 같다는 것이다. 이건 당연히 거짓이다. 셜록 홈즈라는 사람은 없으니까. 2
하지만 우리는 이 문장을 실제로 내뱉기도 한다. 왜? 특정한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3)은
(3a)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소설 『셜록 홈즈』 에서 셜록 홈즈는 탐정이다.
를 줄인 것이다. 허구주의는 (1)과 (2)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거짓이다. 하지만 특정한 맥락 아래에서는 참이 될 수 있다. 그 문맥이 바로 실재론realism이다. 실재론자들이 제시하는 이야기의 맥락에 비추어 보면 위 문장이 참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참신한 견해이긴 하다. 그런데 허구주의는 문제를 너무 쉽게 해결하려는 듯 보인다. 보편자를 상정하는 듯 보이는 언어적 표현들을 문제 삼는 다른 유명론자들에게 그 표현들은 그저 허구일 뿐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으로 모든 논의를 끝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보편자 논쟁이 이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하지만 추상적 존재자를 지칭하는 듯한 표현을 담은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맥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건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닐 것 같은데?
또 하나의 문제는 (1)과 (2)를 (3)과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3)을 보면 우리는 그 배후의 맥락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3)이 허구적 주장임을 알아차리고, 그것이 어떤 허구적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아 제시되는 주장인지도 안다. 그러니 굳이 아서 코난 도일과 소설 『셜록 홈즈』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도 (3)을 말하고 또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1)과 (2)도 그렇게 받아들이는가? 사실은 거짓이지만, 그것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어떤 허구적 이야기가 있다고? 글쎄?
- Hartry Field, "Fictionalism, Epistemology, and Modality" in 『Realism, Mathematics, and Modal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and John P. Burgess & Gideon Rosen, 『A Subject With No Object: Strategies for Nominalistic Interpretation of Mathematic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본문으로]
- 문장의 구성 요소가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 반드시 그 문장이 거짓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가령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는 이 문장이 진리값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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